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야에 소리가 있다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7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마가복음 1장)
복음(εύαγγελίον)의 시작(αρχη) (1절)
구약성서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는 “태초에(έν άρχη)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로 시작됩니다. 이와 비슷하게, 요한복음의 첫 문장은 “태초에(έν άρχη) 말씀이 계시니라”(요1:1)는 구절입니다. “태초”라는 의미를 지닌 “아르케 (άρχη)”는 마가복음의 첫 단어로 등장하는데, “시작”이라는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이라는 낱말이 그것입니다. “시작”과 “태초”는 같은 명사 “아르케”입니다. 그렇다면, 창조의 시작을 펼쳐내는 말을 차용함으로써, 마가복음은 창조에 버금가는 복음의 시작을 보여주려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1:1)이라는 명사형 문장은 마가복음의 표제이자, 마가복음 전체를 함축한 선언입니다. 이 선언으로 우리는 대림절을 시작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소식이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말은 두 가지 해석의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이 복음’이라고 이해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가 전한 소식이 복음’이라는 의미도 됩니다.
기쁜 소식이라고들 알고 있는 “복음(유앙겔리온)”이라는 말은 주로 전쟁에서 승리 소식을 가리킵니다. 혹은 새 왕이 태어나거나 등극한다는 소식에 대해서도 복음이라 일컫습니다. 삼두정치를 끝내고 로마를 통합한 아우구스투스가 황제가 되고 신으로 추앙되고 난 후, 기원전 9년부터는 황제의 생일을 ‘복음(유앙겔리온)’이라고 부르며 경축했다지요. 성서의 서두에 위치한 복음서들은 예수의 탄생을 복음으로 알립니다. 복음은 모든 백성에게 알려져야 할 소식이면서, 이를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환호로 응답할 소식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복음은 그럭저럭 반가운 소식이 아니라,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기쁨으로 반응하게 되는 소식입니다.
길을 준비할 사자가 보내어진다 (2절)
그리스도(메시아)가 오신다는 소식은 성서가 전하는 가장 결정적인 복음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귀환하든 새 임금이 태어나든,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전령들이 방방곡곡에 보내어지듯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이신 예수(1절)의 오심에 앞서 사자가 먼저 보내어집니다. 그 사자의 역할은 오실 분의 길을 준비하는 것, 즉 복음을 알리는 일입니다.
주의 날에 앞서 보냄을 받은 자가 있으리라는 말씀은 말라기의 예언입니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는 말라기(3:1)의 구절을 마가복음은 그대로 인용합니다 (이를 이사야의 글이라고 한 것은 착오입니다).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의 마지막 예언자라고 생각했던 말라기는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가 보냄을 받으리라”(4:5)고도 예언했습니다. 마가복음은 말라기의 전승을 수용하여, 그리스도가 오시는 사건을 주님의 날로 등치하고, 그리스도 오심에 앞서 보냄을 받은 전령이 있다고 말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주의 길을 곧게 한다 (3절)
주의 길을 준비하는 것과 관련하여 다른 한 예언자의 말씀이 등장하는데, 그는 이사야입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40:3)는 이사야의 말씀 역시, 마가복음은 거의 그대로 가져옵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에 대한 이사야의 전승은 ‘광야’라는 장소와 결부됩니다. 그리고 그가 하는 일 또한 ‘외치는 것’, 다시 말해 주님이 오신다는 복음을 알리는 전령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광야에서) 주의 길을 곧게(평탄하게) 하는” 것이라고도 알려집니다. 이는 광야라는 장소가 매우 험준하고 험난하여 길로서는 적합하지 않다는 의미를 드러냅니다.
바위산과 바위 언덕과 바위 계곡이 끝없이 이어진 광야. 반짝 우기 때를 제외하곤 내내 풀도 자라지 못하는 메마른 불모지 광야. 사나운 맹수들이 출몰하고, 길을 잃고 헤매다 불귀의 객이 되기 십상인 죽음의 땅 광야. 그래서 추방자나 도망자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발을 들이려 하지 않는 곳이 광야입니다. 살인을 저지른 모세가 처벌을 피해 도망한 곳이 광야였습니다. 사울 왕에게 쫓기던 다윗도 광야로 들어가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예언자 엘리야도 이세벨의 저주가 두려워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은 주변 민족들의 눈치를 보면서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 사십 년 동안 광야를 전전했습니다. 이토록 죽음과 어둠과 위험이 도사린 광야로 주님이 오시리라고 외치는 자의 소리가 광야에 있고, 그 소리는 길을 준비합니다.
광야에 요한이 있다 (4-6절)
그 광야에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아마도 요단강 줄기와 만나는 유대 광야 동쪽 끝자락 어디쯤이었겠지요. 그는 낙타 털옷과 가죽 띠를 걸치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아갑니다. 이런 모양은 영락없이, 털옷을 입고 가죽 띠를 띠고 살았던 광야의 예언자였던 엘리야를 연상시킵니다(왕하1:8). 엘리야의 모습으로 광야에 거하는 세례 요한은 말라기가 예언했던 사자로서의 엘리야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앞서 보냄을 받아 주의 길을 준비하는 사자 엘리야의 바로 그 일입니다.
광야가 저주와 죽음의 땅이라는 얘기와는 반대로, 인간에게 영원히 쓸모없는 땅일 뿐인 광야가 하나님의 각별한 거처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광야 수도자들의 말에 따르면, 광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창조하신 땅이라지요. 인간을 위해서는 에덴과 같은 정원을 만들어 주어 살게 하시고, 하나님 자신이 거하실 곳으로는 광야를 만드셨다는 얘깁니다. 그래서일까요? 광야로 들어갔던 이들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광야에서 모세는 소명을 받았고,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를 경험했으며, 엘리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십 년 동안 광야를 떠돌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비상하게 체험했습니다. 뒤집어 생각하면, 이들은 광야로 도망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처인 광야로 초대를 받아 들어간 것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을 광야로 불러내십니다.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는 광야는 신비한 영감으로 가득합니다. 예언자들은 사막에 물이 흐르고 광야에 꽃이 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요한이 지금 그 광야에 있습니다.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신다 (7절)
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분”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분은 ‘그리스도(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신(막1:1) 분입니다. 그분은 마가복음이 알리고자 하는 복음의 실체이기도 합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다”(7절)고 말함으로써, 세례 요한은 자신과 그분을 단호하게 분별합니다.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는 요한의 언설은 일면 과장된 듯 보이지만, 오히려 이 과장으로 인해 그의 진정이 드러납니다.
광야에서, 세례요한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를 전파하고(4절), 죄를 고백한 이들에게 세례를 줍니다(5절). 세례(βαπτί́ζω)는 ‘씻다’는 뜻으로서, 물에 담그는 예식을 통해 죄 용서를 위한 정결례입니다. 세례와 더불어, 죄 용서의 과정으로 ‘죄의 자복’을 요구합니다. 죄의 자복과 세례는 죄 용서를 위한 필수 절차였고, 예루살렘과 유대의 많은 사람이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2장에서, 예수께서는 친구들의 손에 실려 온 중풍병자를 보시고 느닷없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2:1-5). 그 병자는 죄를 자백하지도 않았고 세례를 받지도 않았는데도, 예수께서는 그를 용서하십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을 충격에 빠뜨린 예수의 죄 사함은 세례 요한보다 다른 차원의 능력임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서는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2:10). 이것은 ‘(그분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다’는 세례 요한의 말에 대한 증거의 역할을 합니다.
요한은 죄인을 향해 죄를 자복하고 물로 씻을 것을 요구함으로써 용서받을 길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죄인을 꾸짖어 자복하게 함으로써 용서한 예가 없습니다. 광야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지만, 죄 용서를 위한 전제로 세례를 베푸신 적도 없습니다. 요한과 달리, 그분은 죄인의 친구가 되셨고,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십니다(2:17). 씻음(물)으로 세례를 베푸는 요한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은혜(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십니다. 세례 요한과는 다른 능력이며 큰 능력입니다.
세례 요한의 광야를 지나는 대림절
광야는 침묵하고 요한은 소리가 됩니다. 침묵은 말인 동시에 들음입니다. 침묵 끝에 나온 말은 단순하며 분명합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는 세상의 가장 외진 곳에서 울려 나오지만, 모든 사람이 그 소리를 듣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물론 유대 전역에서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기 위해 광야로 모여듭니다. 소리를 따라온 사람들은 요단강으로 들어가 세례를 받습니다. 사람들은 요한의 외침을 듣고 세례를 받고자 요한에게 왔지만, 요한은 ‘내가 아니다’고 말하며 ‘내 뒤에 오시는 분’을 증언합니다.
광야의 요한은 온통 모르는 것투성이입니다. 그는 이 복음의 시작과 결말을 모릅니다. 자기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릅니다. 그는 자신보다 더 능력 있으며,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 뒤에 오신다고 말하면서도 그분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나는 심부름꾼으로 앞서 보냄을 받았다’(2절)는 사실만 깨닫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그는 소리가 되고자 광야에 있습니다.
전체 그림을 다 이해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제단에서 초가 타오를 때, 그 초는 자신이 놓인 모든 정황을 다 알 필요는 없습니다. 초는 그저 그 자리에서 타면 되는 것이고, 그것은 초도 알지 못하는 의미가 됩니다.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타는 초처럼, 그는 다만 소리일 뿐입니다.
광야! 소리 이상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입니다. 또한, 소리가 가장 명료해지는 장소입니다. 빛이 사라진 어둠 속에서야 별빛을 보게 되고, 켜져 있는 촛불의 존재가 비로소 드러나게 되는 것처럼, 소리가 사라진 곳에서야 들리는 소리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고 말씀하셨거니와, 사람은 빛이기도 하고 소리이기도 합니다. 소리인 까닭에 요한은 광야에 있었고, 광야에 있었던 까닭에 요한은 소리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외침을 듣는 대림절은 침묵하고 회개하며 기다리는 광야의 시간입니다. 침묵하는 자가 광야의 저편에서 들려오는 전령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돌이키는 자가 오시는 분의 길에 서게 됩니다. 기다리는 이가 오시는 분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는, 요한처럼 자신도 모르는 자리에서, 오시는 분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