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유교대학 문화재 답사 현장학습
2024년 11월 15일 경남 유교대학에서 경상북도 영주시 소재 문화유산 답사 현장학습을 다녀왔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영주 부석사다.
나는 이 사찰을 여러 차례 방문했었는데 오늘은 여느 때와 다른 감회로 다가왔다.
이곳을 방문할 때 대부분 인솔자 역할을 했었는데 오늘은 피교육자 신분으로 와서 해설사의 이야기를 들으니 새로운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금년 들어 몇 차례 단풍 구경을 갔었는데 가는 곳 마다 단풍의 색깔이 신통찮았는데 부석사 단풍은 맑고 투명했다.
동영상을 제작하기 위해 촬영한 사진 대부분이 맑고 깨끗했다, 단풍 색깔의 영향 때문이다.
부석사의 창건 설화와 무량수전에 대해서는 익히 알려진 사실이기에 언급을 피하려 한다.
다만 한 가지만 언급하면 부석사의 가람 배치가 특이하다. 공중에서 촬영한 사찰 전경은 한자 ‘華’자가 연상된다. 의도적으로 가람을 그렇게 배치한 것이다.
점심 식사 후 두 번째로 찾은 곳이 ‘소수서원’이다.
소수서원은 문성공(文成公) 안향을 종향한 사학(私學)서원이다.
안향 선생은 대성전에 종향된 18현의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처음으로 도입한 대학자로 본관은 흥녕(興寧)이다.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도입하고 섬학전을 설치하여 이를 보급하는데 진력하였다.
주자(朱子)가 집대성한 성리학을 고려에 도입함으로써 유학을 중심으로 한 신진사대부들이 각계에 등장하게 되었다.
소수서원은 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숙수사 터에 안향선생 사묘(祠廟)를 건립하고, 이어 1543년 백운동 서원을 건립했다.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은 학문의 연구와 교화, 후진 양성을 통해 학파를 형성함으로써 향촌사회를 교화하고 나아가 장래의 정치를 지치(至治)로 이끌 인재를 확보하겠다는 생각에서 강학과 교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붕괴된 교학을 진흥하고, 사풍(士風)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서원의 보급이 시급하다고 주장하면서 백운동서원에 대해 송나라의 예에 따라 사액(賜額)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1550년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판과 사서오경과 성리대전 등의 서적을 하사받았다.
소수의 뜻은 "旣廢之學 紹而修之(기폐지학 소이수지) :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 뜻을 담은 '紹(이을소)修(닦을수)'인데 조정에서 결정하였다. 현재 걸려 있는 현판은 명종 어필이라고 한다.
1888년까지 이 서원에서 배출한 인재가 4,300명에 이른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영주시 문수면에 소재한 무섬마을이다. 이 곳 지형은 경북예천 회령포,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 처럼 삼면을 강이 휘돌아 감싸 안은 특이한 지형이다. 태극 문양을 연상하게 하는 공통점이 있는 지역이다.
처음 무섬마을에 왔을 때는 철교가 없이 외나무다리로만 뭍과 교통을 하고 있었다. 다리도 널판이 아니고 서까래 정도나무 두 가닥을 엮은 다리였다. 퇴직 후 등산을 가니 철교가 놓여 있었다. 등산은 철교에서 오른 쪽으로 가면 등산로가 나타나는데 나지막하다. 그 길을 걸은 후 외나무다리를 건넌 다음 섬을 한 바퀴 돌면 2시간 반 정도 소요된다. 그 전에는 주막집이 있어서 갖가지 음식을 팔았다. 시간 관계상 그곳은 가보지 못하고 외나무다리를 건너 돌아왔다.
86세 강낙원 유생이 외나무다리를 건너가기에 마음이 조마조마 했다. 나는 뒤에서 그분의 허리춤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제가 뒤에서 잡고 있으니 안심해도 됩니다. 하고 격려했다. 무사히 다 잘 건넜다.
돌아오는 길에 심동섭 전임 전교께서 마이크를 나에게 주면서 이야기를 해 달라고 부탁하시기에, 나는 진주를 주제로 약 30분간 이야기를 했다.
어려운 내용의 이야기 였음에도 이외로 모두 호응하며 잘 경청했다. 뜻깊은 현장학습으로 기억될 것 같다.
첫댓글 유익하고 생동감있는 현장 잘정리해 주신 박식한자료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