신 벗고 들어가는 곳 / 황지우 시창고
신 벗고 들어가는 곳 / 황지우
아파트 15층에서 뛰어내린 독신녀
그곳에 가보면 틀림없이 베란다에
그녀의 신이 단정하게 놓여 있다
한강에 뛰어든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시멘트 바닥이든 시커먼 물이든
왜 사람들은 뛰어들기 전에
자신이 신었던 것을 가지런하게 놓고 갈까?
댓돌 위에 신발을 짝 맞게 정돈하고 방에 들어가,
임산부도 아이 낳으러 들어가기 전에
신발을 정돈하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뛰어내린 곳에 있는 신발은
생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것은 영원히 어떤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다만 그 방향 이쪽에 그녀가 기른 熱帶漁들이
수족관에서 물거품을 뻐끔거리듯
한번의 삶이 있을 따름이다
돌아보라, 얼마나 많은 잘못 든 길들이 있었던가
가서는 안 되었던 곳,
가고 싶었지만 끝내 들지 못했던 곳들;
말을 듣지 않는, 혼자 사는 애인 집 앞에서 서성이다
침침한 밤길을 돌아오던 날들처럼
헛된 것만을 밟은 신발을 벗고
돌아보면, 생을 '쇼부'칠 수 있는 기회는 꼭 이번만은 아니다
황지우 시인
1952년 전라남도 해남 출생 (본명 황재우)
서울대학교 미학과 및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졸업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연혁(沿革)>이 입선
1980년 {문학과 지성}에 <대답 없는 날들을 위하여> 등을 발표하여 등단
1983년 제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1991년 제36회 현대문학상 수상
1994년 제8회 소월시 문학상 수상
시집 :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 (1985),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93) 뼈아픈 후회 외 (소월시문학상) 게 눈 속의 연꽃(1994)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1998) 나는 너다(1999), 희곡집 : 오월의 신부(2000)
현재 한국종합예술학교 총장
[출처] 신 벗고 들어가는 곳 / 황지우|작성자 마경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