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 당선작 없음
[심사평]
흔히 한두 편 눈에 번쩍 띄는 작품이 있게 마련인데 이번에는 그렇지를 못했다.
발상이나 기법이 모두 비슷비슷하고 세상이나 사물을 보는 눈에도 깊이가 없었다.
아무래도 이것은 어떤 시가 좋은 시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데 따른 것이고,
다시 그것은 시를 제대로 읽지 않은 데 연유하는 것이리라.
실제로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면 당장 화제가 되는 시만을 몰입해서 읽는 경우를 허다하게 본다.
그래서 한두 편 그럴듯하게 만들어 놓기도 하지만,
손끝으로 만든 시가 깊이가 있고 생명을 가지기가 쉽지 않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여기에는 당장의 효과를 우선시하는 시창작 강의의 영향도 한몫을 한다.
하지만 좋은 시가 어찌 말이나 논리로 설명이 되겠는가.
좋은 시를 많이 읽어 몸에 익히는 수밖에 없을 터로,
동시대 또는 당대의 시만을 읽는 공부에 그칠 것이 아니라,
적어도 우리 시에서 고전이 되어 있는 것이라면 모두 폭넓게 공부하여
스스로 어떤 시가 좋은 시인가 알게 되는 것만이 좋은 시를 쓰는 가장 빠른 길이다.
잘 안 읽히고 시원한 맛이 없는 것도 투고된 작품들을 관류하는 특성이었다.
내용이나 기법이 참신하지 못하고 진부한 것이 많았다.
가령 의도적으로 산문 형태를 취한다든가 행을 부자연스럽게 자른다든가
쉼표를 쓰지 않는다든가 등의 방법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여러 번 써먹은 기법으로
전혀 새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여러 투고자들은 잊고 있는 것 같았다.
이에 비하면 자연스러운 리듬을 갖는 시가 훨씬 새로울 수 있는데도 말이다.
너무 원론적인 얘기일 수도 있겠으나 억지로 시를 만들려고만 하지 말고 시를 쓸 수 있는
바탕을 가지려는 노력을 하는 것도 시를 공부하는
중요한 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는 것은 이래서이다.
두보가 그렇게 좋은 시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불우하고 진실한 생애를 살았으며,
그의 가슴에는 항상 세상의 부조리와 불공정에 대한 정직하고도
성실한 분노와 비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예를 든다면 너무 거창한 예가 될는지 모르겠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졸가리를 알 수 없는 장황한 시도 많았다.
내용은 없으면서도 터무니없이 긴 시들도 시를 읽는 즐거움을 반감시켰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유정, 이명, 김희정의 시는 읽을 만했다.
이유정의
‘철제계단’은 상징성도 있고 비유도 자못 재미있는 대목이 없지 않았다.
‘상쾌한 아침을 위하여’는 문자 그대로 상쾌하고 속도감 있게 읽히는 미덕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너무 평이했다.
신인으로서는 무언가 새로움이나 패기에 있어 부족한 느낌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이명의
‘눈보라 치는 새벽’과 ‘앨리스가 없는 이상한 나라’는
이유정과는 반대로 장엄한 맛이 있고 가락에도 힘이 넘쳤다.
하지만 치기가 보이는 것이 흠이었는데,
그의 다른 시 ‘현대 우편제도의 천문학적 기원’이 결정적으로 그 흠을 확대시켜주었다.
김희정의
‘홈쇼핑 치타’는 재주가 번득이는 시로 크게 호감이 갔다.
‘숙성되는 방’은 위 작품을 쓴 같은 작자의 것으로는 너무 발상의 격차가 심해 역효과를 가져왔다.
억지로라면 앞의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당선자로 뽑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심사자들은 숙고한 끝에 당선자를 내지 않음으로써
그들이 더 좋은 시인으로 태어날 동기를 만들어 주기로 했다.
- 심사위원 유종호, 신경림
신춘문예는 알고 있다
김영남
신춘문예에 당선돼 시인이 되면 나는 그때
호미, 삽을 대학 팔차 학기 끝날 무렵 다시 든 부모님께 제일 먼저
고추처럼 매운 시 한 수를 바치리라 다짐했다.
일류회사 중역 꿈꾸며 교문을 빠져나가는 대학 동창들.
그리운 모습들 모두 곁을 떠났을 때도 나는
삐걱이는 강의실 책상에 버려진 볼펜처럼 홀로 남아
원고지 구멍을 메우고 빈혈의 사연을 고향에 부치면서
남도의 제일가는 서정시인으로 떠오르리라 다짐했다.
지난가을 전지(剪枝)한 덩굴장미가 새로 자취방까지 기웃거리고
언제쯤 졸업사진 찍어낼 수 있겠느냐는 부모님 기별이
철 지난 나뭇잎처럼 날아들 땐
느렛골 파밭에서 언 땅을 파고 계신 어머님의 구부정한 허리가 보였고,
대밭에서 후박나무 밑동을 쓰러뜨리는 아버님의 다리
삐걱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종일토록 휴지통 가득 버려진 니코틴 그을린 시간들.
그해 겨울 마지막 잎새처럼 남은 생활비마저 하루 두 끼로
줄어들었을 땐
나는 세상의, 문학의 버린 자식으로 흑석동에서 싸늘하게
살아남아
시인이 될 수 없는 시인들 신분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글이 될 수 없는 글의 심사위원들까지 부정했다.
매번 패배의 변(辯)과 야멸찬 다짐으로 가득 찬 대학노트,
목울대까지 차오르는 쓰라림을 삼키면서도 나는
고추처럼 매운 시 한 수를 바치리라 다짐했다.
출처 : 김태원의 늘 푸른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