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 붉게 피던 집 > 송시우/ 시공사/2014
중고등학생 시절 한동안 추리소설에 푹 빠져 지냈다. 셜록 홈즈는 초등학생 때 이미 뗐고(뗐다고 착각했고^^) 그 무렵엔 아가다 크리스티, 앨러리 퀸 등에 빠져서 거의 모든 미스터리를 섭력해댔던 기억이 있다. 우리나라 추리소설은 눈에 띄는 게 없었다. 있어도 아주 시시하고 심하게는 ‘허접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엄청 인기를 끌고 있는 일본추리소설도 들어오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밀가루님 덕분에 최근에 <라일락 붉게 피던 집>을 읽게 됐다. 바로 그 전날까지 ‘우리나라 추리소설은 재미없잖아요’라고 외쳤는데 이 책을 읽으며 얼굴이 확 붉어졌다. 왜냐고? 너무도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내가 추리소설을 한참 읽던 시절은 이미 몇 십 년 전이지 않은가. 그 이후로 우리나라 추리문학이 얼마나 발전해왔는지 전혀 관심도 안 가져놓고선 그저 옛날옛적의 경험만을 가지고 ‘시시해’라는 말을 함부로 남발하고 있었다니...... 이게 바로 ‘꼰대짓’이 아니고 무언가. 등허리에 식은땀이 흐른다. 남의 꼰대짓만 비웃었지 나도 모르는 새 내가 꼰대짓하고 있을 줄이야......
고령화시대를 본격적으로 맞이하고 있는 우리나라다. 별 일(?) 없으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 역시 언제까지 더 계속 살지 모르는데 이런 어이없는 꼰대짓을 얼마나 또 하게 될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너무(?) 오래 살아서 나오는 버릇, 몇 십 년 전 경험과 바로 얼마 전 경험을 마구 혼합해 ‘내가 경험해봐서 아는데’류의 꼰대짓, 그런 거 말이다. 최소한 그런 위험에 대한 자각이라도 하고 살아야지. 그래야 이처럼 오래된 편견을 맞다고 철썩 같이 믿고 남들에게까지 우기면서 살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내겐 <라일락....> 이 무척 반가운 책이다. 밀가루님, 감사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라일락....> 이 책은 재미있다. 일본추리소설의 대가인 미미여사(미야베 이유키)니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이 더 세련된 트릭과 이야기구조를 보이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런데도 <라일락.....> 이 책이 그 일본추리물보다 더 재미있고 실감나게 느껴진 이유는 이 소설의 배경이 우리나라이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1980년대 은평구 D동이 이 소설의 무대다. 송시우라는 작가는 이 시대를 리얼하게 잘 살려냈다.
난 이 소설의 배경보다 이른 70년대에 은평구 D동(그 D동이 이 D동인지는 모르겠지만^^)을 살았고 당시에도 담장 밖으로 들장미 넝쿨과 라일락 향기를 골목에 퍼뜨리는 집들이 많았다. 6월이면 이집 저집에서 풍겨오던 진한 라일락 향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굳이 은평구 D동이 아니어도 비슷한 동네는 전국 곳곳에 있었다. 70년대, 80년대엔 많이들 그러고 살았으니 말이다. 조금 낫거나 조금 낮은 경제상황이었어도 거기서 거기였을 거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라일락 향기 가득한 어느 집은 어느 동네나 있던 시절이다.
이 책을 읽으며 정신을 차리고서(!) 주변을 돌아보니 우리나라 추리소설이 보인다. 이미 상당한 팬을 확보하고 있는 정유정 작가를 비롯하여 많다!!! 심심하거나 시시하지 않은 우리나라 추리소설, 내가 잠깐(?) 관심을 놓은 새 이렇게 컸구나. 와, 난 다시 추리소설에 빠져들고 싶다. 그런 나이가 됐나보다. 다시 한 번 청소년기 말이다!
한 말씀 더.
이 책은 추리소설에 거부감 갖고 있는 이들이라 하더라도 비교적 무리 없이 읽을 만한 소설이다. 분명 심각한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별로 잔인한 장면도 없고 꽤 낭만적이라고나 할까, 암튼 라일락 향기를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방패연님 글 읽으면서 항상 느끼는거지만 생각보다 참 아기자기하신 분이란 생각이 들어요~^^
라일락 향기 느껴보겠습니다~
정말 재미있군요.
달리는 조사관도 읽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