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으로 돌아갑시다 (2562) ///////
201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 류휘석
랜덤 박스 / 류휘석
내겐 매일 허들을 넘다 실패하는 광대들이 살아요
불필요한 기념일이 빼곡한 달력, 숨 쉴 날이 없어요
나 대신 종이에 누워 숨 쉬는 사람들
밤이 되면 광대는 잠을 자고 나는 일어납니다
나는 허들을 치우고 부서진 광대들을 주워 종이 상자에 집어넣습니다
그늘을 뿌리는 거대한 인공 나무, 물을 줘요 잘 자라서 더 크고 뾰족한 허들을 만들어내렴
그렇지만 모든 게 나보다 커져서는 안 돼,
광대들은 일도 하지 않고 아침마다 이불을 걷어냅니다 나는 토스트처럼 튀어 올라 침실을 접어 내던져요 나를 어지럽히는 벽시계와 발목에 생긴 작은 구멍들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커집니다
방이 비좁아서 나는 밖에 있습니다 밖이 끝나면 집에 돌아가 상자를 만들어야 해요 재사용 종이는 거칠고 단단해서 반성에 알맞습니다
천장에 붙어 기웃거리는 가녀리고 얇은 나의 광대들
반성이 시작된 집은 무덤 냄새가 나는 요람 같아요
나는 탄생부터 기워온 주머니를 뒤집습니다 바닥은 먼지로 가득찹니다
도무지 채워지질 않는 상자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 실패와 실종
내가 죽으면 광대들은 허들을 넘을까요
궁금해서 죽지도 못합니다
[당선소감] 눈 감으면 떠오르는 사람들, 고맙습니다
오후가 끝나가고 있을 때 전화를 받았다.
광고 전화인 줄 알았다.
오랜 불면 탓에 힘없는 목소리로 받았던 게 마음에 걸린다.
졸업을 앞둔 상태라 걱정이 많았다.
두꺼운 불안이 나를 감싸고 끝없이 진동하는 기분 속에서, 나는 내내 깨어 뭐라도 해야 하는 사람.
뭐라도 읽고, 뭐라도 써서, 뭐라도 되어야만 하는 사람.
녹음된 내 목소리는 여전히 사랑하기 어렵지만 아주 조금은 허락을 받은 것 같아서 기쁘다.
매 순간 후회되는 일이 많아서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많다.
집을 사게 된다면, 넓은 베란다가 있는 집을 사서 세상에서 제일 긴 빨랫줄을 이어야지.
슬픈 사람들을 건져 널어둬야지.
잘 마르고 잘 개지는 사람들. 그것들을 다 게워낸 후에는 편히 잘 수 있을까.
미안합니다. 건강해지겠습니다.
못난 아들 끝까지 믿어주신 부모님 감사드립니다.
사랑합니다. 누나 많이 챙겨줘서 고마워.
부족한 저를 이끌어주신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님들. 감사드립니다.
더 믿고 의지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용기가 되어준 동기들, 고맙다. 잠든 저를 깨워 차에 태우고 백일장에 데려갔던,
잘하고 있다고 매번 말해줬던 여러 선배님 감사합니다.
항상 응원하고 자존감 채워주는 후배들, 고맙고 사랑해.
그리고 서산 친구들,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고맙고 사랑한다.
정말 힘들 때 어깨를 두드려주신 심사위원 나희덕, 안도현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배울 게 아직 많은 저에게 더 많이 혼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학예회. 너희들이 없었으면 나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어.
더 열심히 써서 덜 우울해지자.
[심사평] 실패·실종을 겪은 자만이 그릴 수 있는 우리시대 음화
예심을 통과한 열 분의 작품들은 완성도가 비슷한 수준이어서 우열을 가르기가 쉽지 않았다.
그중에서
‘랜덤 박스’,
‘앞의 감정’,
‘요르단에서 온 편지’ 등이 마지막까지 남았다.
논의를 거듭할수록 언어적 테크닉이 승한 시보다는
고유한 자기 목소리를 지닌 시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졌다.
‘요르단에서 온 편지’ 외 6편은
이국적인 소재나 배경, 동화적 상상력을 통해 이채로운 이미지들을 빚어낸다.
일상의 공간이 자연스럽게 먼 극지나 태고의 시간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풍경이 매력적이다.
그러나 감각과 리듬에만 주로 의지하다보니 소품에 그치는 느낌이 들었다.
‘앞의 감정’ 외 2편은
시어를 다루는 숙련된 솜씨와 구어체의 다정한 문장들 덕분에 흡인력 있게 읽힌다.
그런데 그 유려한 문장들이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잘 잡히지 않았고,
기시감이 느껴지는 표현들이 눈에 띄었다.
매끄러운 언어 뒤에 인식의 충격이나 여운이 좀더 있으면 좋겠다.
당선작으로 뽑은 ‘랜덤 박스’ 외 2편은
다소 장황한 듯 하지만 시적 사유와 문제의식을 끝까지 밀고 간다는 점에서 믿음이 갔다.
우울한 판타지에 가까운 그의 시들은 특히 ‘허’나 ‘허기’, ‘죽음’ 등에 예민한 촉수를 대고 있다.
“매일 허들을 넘다 실패하는 광대들”처럼 종이상자에 갇혀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현대인의 일상은 부단한 실패와 실종을 겪은 자만이 그려낼 수 있는 우리 시대의 음화(陰畵)가 아닐까.
당선을 축하드리고, 그 갇혀 있음과 미끄러짐을 딛고 앞으로도 치열하게 살아내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안도현·나희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