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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잔에 기름은 충분한가?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25장)
소묵시록(24장)과 세 개의 비유 (25장)
‘소묵시록’이라고도 불리는 마태복음 24장은 ‘세상의 종말과 심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세상의 종말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봅니다. 예나 지금이나, 종말을 얘기할 때면 “언제?”라는 시기가 관심거리입니다. 임박한 종말을 예상하던 초기 교회가 ‘주님이 오실 시기’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던 정황은 24장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한다”라고 단언하셨고, 도리어 관심사를 바꿀 것을 주문하십니다. 즉, “언제 주님이 오시는가?”가 아니라,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이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주목하라는 얘기입니다. 이 취지가 25장에 있는 세 개의 비유(열 처녀의 비유, 달란트 비유, 최후의 심판 비유)에서 전개됩니다. 수난 서사(26장부터) 직전에 놓인 이 비유들은 예수의 마지막 행적이자 가르침입니다. 교회력 한 해의 끝 무렵을 맞는 교회는, 첫 번째인 ‘열 처녀 비유’와 두 번째 비유인 ‘달란트 비유’를 읽어가면서 일 년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열 처녀 중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롭다 (2절)
천국은 신랑을 등을 들고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1절). 처녀(virgin)로 번역되는 “파르테노스(parthenos)”는 사춘기를 넘긴 나이의, 아직 결혼하지 않은 여인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신부가 아니라, 신부의 집으로 오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집 밖이나 마을 어귀에서 기다리는 “들러리”라고 보는 것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 이 열 처녀 중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로웠다고 알려집니다.
미련함(moros, 어리석음)과 슬기로움(pronimos, 지혜로움)에 관해 언급하는 마태복음의 구절들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사람 같다 …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사람 같다”(7:24-27). 주님의 말씀을 들음에서는 차이가 없으나, 행함과 행하지 않음에서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이 판가름됩니다. 24장에서는 “충성되고 지혜 있는종”이 언급되는데, 그는 ‘주인의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46절)로 묘사됩니다. 여기에서도 종의 지혜로움은 그 행동과 연관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겠는가”(마5:13)는 산상수훈의 말씀에서, ‘맛을 잃다(moraino)’는 동사는 ‘어리석다(moros)’는 형용사와 연결된 낱말로서 ‘어리석게 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소금의 은유는, 빛의 은유(5:14)와 더불어,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5:15)는 말씀으로 귀결됩니다. 결국, 여기에서도 어리석음(맛을 잃음)은 행실과 결부됩니다. 이 비유에서도, 다섯 처녀의 슬기로움은 등과 기름을 함께 가졌고, 다섯 처녀의 어리석음은 등은 가졌지만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는 행동으로 가름됩니다.
등의 기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어리석음과 슬기로움을 가름하는 기준이 “행함”에 있다는 마태복음의 여러 구절을 배경으로, 어리석은 처녀들과 슬기로운 처녀들을 나누는 ‘등의 기름’을 “행함”이라고 보는 이해가 있습니다.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둔다”(5:15)는 말씀에서, 등불이 “착한 행실”(5:16)로 귀착된다는 점도 이런 주장에 힘을 보탭니다. 이 외에도 ‘기름’은 과연 무엇을 뜻하느냐를 두고 여러 주장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기름을 믿음이라고 보기도 하고(마틴 루터), ‘성령’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다”(시119:105)는 구절에 기대어, 주님의 말씀을 기름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으로도 ‘기름’을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이 비유에서, 기름은 닳아서 없어지는 것이고, 스스로 사서 보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착한 행실이나 믿음이 기름처럼 닳아 부족해지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믿음은 주님이 주시는 것이지 어디에선가 사 올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또한, 착한 행실을 기름처럼 보충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견해도 온당해 보이진 않습니다.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등잔이나 등불이 보이는 것이라면, 기름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름은 등불이 켜져 있음을 가능하게 하는 힘, 혹은 에너지입니다. 그런 점에서, 착한 행실이 보이는 것으로서 등불이라고 한다면(이 가정은 상당한 타당성을 지닙니다), 기름은 착한 행실을 하게 하는 원천 혹은 바탕입니다. 외부로 드러나는 모습이나 행동 이면에 있는 내적 관계나 동기, 마음의 상태 등이라고 하겠습니다.
신랑을 기다리고 있음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등이라면, 기름이란 바로 신랑과의 관계를 충만하게 하는 친밀함, 교통, 사귐, 사랑 등을 말하는 것 아닐까요? 기름이 없어져 부족해질 수 있듯이, 언제든 관계는 소원해질 수 있고, 또한 회복될 수도 있습니다. 기름이 있어야 등불이 켜지듯이, 주님과의 신실한 관계를 맺는 사람은 그에 따른 빛 된 행동(선한 행동, 진실한 순종)을 할 수 있습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잤다 (5절)
문제는 신랑이 더디 오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신랑이 늦게 오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초기 교회도 하늘에 오르신 예수께서 속히 돌아오실 것이라고 믿었고, 한 세대를 넘기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던 그리스도인들도 많았습니다. 신랑(예수)의 오심은 오늘까지 지연되었고, 이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희망을 무디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 되어왔습니다.
신랑이 더디 오는 형국에서, 기다리던 모든 사람이 졸며 잡니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13절의 말씀 때문에, 성급한 독자들은 어리석은 처녀들은 잠이 들었고 슬기로운 처녀들은 깨어 있었다고 억측합니다. 그러나 모두는 잠들었고(5절) 신랑이 왔다는 소리가 들릴 때 다 일어났다(6-7절)고, 비유는 명시합니다. 그러니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명령은 잠이 들었거나 잠들지 않은 상태와는 다른 의미를 표방합니다.
기름은 나눌 수 없다 (9절)
신랑이 온다는 소리에 깨어난 여인들은 등을 준비합니다(7절). 열 처녀 모두 등을 가지고 있지만, 그중 다섯 처녀에게는 기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름을 나눠달라고 동료에게 부탁하는데, 놀랍게도, ‘그럴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옵니다. ‘기름을 나누면 부족해진다’(9절)는 거절의 이유를, ‘우리에게 있는 기름도 많지 않다’는 뜻으로 읽어야 할까요? 보기에 따라서는, 기름을 가진 처녀들이 이기적이고 매몰차다고도 판단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생각해 보면, 불붙은 초가 다른 초에 자신의 불꽃을 나누어 줄 수는 있지만, 초 그 자체를 나누어 줄 순 없습니다. 촛불이든 등불이든 자신에게 있는 기름(파라핀)만으로 타올라야 합니다. 열매를 나눌 수는 있지만, 열매를 맺는 나무는 나눌 수 없습니다. 사랑의 행동은 나눌수록 좋지만, 그 행동의 에너지인 사랑 자체는 나눌 수 없습니다. 불꽃을 나누어 줄 수는 있지만, 기름은 남과 나누어선 안 되는 무엇입니다. 사랑의 행동은 남과 나눌 수 있지만, 그 행위를 있게 하는 사랑 자체는 나눌 수 없음과 같습니다. 기름으로 피워낸 불은 나누어져 타인에게 건네질 수 있지만, 기름 자체는 나누어선 안 됩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는(쪼개어지지 않은) 사랑이 요구되는 것처럼(마22:37), 나누어지지 않은 기름으로라야 사랑의 불을 밝힐 수 있습니다. 속옷을 달라는 자에게 겉옷을 주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명령이고, 우리는 재물이나 지식이나 능력과 힘 등을 이웃과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누군가와 나눌 수는 없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남과 공유해서는 안 됩니다.
진실로,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12절)
눈에 띄는 대목이 있습니다. 뒤늦게 기름을 사 온 처녀들이 닫힌 문을 두드리면서 “주님, 주님!” 하고 부르는데, 주님(신랑)은 그 여인들에게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이와 비슷한 장면이 마태복음 7장에 있지요. 마지막 날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 주님!”하고 부르면서, 자신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기적을 행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에게 “나는 도무지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매정하게 말씀하십니다(7:21-23). 내가 주님을 알고 주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한다는 것과 그런 나를 주님이 아신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얘기입니다.
이 비유가 말하려는 바는, 내가 주님을 안다는 사실이 소용없다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건, 주님이 나를 아시는가 하는 점입니다. 어떤 이들은 당연히 주님이 나를 아신다고 자신하지만, 그 확신은 빗나가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성서가 말하는 ‘앎’은 친밀하고 신실한 개인적 관계 속에서만 생겨나고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남과 주고받을 것이 아닙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은 자신들이 신랑과 아는 관계이고, 특별한 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모두 신랑과의 외적 친분을 표시하는 등잔을 들고 있습니다. 그 등잔은, 그 여인들이 신랑을 향한 소명의 자리로 부름 받았음을 증명해 줍니다. 따라서 신랑은 누구보다도 이 여인들을 안다고 말해야 할 텐데 실상은 다릅니다. 기름이 없는 등잔을 가지고 있었던 여인들을 향하여, 주님은 그들을 모른다고 잘라 말합니다.
깨어 있어라 (13절)
불이 켜진 등잔 속에 기름이 얼마나 있는지는 겉으로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등잔을 든 사람 자신만이 알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여인들은 신랑이 언제 오는가를 예측하는 데에 마음을 씁니다. 그들은 신랑이 당도할 시간을 가늠하고 그 예상에 따라 기름을 채우려 하지만, 시간을 헤아리는 이들의 기름은 언제나 부족합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는지의 예측은 반드시 빗나가기 때문입니다.
관건은 기름인데, 친밀과 사랑의 관계는 단번에 구축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슬기로운 여인들은, 신랑이 오실 시간을 가늠하기보다는, 자신이 들고 있는 등잔 속에 기름을 살피고 준비하는 데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이것이 ‘깨어 있음’입니다. 비유는 독자들에게 묻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그대는 기름이 충분한가?” 깨어 있다는 건, 신랑이 언제 올지 노심초사 뜬눈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등잔 속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준비하는 일입니다. 기름이 충분한 사람은 오늘의 잠을 평안히 잘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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