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으로 돌아갑시다 (2580) ///////
201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 이해원
역을 놓치다 / 이해원
실꾸리처럼 풀려버린 퇴근 길
오늘도 졸다가 역을 놓친 아빠는
목동역에서 얼마나 멀리 지나가며
헐거운 하루를 꾸벅꾸벅 박음질하고 있을까
된장찌개 두부가 한껏 부풀었다가
주저앉은 시간
텔레비전은 뉴스로 하루를 마감하고 있다
핸드폰을 걸고 문자를 보내도
매듭 같은 지하철역 어느 난청지역을 통과하고 있는지
연락이 안 된다
하루의 긴장이 빠져나간 자리에
졸음이 한 올 한 올 비집고 들어가 실타래처럼 엉켰나
기다리다 잠든 동생의 이불을 덮어주고
다시 미싱 앞에 앉은 엄마
헝클어진 하루를 북에 감으며 하품을 한다
밤의 적막이 골목에서 귀를 세울 때
내 선잠 속으로
한 땀 한 땀 계단을 감고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
현관문 앞에서 뚝 끊긴다
안 잤나
졸다가 김포공항까지 갔다 왔다
늘어진 아빠의 목소리가
오늘은 유난히 힘이 없다
[당선소감] 지친 나에게 새로운 불꽃이 일어
이런 기쁜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두 번의 수술로 몸과 마음이 지쳐 올해가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귀를 의심했습니다.
너무 떨려서 전화도 제대로 받을 수 없었습니다.
늦게 시작한 분들에게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잠시,
젊은 문학도의 길을 가로막은 건 아닌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늦게 출발해 시의 발아점까지 달리기엔 숨이 찼습니다.
햇빛도 보기 전에 멈춰버린 날들이 폐지처럼 수북이 쌓였습니다.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며 잠시 시를 놓고 있다가 느닷없는 당선 소식으로 마음에 불꽃이 일었습니다.
이 소중한 불꽃, 시를 향한 뜨거운 열정으로 태우겠습니다.
옛날 호롱불 밑에서 밤늦도록 책을 보시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때 저의 가슴에 시의 씨앗 하나 묻어놓으신 분들,
기뻐하실 모습을 상상하니 너무 보고 싶어 눈물이 납니다.
주저앉은 제 손을 잡아주신 유종호, 신경림 심사위원님과 세계일보사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시의 길로 이끌어 주신 박주택 선생님,
항상 용기를 주시던 이문재 선생님께 큰절 올립니다.
힘들 때 힘이 되어 주시던 마경덕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시사랑 화요팀 선생님들과 문우들 고맙습니다.
묵묵히 지켜보는 남편과 딸 미라, 아들 명훈이와 창훈이, 친지들, 친구들,
저를 아는 모든 분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심사평] 따듯하고 애달픈 시… 서민가정의 풍경 잘 묘사
지난해보다 작품 수준이 높다는 것이 심사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지만,
개성이 강한 작품이 많지 않다는 지적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행을 타는 것인지 응모작들이 서로 비슷비슷한 점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창작교실 등의 영향이 없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예선을 거쳐 올라온 작품들 중에서 특히
정수박이, 설수인, 이해원의 작품들은 당선작으로 일단 손색이 없는 것으로 판단됐다.
정수박이의
‘능선을 바라보며’는 무리 없이 읽히는 장점을 지녔으며 호소력도 상당하다.
한데 내용이 너무 평범해서 어디서 한 번 들은 것같이 귀에 익다.
‘민달팽이’는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껍데기조차 지니지 못하고 대학을 나온
아들의 취직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오늘의 아버지 모습이 잘 나타나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기에 충분한 내용이다.
그런데도 당선작으로는 무언가 1퍼센트 모자란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어느 한 구석 맺힌 데가 없어서일 것이다.
설수인의 시 가운데서는
‘투석실의 하루’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직접적인 체험 없이는 쉽게 얻을 수 없는 표현이라는 점이 우선 호소력의 단초를 제공한다.
그 고통을 통해 도달하는 깨달음도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한데 조금 장황하고, 내용 탓인지 읽는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대목이 없지 않다. ‘
줄 끊긴 바이올린’이나 ‘앉은뱅이 저울’에 대해서도 같은 소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해원의 ‘역을 놓치다’는
참 따듯하고 애달픈 시다.
여러 면에서 오늘의 정서를 잘 대변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가난하지만 평화스럽고 행복한 서민의 가정 풍경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새롭고 예리한 느낌을 주지 못하는 흠을 가졌다.
‘육교 밑 고고학자’나 ‘냉장고는 태교중’은 비유가 안이하고 서툴다.
이상의 후보작들을 놓고 숙의한 끝에 시의 완성도에 무게를 두기로 하면서
‘역을 놓치다’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 심사위원 유종호·신경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