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437) 단순하고 엉뚱한 상상력으로 놀아라 - ② 소를 들어올린 꽃/ 시인, 우석대 문창과 안도현
단순하고 엉뚱한 상상력으로 놀아라
네이버블로그 http://blog.naver.com/sansolip2/ 미당 서정주 - 내 늙은 아내
② 소를 들어올린 꽃
내 늙은 아내는
아침저녁으로
내 담배 재떨이를 부시어다가 주는데,
내가
「야 이건
양귀비 얼굴보다도 곱네.
양귀비 얼굴엔 분때라도 묻었을 텐데?」
하면,
꼭 대여섯 살 먹은 계집애처럼
좋아라고 소리쳐 웃는다.
그래 나는
천국이나 극락에 가더라도
그녀와 함께 가 볼 생각이다.
―서정주, 「내 늙은 아내」 전문
미당이 작고하기 두 해 전, 『현대문학』 1998년 1월호에 발표한 시 「내 늙은 아내」다.
그 한 해 전에 나온 시집 『80소년 떠돌이의 시』(시와시학사)도 그렇지만 말년에 미당은
여든을 훨씬 넘은 나이에 놀랍게도 소년의 목소리를 얻었다.
어른은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세상사에 대해 이것저것 따지고 분석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소년은 단순하게 세상을 읽으려고 한다.
삶의 갈등과 고뇌에 물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당의 시에 나타나는 이 단순성은 이 세상을 한 바퀴 휘휘 돌아본 뒤에 마침내
다다른 시선(詩仙)의 경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문학과 인생의 산전수전 끝에 미당은 천진성이라는 새로운 문학적 눈을 갖게 된 것이다.
내 아내는 여기 등장하는 ‘늙은 아내’와 달리 내 담배 재떨이를 아침저녁으로 비워본 적이 별로 없었다.
집에서 내 재떨이는 담배꽁초만 아니라 아이들이 버린 휴지 조각, 방바닥에서 집어낸
머리카락, 손톱 따위들을 담는 쓰레기통쯤으로 취급되어 왔었다.
나는 이 시를 아내에게 보여주었다.
아내는 시를 보고 뭔가 찔리는 게 있었던 모양이다.
그 다음 날부터는 정말 내 재떨이도 확연히 달라졌다.
아침저녁으로 담뱃재 하나 묻어 있지 않은 재떨이를 보면서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야 이건 양귀비 얼굴보다도 곱네. 양귀비 얼굴엔 분때라도 묻었을 텐데?”
담배 재떨이는 대체로 둥글다.
그 둥근 모양과 부부 관계가 알맞게 버물어진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보름달을 떠올린다.
모자라는 것도, 더 채워야 할 것도 없는 보름달의 원형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 닿아야 할 사랑의 종착지를 상징한다.
아 내곁에 누어있는 여자여.
네 손톱 속에 떠오르는 초생달에
내 戀人의 꿈은 또 한 번 비친다.
―「눈 오시는 날」(『미당시전집 1』, 민음사, 1994, 197쪽) 부분
그동안 미당의 시에 숱하게 등장하던 초생달의 이미지는 이 시에 이르러 비로소
환한 보름달로 가득 차올랐다.
미당은 자연스럽게 보름달의 세계를 갖게 되었다. 단순함의 힘이다.
햇살 가득한 대낮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난
나의 문자
“응”
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 있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문정희, 「“응”」(『나는 문이다』, 뿔, 2007, 72~73쪽) 부분
유쾌한 말장난이다.
우리말 ‘응’은 상대의 질문에 대해 무엇이든 긍정하는 언어다.
시인은 자신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응’이라는 글자를 쳐놓고 오래 들여다봤던 모양이다.
이 글자의 형상이 마치 위아래로 해와 달이 떠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시를 시작하자마자 거두절미하고 대낮에 ‘하고 싶어?’라는 문자가 왔다고
대담하게(?) 밝히는 건 무슨 뜻일까?
이것 역시 독자를 시 앞으로 잡아당겨 두려는 시인의 노련한 유인술이다.
들어보나마나 외설은 아닐 것이다(하지만 독자인 우리는 시인에게 넘어가줄 준비가 되어 있다).
비누는 가늘게 내리는 가랑비 가랑비 내리던 아침 그대와 길을 떠났지 비누를 가방에 넣고 떠났던가? 오늘도 가랑비 온다 가늘게 내리는 가랑비 밤이면 하얀 눈발 어둠 속에 비누가 반짝인다 비누는 마루에 있고 거실에 있고 화장실 거울 앞에 있지만 비누는 과연 어디 있는가? 비누는 씨앗도 아니고 열매도 아니다 아마 추운 밤 깊은 산 속에 앉아 있으리라
―이승훈, 「비누」 전문
이 시에서 비누의 상징이나 비유를 찾으려고 끙끙댄다든지 말과 말 사이의
연관을 짚어보기 위해 분석을 시도하는 일은 부질없다.
시인은 ‘나’라는 자아도 없고 대상도 없고 언어만 남는, 그러나 언어마저도 버려야 한다고 한 산문에서 말한다.
기존의 언어체계에 구멍을 뚫는 일이 시쓰기의 본질이라고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언어에는 무슨 본질, 깊이, 심오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언어는 오직 교통을 위해 잠시 빌려 쓰는 도구”일
뿐이기 때문에 언어를 버림으로써 자유로운 정신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주 들판에서
정말 소가 웃더라니까
꽃이 소를 웃긴 것이지
풀을 뜯는
소의 발밑에서
마침 꽃이 핀 거야
소는 간지러웠던 것이지
그것만이 아니라
피는 꽃이 소를 살짝 들어 올린 거야
그래서,
소가 꽃 위에 잠깐 뜬 셈이지
하마터면,
소가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한 것이지
윤희상의 「소를 웃긴 꽃」
(『소를 웃긴 꽃』, 문학동네, 2007, 36쪽)이다.
근래 이 시를 읽고 한참 동안 행복했다.
특정한 개념과 틀에 갇히지 않은 상상력이 이런 유쾌한 시를 생산했다.
엉뚱함의 힘이다.
꽃이 소를 웃겼다고, 소의 발바닥을 간질였다고,
연약한 꽃이 육중한 소를 살짝 들어 올렸다고 한다.
정말 소가 웃을 일이다.
세상에 시인이 아니면 누가 이런 엉뚱한 발언을 하랴.
<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안도현이 시작법(안도현, 한겨레출판, 2020)’에서 옮겨 적음. (2023. 4.10.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437) 단순하고 엉뚱한 상상력으로 놀아라 - ② 소를 들어올린 꽃/ 시인, 우석대 문창과 안도현|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