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언 제 : '17.03.06(월)
0 어디서 : 전남 순천시
0 가본곳 : 낙안읍성, 금전산 금둔사, 천자암 쌍향수, 돌탑공원
0 날 씨 : 흐리고 쌀쌀함
순천시 낙안면 충민길 30번지에 위치한 "낙안읍성"은 과거와 현재가 만날 수 있고 미래를 상상과 짐작을 할 수 있는 상생의 공간이 아닌가 생각되어지는 곳이기도 하며 역사와 민속 그리고 생태가 어우러진 낙안읍성은 현대인의 삶의 보금자리 이기도 합니다.
순천 낙안읍성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지방계획도시로 대한민국 3대 읍성 중 하나로 사적 제30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연간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주요 관광지로 현재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 등재 및 CNN선정 대한민국 대표 관광지16위로 선정되어 현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읍성입니다.
연혁면에서 보면 고려 태조 23년(940년) 낙안국(양악)으로 개칭/ 조선 태조 6년(1397년) 낙안태생 김빈길 장군이 토성 축조 / 조선 세종 6년(1424년)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 / 조선 인조 4~6년(1626~1628년) 임경업장군이 석성 중수 / 1983년 6월 14일 사적 제 302호로 지정 / 2011년 3월29일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어릴적 시골에서 농부들이 쓰시던 짚으로 쳐서 주머니처럼 만들어 곡식을 담는 용기의 하나인 가마니의 사용 용도는 공판(벼 수매)을 할 때 이렇게 가마니에 벼를 넣고 볏짚으로 꼬아서 만든 새끼줄을이용하여 이중으로 넣고 튼튼하게 매듭을지여 정부 양곡창고에 줄 지어 세어놓으면 공판원(수매원)이 돌아가면서 벼를 확인하고 등급을 매겨 벼의 가격을 결정하는데 이때까지 농부들은 덕석(멍석)에 잘 말리고 풍로 바람으로 잘날려서 한등급이라도 높게 받으려는 노력은 말할 수 없이 힘들었던 추억을 회상해봅니다.
벼를 말리는 덕석(멍석)과 물짐을 나르는 물지게 그리고 곡식을 나르는 대발 소쿠리등을 창고 담벽에 걸어두고 비를 맞지 않도록 하는 시골 전형적인 농부의 가옥이 이상적으로 보여집니다.
이것은 초가지붕이나 담장위에 올려 비기 세지않도록 올리는 용마람(이엉)이라 하는데 어릴적 생각을 추억해내어 한 번 엮어보았는데 쉽지않네요
"말과 되" 는 물건을 재는 도구의 하나이며 지금은 저울을 이용해 몇킬로그램인지 재지만 예전에는 이것으로 물건은 재서 거래를 했던 기억이 남으며 그리고 바가지등으로 양곡을 담고 측정하기위한 현재 저울같이 사용하는 물품으로 옛날에는 많이 사용했던 용기중의 하나로 기억이 새롭습니다.
낙안읍성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은행나무는 높이가 28미터 줄기가 10미터에 이르는 거목으로 낙안읍성 전체로 보아 이 은행나무는 배의 돛대에 해당하는 중요한 나무라고 이야기 합니다.
따스한 봄날 유채밭 풀메기를위해 동네 아주머니들께서 품앗이로 일손을 보태고 있는 모습입니다. 조금더 풀이 자라면 유채밭 풀을 뽑기가 어려워 어릴적에 풀을 뽑기 쉽기에 그러는듯 보여집니다.
천년고찰 "금전산 금둔사"는 순천시 낙안면 조정래길 1000에 위치하며 금둔사는 해발 679m의 금전산 서쪽에 위치한 금둔사는 신동국여지승람(新東國與地勝覽) 낙안조(樂安條)의 기록과 보물 제946호인 금둔사지석불비상과 제 945호인 금둔사지 삼층석탑으로 보아 금둔사의 창건연대를 통일신라때로 추정해오다 최근 발굴유물을 토대로 금둔사는 9세기경 창건된 사찰이라고 전해집니다.
금전산 자락에 위치한 금둔사는 금(金)은 부처님이고 둔(屯)은 싹이 돋는다는 뜻으로 일체 중생은 각기 불성을 갖추어 있기에 스스로 조건만 맞추어 주면 누구나 부처님이 된다는 의미가 있으며 창건은 백제 위덕왕 30년 (서기 583) 담혜(曇惠)화상이 일본에 처음으로 승려 10명을 양성해준 뒤 귀국하여 처음 창건하였다고 전해집니다.
보물 945호인 금둔사 삼층석탑 입니다. 금둔사지삼층석탑은 낙안면 소재지에서 북으로 약 2㎞ 떨어진 금전산(金錢山) 서록폐사지내 (西麓廢寺址內)에 위치하고 석탑의 후편(동편)에는 석불입상(石佛立像)이 있으며 이들은 서로 연관된 의미를 지니고 있는것으로 보입니다. (같은 시대로 추정)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금전산에 금둔사가 있다.」고 하여 이곳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석탑의 전면(全面)(서편(西便))으로는 배례석(拜禮石)이 있는데 각면에는 2추(樞)씩의 안상(眼像)이 조각도괴되어 있던 것을 1979년 7월 10일 복원하였다고 하며.
금둔사지 석불비상은 보물 제946호로 지정 되어있으며 통일신라시대 삼층석탑(9세기)과 나란히 서있는 석돌입상은 비석과 같은 형식을 한 특이한 불상으로 긴 베모꽃의 돌에 돌을 새김으로 불입상을 새겼고 석불머리위에는 석탑에서 볼수 있는 지붕돌을 얻어 놓아고 밭침 또한, 부도에서 볼 수 있는 연꽃무늬를 둥근 모양의 돌에 위아래로 새겨 놓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긴 보성 대원사에있는 모태아를 보는 것처럼 이곳 석불상을 보면서 마음 한켠으로 어찌나 짠하든지 두 손으로 합장만 하고 발길을 돌려봅니다. 누구나 삶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데 삶의 꽃을 피우고 싶어도 삶의 꽃을 피우지 못해 모태의 자궁속에 움쿠리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며 생과사를 통한 삶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됩니다.
금둔사 뒷편에 있는 석불이 두손을 가슴에 얹고 아름다운 미소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미소를 바라보며 사람들도 부처의 미소처럼 미소가 피어났으면 하는 바램을 갖어봅니다. 없으면서도 남을 도우려하고 자기도 바쁘지만 순서를 양보 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미흡한 점을 고운 눈길로 보아주듯 가끔은 자기의 몸을 테워 불을 밝히는 촛불처럼 삶이 진실된 사람과 만나고 싶습니다
이곳 금둔사 도량에는 다른 사찰에서 볼 수 없는 또 다른 매력이라면 금둔사 "납월홍매"로 아마 청매, 설매, 홍매등 한국 토종매화 100여 그루가 있으며 그중에서도 남녘의 봄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주는 납월홍매화는 6그루가 있다고 하며 금둔사 매화나무에는 년도를 표기해 두어 자세히 볼 수 있었습니다.
"돌탑공원"은 순천시 낙안면 민속마을길 1697에 위치하며 이 곳은 최병수씨가 약 20 여년간 집 주변에 크고 작은 돌탑 작품을 쌓아 놓은 곳입니다. 입장료는 3천원에 비하여 많은 작품을 오랬동안 볼 수 없고 다만, 최 선생님의 20여년간 작품의 노력과 수고한 흔적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돌탐을 바라보면서 사람들마다 세상에 나올 때마다 자존심과 욕심이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태어나는 것을 봅니다. 다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존심과 욕심을 쌓고 살아 가다가 이순을 넘고 팔순이 다 되어 가도 그 자존심과 욕심을 버리지 못하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러서야 마음의 벽을 허물고 버리는 것을 보면서 봅니다. 오늘도 내 스스로에게 벽과 담을 세우지 않도록 늘 내 자신을 먼저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그나 저나 저 토록 많은 돌과 씨름하며 수 십년간 돌을 하나하나 정성을 들여 쌓아 올렸을 것을 생각하며 그런 최선생님의 의지와 노력이 대단하게 보였습니다. 그러기에 그 분을 만나뵙고 직접 손을 잡아 보았는데 오랜시간 돌과 씨름하여 손이 아주 거칠 것처럼 생각을 해보았는데 손이 잡고보니 정말 부드럽고 따뜻했습니다. 역시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하면 즐겁지 않나 생각되었습니다
돌탑 / 현산
산과 들에굴러 다니며
늘 침묵하지만
님의 손길에 의해 부활한다.
천년이 아니고
백년도 아니더라도
소망을 담은 님의 손끝에서
하나 둘 얹고 쌓다보니 탑이 된다
돌 하나에 사랑으로
돌 하나에 생명을 불어넣고
쌓아올린 돌탑만
님의 소원을 들어줄듯 한다
이 밖에도 많은 작품을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쌓아 올린 작품뒤로 돌 하나 하나에 정성으로 돌 하나에 의지로 돌 하나에 신념을 돌 하나에 사랑을 엿보려고 노력해봅니다. 보이는 것이 다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애를 써 보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순천 조계산 송광사 천자암( 순천시 송광면 천자암길 105 )은 삼보사찰의 하나로 승보종찰인 유서 깊은 송광사의 산내 암자로 송광사의 제9대 국사인 담당국사가 창건하였으며 담당이 금나라 왕자였으므로 천자암이라 명명하였다고 전해지며 천자암 뒷편에는 천연기념물 제88호로 지정된 "쌍향수" 가 있어 암자가 있어 더욱 유명세를 타는듯 보여집니다.
흔히 오래된 나무는 보호수로 지정하는데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신비로울까 하며 천자암을 찾아보았는데 천자암 오르는길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제가본 쌍향수(곱향나무)는 두 그루가 형제처럼 쌍으로 서있어 마치 용이 몸을 비틀어가며 하늘에 오르는 형상을 하고있어 한참을 바라보니 경의롭게까지 보였습니다.
쌍향수(곱향나무)는 고려 때 보조국사(普照國師)와 담당국사(湛堂國師)가 중국에서 돌아올 때 짚고 온 향나무 지팡이를 이곳에 나란히 꽂은것이 뿌리가 내리고 가지와 잎이 나서 자랐다는 것인데 이 쌍향수 나무의 나이는 약 800년 정도로 추정한다고 합니다. 음양의 조화처럼 한그루가 아니고 두그루가 서로를 위로하는듯 함께 있어 또 다시 자연의 놀라운 섭리에 은혜할 뿐입니다.
이 "포대화상"은 천여년 전에 지금의 중국 절강성에 살았던 선승입니다. 화상이란 덕높은 스님의 다른 말이기 때문에 호칭으로 보면 그저 스님이지만, 스님들을 얕잡아 부를 때는 "이 화상아"라고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쓰여지기도 합니다. 중국 절이나, 절이 아니어도 중국의 거리에는 이 포대화상이 많습니다. 굳이 불교가 아니라도 도교적 인물상으로 여겨질 정도입니다.
보통 동백꽃 개화시기는 12월부터 4월까지이지만 지역의 날씨에 따라서 덜피고 더 피어있는 듯 보여지며 전남북지역의 사찰에서 동백꽃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사찰로는 "강진 백련사" "나주 불회사" "고창선운사" "해남 미황사"등이 많은 군락을 이루며 피어있어 조만간 한 바퀴 돌아볼 예정입니다.
어김없이 봄은 매화꽃 가지에서는 물론 이렇게 땅 밑에서도 흙을 밀어올리며 피어나려는 꽃들의 힘찬 기지개와 새 생명의 힘과 에너지를 가득담은 소생하는 봄기운에 나의 몸과 마음도 봄기운에 기지개 활짝피는 봄이고 싶은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