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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극필반
물금역에서 기차에서 내려 넓은 들판을 지나 처녀네
집에 들어갔다
극도의 긴장속 기둥을 사이에 두고 마루에 걸터앉아
앞만 보고 있었다
필요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그녀와 나 단 둘뿐이었는도...
반드시 혼사가 성립되리라는 중신애비의 말도
헛말이 되었다
*첫선 보는 날...
물극필반
물론 모두가 다 완벽할수는 없다
극히 일부지만 누구나 실수한다
필요한 조치는 다 갖추어야
반드시 승리를 장담할수 있다
물극필반(物極必反)달도 차면 기운다
물극필반物極必反 , 物极必反 , wù jí bì fǎn
사물은 극에 달하면 반드시 되돌아오게 된다. 흥망성쇠는 반복되는 것이므로 모든 일에 지나치게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궁녀로서 두 명의 황제(태종(太宗), 고종(高宗))를 섬겼고, 일개 궁녀에서 황후의 자리까지 올랐으며, 두 명의 황제(중종(中宗), 예종(睿宗))를 낳았고, 스스로는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황제가 된 측천무후(則天武后)는 뛰어난 정치적 역량을 지닌 여걸 중의 여걸로 원명은 무조(武照)다.
원래 태종의 후궁이었던 그녀는 태종이 병이 든 후 황태자 이치(李治, 후의 고종)와 서로 연모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태종이 죽자 감업사(感業寺)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 후사를 보지 못한 궁녀는 자기가 모시던 황제가 죽으면 궁에서 나가 절이나 도량에 들어야 한다는 규정에 의해서였다. 그런데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이 후궁 소숙비(蕭淑妃)를 총애하자, 왕황후는 무조를 이용해 고종과 소숙비 사이를 갈라놓을 생각으로 비구니가 된 무조를 환속시키고 다시 궁으로 불러들였다.
궁중으로 돌아온 무조는 고종과 왕황후의 사랑과 신임을 받아 소의(昭儀)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왕황후와 한편이 되어 소숙비를 모함하여 유폐시킨 후, 음모를 꾸며 왕황후까지 몰아내고 황후가 되었다. 황후의 자리에 오른 그녀는 세력 구축에 열을 올리는 한편, 고종과 함께 수렴정치를 하면서 정치에 깊이 개입했다. 고종이 죽고 중종이 즉위하자 섭정을 하였으며, 마침내는 중종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고는 나라 이름도 주(周)로 바꾸고 스스로 신성황제(神聖皇帝)라 칭했다. 측천무후는 690년부터 705년까지 15년 동안 황제의 자리를 지켰는데,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기간은 황후가 된 655년부터 치자면 무려 50년이나 된다.
측천무후는 고종이 죽고 어린 중종이 즉위하자 섭정을 했는데, 중종이 친정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섭정을 그만두지 않았다. 대신들은 이에 대해 불만을 갖고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다. 그 중 대신 소안환(蘇安桓)은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간언하였다.
「이제 태자를 생각해 보면 나이 적지 않고 재덕도 갖추고 있는데, 폐하께서는 황제의 보위를 탐하여 모자지간의 정을 잊고 계십니다. ······ 폐하께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슨 얼굴로 당(唐) 왕조의 종묘를 뵐 것이며, 무슨 고명으로 대제의 능묘를 알현할 것입니까. 폐하께서는 무슨 까닭에 밤낮으로 근심을 쌓으시며 이미 새벽종이 울리고 물시계의 물이 다 떨어진 것(나이 먹고 힘은 달려 말년이 가까웠음)을 모르십니까? 신이 알기로는 하늘의 뜻과 백성의 마음은 모두 이씨(李氏)에게 돌아갔습니다. 무후께서는 편안하게 황제의 자리에 계시지만, 사물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반전하고, 그릇도 가득 차면 넘친다는 도리를 모르고 계십니다. 옛말에 “마땅히 끊어야 할 때 끊지 않으면 그 혼란을 입게 된다.”고 했는데 바로 이를 이르는 말입니다.
(當今太子追回, 年德俱盛, 陛下貪其寶位而忘母子深恩, ······ 惟陛下思之, 將何聖顔以見唐家宗廟, 將何誥命以謁大帝墳陵. 陛下何故日夜積憂, 不知鐘鳴漏盡. 臣以爲天心人事, 還歸李家. 陛下雖安天位, 殊不知物極必反, 器滿則傾. 故語曰, 當斷不斷, 將受其亂. 此之謂也.)」
이 이야기는 《신당서(新唐書) 〈소안환전(蘇安桓傳)〉》에 나온다. ‘물극필반’의 전고는 《예기》, 《여씨춘추》, 《갈관자》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릇이 가득 차면 기울게 되고, 뜻이 가득 차면 뒤집히게 된다.(器滿則傾, 志滿則覆.)」(《예기(禮記) 〈곡례(曲禮)〉》)
「온전해지면 반드시 이지러지고, 극에 달하면 반드시 뒤집힌다.(全則必缺, 極則必反.)」(《여씨춘추(呂氏春秋) 〈박물(博志)〉》)
「사물이 극에 달하면 뒤집히게 되니 이를 환류라고 한다.(物極則反, 命曰環流.)」(《갈관자(鶡冠子) 〈환류(環流)〉》)
산에 올라 정상에 다다르면 내려와야 하는 것처럼 권력도 언젠가는 몰락하게 되어 있지. 이게 바로 ‘물극필반’의 원리야. 그러므로 권력을 잡게 되면 물러난 뒤를 생각하면서 써야 하는 거야.
〖역사 · 문화 자료─유일무이한 여황제, 측천무후〗
고구려를 정벌하고 동북아의 새로운 질서를 개편하려고 계획했던 당태종(唐太宗, 재위 626∼649)은 고구려 정벌에 실패한 후, 재차 원정을 준비하던 중에 이병(利病, 이질)으로 사망했다. 649년, 태종의 나이 51세 때였다.
정관(貞觀)의 마지막 해인 649년, 병이 날로 악화되자 태종은 황태자 이치(李治)를 취미궁(翠微宮)으로 불렀다. 취미궁에 든 태자는 태종 곁에서 병시중을 들고 있는 한 궁녀의 모습에 마음이 사로잡히고 말았다. 태자와 궁녀는 태종의 병상 앞에서 서로 눈이 맞아 연모하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자기보다 네 살이나 연상인 아버지의 후궁을 사랑한 아들, 그리고 이 후궁의 운명은 장차 어떻게 될까?
이 궁녀가 바로 두 명의 황제(태종(太宗), 고종(高宗))를 섬겼고, 일개 궁녀에서 황후의 지위까지 올랐으며, 두 명의 황제(중종(中宗), 예종(睿宗))를 낳았고, 스스로는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황제가 된 미낭(媚娘)이라는 궁녀로서, 역사에서는 측천무후(則天武后), 혹은 무측천(武則天)이라고 부른다. ‘측천’이란 호칭은 그녀의 아들 중종이 올린 존호 ‘측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와, 그녀가 죽은 후 나라에서 내린 시호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에서 유래한 것이다.
미낭의 성은 무(武), 이름은 조(照)로 병주(幷州, 산서성 문수현(文水縣))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그녀의 출생지에 대해 논란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거론하지 말기로 하자. 미낭의 아버지 무사확(武士彠)은 목재상으로서 많은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당고조(唐高祖) 이연(李淵)을 도운 공으로 후에 공부상서(工部尙書, 건설부 장관)에 올랐으나, 문벌을 중시했던 당시 사회에서는 보잘것없는 가문에 속했다. 당시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순으로 지위를 엄격히 따졌고, 무사확은 가장 하위 계층인 상(商)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미낭은 성장할수록 더욱 아름다워졌다. 그녀의 미모가 빼어나다는 소문은 마침내 궁중에까지 알려져 급기야는 태종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당시 이미 40세가 넘은 태종은 14세밖에 안 된 미낭을 궁중으로 불러들이고 무미낭(武媚娘)이라는 호를 내렸다. 미낭이란 요즘 식으로 하면 이쁜이 아가씨쯤이나 될까? 미낭은 5품 후궁인 재인(才人)에 봉해져 태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세 명의 황제가 나온 이후 무씨 성을 가진 여인의 천하가 된다는 요언이 떠돌아다니자 태종은 미낭을 멀리 하게 되었다.
미낭은 미모와는 달리 성질이 아주 거세었다. 미낭이 궁중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태종이 사자총(獅子驄)이라 불리는 명마 한 마리를 얻었는데, 몹시 사나워 아무도 길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태종이 황후와 비빈 등 궁녀들을 거느리고 말을 구경하는 자리에서 미낭이 이 말을 길들이겠다고 자원하고 나섰다. 사나운 말을 어떻게 길들일 수 있겠냐고 태종이 놀라며 묻자 미낭이 답했다. “저에게 쇠 채찍과 쇠망치, 칼을 주시옵소서. 저 말이 제 말을 듣지 않으면 쇠 채찍으로 몸뚱이를 때리고, 그래도 안 되면 쇠망치로 머리를 쳐 버릴 것입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칼로 목을 따 버리겠습니다.”
649년, 태종이 병사하자 황태자 이치가 태종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는데, 이이가 바로 고종(高宗, 재위 649∼683)이다. 태종의 후궁이었던 26세의 미낭은 머리를 깎고 감업사(感業寺)로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 당시 황제가 사망하면 황제의 후궁들이 갈 길은 세 가지였다. 첫째, 자녀가 있으면 그 자녀를 따라 밖으로 나가 살면서 비교적 안온하게 여생을 보낼 수가 있었다. 둘째, 자녀는 없으나 특기가 있으면 새로운 황제의 밑에서 황제를 도와 특기를 살려 일을 할 수 있었다. 셋째, 자녀도 없고 특기도 없는 경우에는 궁에서 나가 국가에서 지정한 절이나 도량에 들어가 여승이나 여도사가 되어 평생을 보내야 했다. 14세에 태종의 후궁이 된 무미낭은 장장 12년을 허송세월하고 품계도 처음 들어갈 때의 5품 재인인 채로 결국 꿈을 접어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하지만 무미낭은 감업사에 비구니로 있으면서도 결코 꿈을 포기하지 않고, 황제가 된 이치와의 연결 고리를 끊지 않으려고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노력을 기울였다. 고종에게 모든 운명을 걸었던 그녀의 눈물겨운 노력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증거가 바로 그녀가 고종에게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쓴 〈여의낭(如意娘)〉이란 시이다.
붉은색 푸르게 보이고 머릿속이 온통 어지러우며
안색이 초췌하고 온몸이 무너져 내림은 그대를 못 잊기 때문
요즈음 눈물로 지낸다는 것을 믿지 못하신다면
상자를 열어 석류빛 붉은 치마를 살펴보시길
看朱成碧思紛紛
憔悴支離爲憶君
不信比來常下淚
開箱驗取石榴裙
임 생각에 붉은색이 푸르게 보일 정도로 정신이 혼미하고, 임을 못 잊어 매일 눈물을 흘리는 애모의 정이 절절히 드러나는 이 시는 후에 시선(詩仙) 이백(李白)이 읽고 감탄을 금하지 못하며 자신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걸작이라고 칭찬했을 정도로 아름답고 뛰어난 ‘애모의 시’이다. 특히 눈물 범벅이 된 석류빛 붉은 치마가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느라 매일 눈물을 흘리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는 마지막 절은 압권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미낭의 이런 노력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운명의 장난이었는지는 모르겠으되, 비구니가 되어 영원히 꿈을 접을 운명에 처한 것으로만 보였던 미낭에게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고종은 정처 왕씨 외에 소씨(蕭氏)라는 여인을 사랑했다. 고종이 즉위하면서 왕씨는 황후로 책립되었고, 소씨에게는 숙비(淑妃)라는 작위가 내려졌다. 숙비는 황후 다음의 품계로 정1품 후궁이니, 후궁 중에서 최고 품계다. 왕황후와 소숙비 사이에는 고종의 총애를 놓고 암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이제이(以夷制夷)라고 했던가, 고종이 태자 시절부터 무미낭을 연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왕황후는 소숙비에게 기울고 있는 고종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미낭을 끌어들이기로 했다. 하여, 왕황후는 감업사에 있는 미낭에게 즉시 머리를 기르고 환속하여 궁중으로 돌아올 것을 명했다. 늑대를 잡기 위해 호랑이를 끌어들이는 줄도 모른 채 ······.
궁중으로 돌아온 미낭은 거친 성질을 죽이고 얌전하고 상냥하게 행동해 고종과 왕황후의 사랑과 신임을 받아 소의(昭儀) 자리에 올랐다. 소의란 정2품 후궁으로 숙비 다음의 품계에 해당한다. 소의 자리에 오른 미낭, 즉 무소의는 왕황후와 한편이 되어 소숙비를 모함하여 그녀를 유폐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무소의의 야망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이번에는 공격 목표를 왕황후로 돌렸다. 무소의는 자신이 낳은 공주를 질식시킨 후 그 죄를 왕황후에게 뒤집어씌우는 등, 여러 가지 음모를 꾸며 왕황후의 죄를 날조했다.(왕황후가 다녀간 후 딸이 죽어 있었는데, 왕황후는 무소의의 딸을 죽여야 할 이유가 없었다.) 왕황후는 고종의 노여움을 샀으며, 점차 고종의 사랑을 잃게 되었다. 무소의는 이런 식으로 자신이 황후의 자리에 오르는 길목에 놓인 장애물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갔다.
궁중에서는 무소의의 황후 책봉에 대한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원로대신 저수량(褚遂良)과 장손무기(長孫無忌)는 무소의가 명문 출신이 아니며 일찍이 태종의 시녀였다는 사실을 들어 반대를 했고, 우지녕(于志寧)은 침묵을 지켰으며, 이적(李勣)은 병을 칭하고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고종은 중신들의 의견을 묵살할 수가 없었으므로 이 안건을 일단 유보했다. 야망을 가지고 있던 무소의는 심복을 장손무기에게 보내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공작을 폈으나 거절당하고 말았다. 무소의는 포기하지 않고 고종에게 베갯밑송사를 벌여 저수량과 장손무기를 참소했다. 무소의의 이 같은 집요한 작전이 주효하여 저수량은 남방으로 좌천되었다가 병사하였고, 장손무기는 금주로 유배되었다가 모반죄를 뒤집어쓰고 죽임을 당했다. 신하들 가운데 이의부(李義府)와 허경종(許敬宗)과 같은 무리들은 재빨리 상황을 읽고 무소의 측에 붙어, 한 사람은 무소의를 황후로 책립해야 한다는 상주문을 올리고, 또 한 사람은 궁정에서 여론을 환기시키는 작업을 했다. 분위기가 조성되자 고종은 앞선 어전 회의에 칭병하고 참석하지 않았던 원로대신 이적을 불러 그의 의사를 물었다. “이 문제는 폐하의 집안일입니다. 외부 사람에게 하문하실 일이 아닌 줄로 아옵니다.” 이적의 말에 힘을 얻은 고종은 마침내 무소의의 황후 책립을 결심했다.
655년, 무소의가 32세 되던 해, 예복을 입은 무소의, 아니 무황후(武皇后)는 숙의문에서 황후의 인수를 목에 걸고 문무백관들의 하례를 받았다. 황후 책립에 공이 컸던 이의부와 허경종 등은 출세 가도를 달려 마침내 재상의 자리까지 올랐다. 왕황후와 소숙비는 측천무후의 명령에 의해 곤장 100대씩을 맞고 수족이 잘린 채로 술항아리에 던져져 죽임을 당했다. 소숙비는 숙비의 직위를 빼앗겼을 때 증오에 찬 얼굴로 측천무후를 욕하며, 자신은 내세에 고양이로 환생하여 쥐로 환생한 측천무후의 목을 물어뜯어 버리겠다고 고함을 질러 댔다. 그 후 측천무후는 궁에서 고양이 기르는 것을 금했으며, 소숙비의 망령이 붙을까 두려워 장안의 궁보다는 낙양에서 사는 일이 많았다고 하는데, 그녀가 고양이를 싫어했다는 이야기는 사실 여부를 단정하기 어렵다.
황후의 자리에 오른 측천무후는 세력 구축에 열을 올리는 한편, 정치에까지 손을 뻗쳐 마침내 고종과 함께 수렴정치를 하게 되었다. 수렴정치, 즉 수렴청정(垂簾聽政)이란 원래 연소한 태자가 왕위를 이었을 때 모후(태후)가 대신 집정하는 제도인데, 당시 측천무후와 고종의 이런 정치 행태는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어쨌든 날이 갈수록 측천무후의 권력이 강대해졌기 때문에 고종도 그녀의 기세에 눌릴 지경이었다. 하여, 고종은 재상인 상관의(上官儀)와 은밀히 의논하여 측천무후를 폐할 계획을 세웠는데, 그만 사전에 들통이 나고 말았다. 상관의가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었고, 고종은 일체의 책임을 상관의에게 돌림으로써 무서운 아내로부터 겨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다.
측천무후는 후궁 유씨(劉氏)의 소생인 황태자 이충(李忠)을 폐하고, 겨우 5세밖에 안 된 자신이 낳은 이홍(李弘)을 황태자로 세웠다. 이홍은 어질고 효성스러웠지만, 옳은 일에 대해서는 어머니의 신경을 거스르더라도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측천무후는 자신이 낳은 아들이었지만 이홍을 별로 탐탁하게 여기기 않았다. 674년, 측천무후는 지금까지 사용해 오던 황제, 황후의 칭호를 고쳐 천황(天皇), 천후(天后)라 칭했다. 정치는 점차 측천무후의 손으로 넘어가고 고종은 아무런 실권도 없는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말았다. 다음 해에 황태자 이홍은 궁중에 유폐되어 있는, 소숙비의 딸인 의양공주(義陽公主)와 선성공주(宣城公主)를 결혼시켜야 한다고 고종에게 상주했다. 고종은 황태자의 청원을 윤허했는데, 그 후 황태자 이홍이 급사하는 변이 일어났다. 병사했다는 설도 있고 측천무후가 독살했다는 설도 있는데, 이 역시 사실 여부를 단정하기 어렵다. 당시 황태자 이홍은 폐결핵 3기의 중병에 걸려 있었으므로 가만히 놔두어도 죽을 사람이었다. 측천무후가 굳이 정치적 모험을 감행할 이유가 없었다는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이홍이 죽자, 고종의 여섯째 아들인 22세의 이현(李賢)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이현은 무후가 전 황태자 이홍 다음에 낳은 아들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측천무후의 언니 한국부인(韓國夫人)이 미망인이 된 후 궁중에 출입하다 고종과 관계를 가져 낳은 아들로 추정되며, 이로 인해 한국부인이 동생 측천무후에게 살해되었다고 전해진다. 이현은 학식이 풍부하고 성격이 좋아 그의 주변에는 학자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는 이 학자들과 함께 범엽(范曄)이 지은 후한 시대의 역사인 《후한서(後漢書)》의 주석을 달기도 했다. 측천무후는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이 총명하고 용감한 황태자 이현을 경계하여, 모자 사이에 갈등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측천무후는 명숭엄(明崇儼)이라는 방사를 배후에서 조종하여 이현을 헐뜯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명숭엄이 암살되었다. 측천무후는 이현을 혐의자로 지목하고 암암리에 조사를 했는데, 태자부(太子府)의 마구간에서 수백 벌의 갑옷이 발견되었고, 이를 기회로 생각한 측천무후는 태자에게 모반죄를 뒤집어씌워 황태자의 자리에서 쫓아내고 말았다. 당시 무기는 아주 엄하게 관리되고 있어서 무기를 빌리면 반드시 당일에 반납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는데, 실질적으로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 측천무후는 이어 이현을 추종하는 세력들을 말살해 버렸다. 이현은 얼마 후 자살하고 말았다. 그 뒤로 고종의 일곱째 아들 이현(李顯)이 황태자가 되었다.
고종이 측천무후를 사랑하고 그녀에게 꼼짝을 못 했던 이유는 성격과 관계가 깊다. 고종은 효순하고 우애롭고 총명한 반면, 연상의 여인에 의존성이 강한 유약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고종이 사랑했던 여인은 모두 성격이 강하고 고종 대신 결정을 내려 줄 수 있는 여성들이었다. 고종은 훌륭한 가문에서 좋은 교육을 받아 교양이 넘치고 단아했던 황후 왕씨를 좋아하지 않았고, 성격이 강한 소숙비를 좋아했다. 그리고 소숙비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측천무후를 더 좋아했다. 측천무후가 이처럼 고종을 꼼짝 못 하게 만들고 마지막에는 중국의 유일무이한 여황제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다 그만한 배경과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683년, 고종이 죽고 황태자 이현이 그 뒤를 이어 즉위하니, 이이가 중종(中宗, 재위 683∼684, 705∼710)이다. 측천무후는 황태후가 되었다. 당시 고종은 56세, 측천무후는 60세, 이현은 28세였다. 중종의 황후 위씨(韋氏), 즉 위황후는 황후의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시어머니 측천무후를 보면서 권한이 대단한 황후의 자리를 선망했다. 그리고 황후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친정아버지를 문하시중(門下侍中)이라는 요직에 기용하려고 했다. 이제 갓 황후의 자리에 오른 며느리가 친정의 영달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노한 측천무후는 아내를 다스리지 못한 중종을 용서하지 않았다. 중종은 즉위하여 친정에 임한 지 36일 만에 황제에서 폐출되어 여릉왕(廬陵王)에 봉해졌다. 고종의 여덟째 아들 이단(李旦)이 22세의 나이로 그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으니, 이이가 예종(睿宗, 재위 684∼690, 710∼712)이다. 예종 역시 유폐와 다름없는 생활을 했을 뿐, 정치에는 관여하지 못했다.
황제의 자리를 놓고 벌어졌던 측천무후와 그의 남편 고종, 그리고 그의 아들들과의 치열한 싸움은 마침내 측천무후의 승리로 막을 내렸고, 690년, 67세의 측천무후는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측천무후는 나라 이름을 주(周)로 고치고, 동도 낙양을 신도(神都)라 일컫고 주로 그곳에서 정무를 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신성황제(神聖皇帝)라 칭하고, 예종을 황사(皇嗣)로 정하고 성을 무(武)씨로 고쳤다. 측천무후는 690년부터 705년까지 15년 동안 황제의 자리를 지켰는데,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기간은 황후가 된 655년부터 치자면 무려 50년이 되었다.
측천무후는 남편 고종과 그의 아들들, 그리고 당 왕조의 황족들을 누르고 주나라를 세우고 이씨의 당 왕조를 무씨의 천하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무씨 성을 가진 조카들을 재상과 장군으로 기용하고 공이 있는 자들에게 무씨 성을 하사하는 등, 무씨 세력을 확대하여 주변을 튼튼히 만들어 놓은 다음, 친정 조카인 무승사(武承嗣)를 제위 계승자로 세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측천무후의 이 같은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적인걸(狄仁傑) 등 원로 재상들은 무후에게 다음과 같이 진언했다. “조카와 아들, 어느 쪽이 폐하에게 더 효도를 할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폐하께서 친히 낳으신 아들을 황태자로 세우신다면 천년만년 자자손손 이어 가며 제사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카가 백모의 제사를 지낸다는 말을 신 등은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폐하께서 만약 조카를 황태자로 세운다면 선제(고종)의 능묘도 황폐해질 것입니다.” 측천무후는 재상들의 이런 말이 마음에 걸려 좀처럼 조카 무승사를 황태자로 세울 결심이 서지 않았다.
74세의 고령인 측천무후는 이 문제로 고심하느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측천무후는 꿈에 두 날개가 잘린 앵무새 한 마리를 보았다. 그리고 재상 적인걸에게 그 꿈이 무슨 징조인지를 물었다. 적인걸은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다음과 같이 진언했다. “앵무(鸚鵡)의 무(鵡) 자는 무(武) 자와 동일합니다. 따라서 앵무는 폐하를 가리키는 것이고, 두 날개는 두 분의 전하라고 생각됩니다. 만약 폐하께서 두 분의 전하를 기용하신다면 두 날개가 힘차게 펼쳐질 것입니다.” 측천무후는 무승사를 황태자로 세울 생각을 단념하고, 자신이 낳은 셋째 아들 여릉왕 이현(중종)을 다시 황태자로 책봉했다. 황사인 넷째 아들 이단(예종)도 형 이현을 황태자로 세우는 데 동의했다. 측천무후가 조카를 황태자로 세울 생각을 단념한 주된 이유는 조카들이 황제가 될 그릇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 번 폐출되었던 이현을 황태자로 세운 주된 이유는 황사인 이단은 오랜 기간 중앙에 있으면서 나름대로 그를 지지하는 조직을 형성했지만, 이현은 중앙 무대를 떠난 지 오래되어 중앙에 조직이 없었기 때문이다.
705년, 무려 반세기에 걸쳐 군림했던 여걸 측천무후도 나이가 들어 병상에 눕게 되자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었다. 적인걸의 추천으로 측천무후에게 발탁되어 재상이 된 당시 80세의 고령 장간지(張柬之)가 친위군 사령관과 공모하여 친위군 500명을 동원하여 내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궁중에 진입했다. 이 사건을 신룡정변(神龍政變)이라고 하는데, 당시 측천무후의 남총(男寵)으로서 권력을 휘두르고 이현의 황위 계승에 위협이 되었던 장창종(張昌宗), 장이지(張易之) 형제를 제거하는 것이 이 정변의 주요 목적이었다. 장씨 형제를 제거함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장간지 등은 와병 중인 측천무후를 협박하여 제위를 황태자에게 양위하게 하고, 그녀를 상양궁(上陽宮)으로 옮겼다.
측천무후는 순순히 그의 말에 따랐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세웠던 주 왕조를 폐하고 당(唐) 왕조를 회복시킬 것을 지시했고, 자신은 황제가 아닌 고종의 황후로 남겠다는 것을 천명했다. 말하자면 자기가 흩뜨린 모든 국면을 원상복귀시킨 것이다. 아마 애매한 찬탈자의 오명을 뒤집어쓰느니 차라리 남편의 황후이자 아들의 모후로 남는 것이 자신의 무덤에 영원히 향화(香火)가 끊기지 않게 하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으리라. 그해 겨울, 측천무후는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나라에서는 그녀의 소망에 따라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라는 시호를 내렸다. 같은 해, 중종 이현이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측천무후가 세웠던 주의 국호를 폐하고, 당의 국호를 회복시켰다.
중종은 아버지 고종이 죽자 제위에 올랐지만, 중종의 부인 위황후가 친정아버지를 요직에 기용하려다가 측천무후의 노여움을 산 까닭으로 친정에 임한 지 36일 만에 쫓겨나 여릉왕으로 좌천되어 방주(房州, 호북성(湖北省) 죽산현(竹山縣)) 등지에 있다가 3년 만에 낙양으로 돌아와 황태자가 되었으며, 그로부터 8년 후에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물론 그의 부인 위씨도 황후로 복위되었다. 중종은 방주에 있을 때, 언젠가는 측천무후의 손에 죽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두려운 나머지 여러 차례 자살을 기도했다. 그때마다 부인 위씨가 그를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며 생각을 바꾸게 해 주었다. 중종은 위씨를 끔찍이 사랑하여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을 했다. “내가 후에 다행히 유폐 생활에서 해방되어 하늘을 우러러보게 된다면 그대가 하고자 하는 일을 절대 방해하지 않으리다.” 중종이 복위하자 위황후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정사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측천무후가 고종을 대신하여 정무를 보았던 것과 똑같은 행태였다.
중종의 딸 안락공주(安樂公主)는 측천무후의 일족인 무삼사(武三思)의 아들과 결혼했는데, 무삼사는 안락공주의 시아버지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자주 궁중에 출입하다가 위황후과 불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중종은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무삼사를 신임하여 정치 문제까지 의논하였다. 위황후는 자신의 집권에 방해가 되는 인물을 제거하기 위해 무삼사와 공모하고 중종에게 장간지 등을 참소했다. 중종은 참소를 믿고 장간지 등 원로대신들에게 각각 왕호를 주어 정치에서 손을 떼게 하고, 얼마 후 지방으로 좌천시켰다가 모두 죽여 버렸다. 그런데 연흠융(燕欽融)이라는 사람이 위황후의 음행을 중종에게 알렸다가 위황후의 일당에게 죽임을 당한 일이 생긴 후부터 중종은 위황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위황후와 그녀의 총애를 받고 있는 일당들은 일이 발각될까 전전긍긍하다가 마침내 중종 시해 음모를 꾸몄다.
위황후는 제2의 측천무후를 꿈꾸고 있었다. 측천무후는 황후에서 황태후가 되고 다시 여황제가 되었는데, 지금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위황후의 머릿속에는 남편 중종을 죽인 다음 황태후가 되고, 그다음엔 여황제가 된다는 청사진이 그려지고 있었다. 위황후의 일당은 710년 6월 고기만두 속에 독을 넣어 중종을 시해한 후, 중종의 유조를 빙자하여 넷째 아들 온왕(溫王) 이중무(李重茂)를 황제로 세웠다. 그리고 위황후 자신은 황태후가 되어 섭정을 시작했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 놀라운 것은 중종 시해 사건에 그의 친딸 안락공주도 가담했다는 사실이다. 안락공주도 그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 바로 어머니 위황후가 황제가 되면 자신은 후계자인 황태녀(皇太女)가 되어 제3의 측천무후가 되겠다는 것이 그녀의 복안이었던 것이다.
위황후와 그 일당들은 위씨의 왕조를 세울 경우 가장 방해가 되는 인물로 예종 이단과 측천무후의 막내딸 태평공주를 지목했다. 태평공주는 성격이 침착하면서도 민첩하고 권모와 지략이 뛰어난 여자로, 측천무후가 살아 있을 때 항상 자기를 닮았다고 칭찬한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위황후 일당은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위황후 일당과 평소 가까이 지내던 병부시랑(兵部侍郞, 국방 차관) 최일용(崔日用)이 이런 움직임을 이융기(李隆基)에게 전했다.
당시 25세의 이융기는 예종의 셋째 아들로, 일찍부터 위씨 일족의 전횡에 분노를 느끼고 있었으며, 위씨 일족의 타도를 위해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이융기는 거사를 서둘렀다. 이융기의 명을 받은 쿠데타군의 중심인물 갈복순(葛福順)이 선두에 서서 친위군 군영에 돌입하여 위씨 일족 장군들의 목을 베었다. 급보를 전해 들은 위황후는 비기궁(飛騎宮)으로 도망했으나, 그곳 병사들에게 목이 잘리고 말았다. 안락공주는 이런 사실도 모르고 경대 앞에 느긋하게 앉아 눈썹을 그리다가 참수되었다. 위씨 일족이 멸망당하자 갓 즉위한 이중무는 예종 이단에게 황위를 내주었다. 이중무는 역대 황제의 명단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쿠데타를 성공시킨 이융기는 평왕에 봉해졌다가 이어 황태자로 책립되었다.
예종이 복위하는 데는 누이 태평공주의 힘이 컸는데, 그녀는 원래 권모와 지략이 뛰어난 데다가, 이번 쿠데타에 그의 아들을 참여시키는 등 공로가 많아 자연 권력의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였다. 그리하여 점잖은 인물이었지만 별로 유능하지는 못한 예종 밑에 태평공주와 황태자 이융기라는 두 실세가 존재함으로써 궁정의 세력은 점차 두 파로 갈려 치열한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예종은 고심하던 끝에 황태자에게 양위하여 두 파의 싸움을 종식시키려고 했다. 712년, 28세의 황태자 이융기가 즉위하였는데, 이이가 바로 당나라 시대의 황금기를 이룬 현종(玄宗, 재위 712∼756)이다. 예종은 상황(上皇)이 되어 뒷전으로 물러났다.
현종이 즉위하여 표면상으로는 실권을 잡은 듯했으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국정을 좌우하는 중신 7명 중에 5명이 태평공주파의 인물이었다. 태평공주는 이런 인맥을 배경으로 한 데다, 상황의 명령을 빙자하여 중신들의 임면권을 행사할 정도로 실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계속되면 현종은 허수아비로 전락할 뿐만 아니라 제위를 지키는 것마저 불안해질 것이 분명했다. 태평공주는 이런 유리한 상황을 이용하여 현종 암살 음모를 꾸미기에 이르렀다. 현종과 그의 추종자들은 태평공주 타도를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개원(開元) 원년인 713년 7월, 현종은 태평공주파를 급습하여 순식간에 일당을 타도했다. 태평공주는 어느 절로 도망했다가 3일 후에 돌아와 그녀의 집에서 죽임을 당했다. 태평공주가 죽음으로써 반세기에 걸친 여인 천하가 무너지고, 정권은 완전히 현종의 손으로 넘어왔다.
현종의 치세는 요숭(姚崇)·송경(宋璟)·장열(張說)·장구령(張九齡) 등 명상의 도움을 얻어 이루어졌다. 안으로는 민생 안정을 꾀하고 조운(漕運) 개량과 둔전(屯田) 개발 등으로 경제를 충실히 하였으며, 부병제(府兵制)의 붕괴에 대처하여 신병제를 정비하였다. 밖으로는 동돌궐(東突厥)·토번(吐蕃)·거란(契丹) 등의 국경 지대 방비를 튼튼히 하여, 개원(開元)·천보(天寶) 시대 수십 년의 태평천하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노년에 접어들자 정치를 등한히 하고, 35세나 연하인 며느리 양귀비(楊貴妃)를 궁내로 끌어들인 뒤 정사를 포기하다시피 하고 권신 이임보(李林甫)에게 국정을 일임하였다. 순식간에 정치는 부패했으며 사회 제도가 무너져 혼란이 야기되었다. 755년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국가는 혼란에 빠졌으며, 양귀비는 친위군들에게 살해되었다. 현종은 이듬해 아들 숙종(肅宗)에게 양위하고 상황이 되어 은거하였으며, 장안으로 돌아온 뒤 죽었다.
글:김성일(金聖日)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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