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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랭님! 수중님!
안녕하세요?
노고에 감사드리며
동인지 원고 10편 올립니다.
사진도 첨부합니다.
참 아래 파안대소 사진 좀 고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고맙소
(프로필)
榮民 李祜雨
시인, 수필가
강원도 횡성,
경희대학교경영대학원 총동문회수석부회장,
국제라이온스협회 354-C지구 지역부총재
송죽라이온스클럽 ,
월남전 참전 / 맹호 기갑 의무병,
대한민국 고엽제 전우회 회원,
한국 문인협회 회원,
모던포엠 수필 신인상
한겨레문학 詩人 신인상
한겨레문학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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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지 원고 10 편 리스트
榮民 李祜雨
010-3976-0212
# 01 *** 귀 향 *** 詩
# 02 *** 월 현 리 *** 詩
# 03 *** 목단강 "八女投江像" *** 隨筆
# 04 *** 빵굽는 사람 *** 隨筆
# 05 *** 보릿고개 마을에서 *** 詩
# 06 *** 小 白 山 *** 詩
# 07 *** 원 적 산 *** 詩
# 08 *** 어머니와 고향 *** 隨筆
# 09 *** 경사리 사람들 *** 隨筆
# 10 *** 가 을 ***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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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
*** 귀 향 ***
글 / 豊泉 李祜雨
부슬부슬 내리는 가을 비
털부숭이 강아지 풀
노란 달맞이꽃도,
스러지는 여름이 아쉬워
고개를 떨구고
개울물엔 청둥오리 노닐며
천방지축 개구리녀석
황금벌 논뜨락을 휘젓는다.
가을 같은 인생 길,
천덕봉 너머로 훌쩍 가버린 조각구름처럼
덧없이 흘러 흘러 어디론가 가버리고
아련한 추억만 가슴을 적신다.
감자바우 촌놈이라, 그렇테나
차멀미엔 그만이라던
녹쓴 열쇠 입에 물고
온종일 먹지도 못한 채
웩웩거리다 녹초가 되어
꽤죄죄한 의자에
엎드려 잠이 든다.
오백 리 고향길
철마도 힘들어 연실 시커먼 연기를 토하며,
헉헉거려 오르던 치악산 따발이 굴
한참동안 올라도 거기가 거기
아슬아슬 기암절벽을 건너간다.
멀리 남한강 물줄기가 보일 때
길섶에 줄지어선 키다리 옥시기
소맷자락 너풀대며 귀향을 반기고
아직도 한참이나 더 가야하는데
벌써 마음은 고향집 마루 뒹군다.
“호우가 왔구나, 내 새끼가 왔어,”
맨발로 뛰어나오시던 어머니!
철부지 동생들까지
덩달아 울던 추석날 밤
아름답고 처연한
인생길 굽이굽이 활동사진
달님도 보기 애처로워
슬며시 구름 뒤로 숨는다.
누렇게 익은 벼 고개 숙이고
구절초 꽃 곱게 피어 반 길쯤이면
그리움의 눈물이 베어난다.
붉으스레 감이 익어가고
밤송이 벌어질쯤이면
굳은 살 손가락 명주실 동여맨
어머니 기다리시는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산도 들도 고개를 빼고
기다리는 고향 하늘로
훨훨 날아가리라.
- 終 -
Sep, 23th, 2007
www.poongyolon.com
* 천덕봉- 경기 이천에 있는 가장 높은 산봉우리.
* 치악산 따발이 굴- 치악산 루프식 터널의 강원도 사투리.
# 02
*** 월현리 ***
글/ 豊泉 李祜雨
치악산 뒷자락을 휘돌아
개울 건너 오르막길
노란 금계국 한 송이
수줍은 듯 피어,
바람결에 하늘하늘
먼 길 지친 나그네를
반겨준다.
고운 빛 하늘엔
온갖 산새들
자유로이 날고
푸른 솔 싱그런 바람
수풀 내음 모두 그대론데
사흘 밤만 자고
고향으로 돌아가자던
정든 사람들
모두 어디로 갔나?
개헤엄치며 미역감던
개울물 지금도 흐르고
마을 앞 미루나무 꼭대기
까치 한 마리 까욱까욱
여전히 반기는데
북녘고향 떠나와서
옹기종기 모여 살던
그 사람들 모두 다 어디로 갔나?
반딧불 너울너울 춤을 추는,
벌레 소리 가득한 밤이 되면,
떠나온 고향땅을 훤히 비춰주는
그리움의 달 뜨는 월현리
갈매기 법석대는 청진항
외갓집 식구들 그리울 때
더딘 걸음
십여 리 신작로길
한나절씩 걸어 찾으시던
월현리
하늘도
바위도
새들도 모두 그대론데
그리운 어머님 모습
보이지않네.
왜? 나는 혼자일까
슬며시 돌아앉아
북녘 하늘 바라보며 울먹이시던
산골 마을 월현리
하얀 귀밑머리
주름진 얼굴에
힘없이 미소지으시며
“아범아! 아무리 바빠도
때맞춰 밥 자시고 다니시게나“
정겨운 목소리 지금도 들리는 듯
저려오는 가슴에 비가 내린다.
내 육신의 원천수가 흐르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
어딘가 계실 것 같은 어머니 생각에
하늘을 쳐다보니
이름모를 산새 한 마리
후르륵후르륵 울며 날아간다.
-終-
# 03 (수필)
*** 모란강 “ 팔녀투강상 ”(牧丹江 " 八女投江 像 ")***
글 / 豊泉 李祜雨
개나리꽃 흐드러지게 피어 노랗게 물들여 놓은 강변길, 파란 하늘 떠가던 뭉게구름 멈춰서 빙긋이 내려 보고, 현숙한 조선 여인네처럼 우아한 목련 꽃송이도 활짝 피어 바람결에 하늘하늘 춤을 추며 화사한 봄날을 노래한다. 하늘과 땅 그리고 꽃들이 저질러논 아름다운 반란, 이 땅위에서 호흡하고 있음에 더없는 감사를 되뇌이며 중국(中國)의 흑룡강성(黑龍江省) 모란강(牧丹江,중국에서는 목단강이라 부르고있다 )행 비행기 트랩을 올랐다.
검푸른 바다위에 보여야 할 출렁이는 바닷물은 간곳없고 타다 남은 숯덩이가 얼기설기 버려진 것 같은 황량한 갯벌에 먹이를 찾는 갈매기 몇 마리 애처롭게 날아다닐 뿐이었다.
같은 바다인데 한쪽은 물이 말라 초라한 꼴로 버려져 있음은 왜일까? 해외로 출장 갈 때마다 느껴보는 바보스런 궁금증이다. 달과 태양의 변덕에 의한 사리와 조금의 이치가 어떻든 간에…….
오랜 세월 파도가 그려놓고 바람이 다듬어놓은 해안선을 따라 春風을 가르고 유유히 날아가던 비행기도 어느새 우리가 살고 있는 땅덩어리를 왼편으로 슬쩍 비켜서 망망대해를 떠간다. 곧은길을 바로가면 오죽이나 좋으련만 그놈의 이념이 무엇인지? 차라리 눈을 가려 안 보려 눈밭 같은 구름 위를 자맥질하며 날아간다.
끝없이 펼쳐진 하얀 세상을 한참이나 지나 창문으로 보여지는 검으스레한 산과 들 그리고 멀리 미꾸라지 같은 강줄기도 보인다. 이윽고 듬성듬성 성냥갑 같은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하며 간혹 도로를 질주하는 차들까지 시야에 들어오고 기장의 안내 방송이 나온다. "여러분은 10분후에 모란강 하이랑 공항에 착륙하시겠습니다."
그 순간 나는 눈아래 펼쳐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아차! 잘 못했구나" 하며 나직이 외마디 소리를 토해 낸다. 왜냐하면? 엊저녁에 해림시 정부 관리로 부터 받은 이메일에는 해림시의 날씨가 완전한 봄이라고 들었기에 별 생각 없이 정부 관계자들을 만날 때 입기 위한 양복 한 벌과 가벼운 봄옷들로 가방을 채워 왔는데, 내 눈에 보이는 것은 텅 빈 논밭에 누워있는 게으른 얼음 덩어리와 눈으로 가득 덮인 하얀 雪原에 부는 바람에 심하게 흔들리는 앙상한 나무들만 보이니......, " 林海雪原 " 을 한갓 낭만스런 이름으로만 알았더니 결국은 이것이었구나 하며 준비부족을 실감하였다.
인천공항을 떠나 2시간 반 남짓 날아서 도착한 흑룡강성 모란강시 멀지 않은 곳에 우리 민족의 애환과 눈물을 싣고갔던 물이 흐른다. 만주어로 "구불구불 흐르는 강"이라는 이름의 모란강, 여전히 해랑 철교 아래를 지나 목단강 시내를 관류 북상하여 송화강과 합류 ,黑龍江에 섞여 東海로 흘러 든다는 야속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강이 지금도 흐르고 있다.
암울했던 일제시대엔 우리의 유민들이 두만강을 건너고 노송령을 넘어 북으로북으로 살길을 찾아 올라갔던 곳, 그러나 죽을힘을 다해 올라갔지만 해방이 되었어도 돌아올 수 없었던 한이 맺힌 땅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중국의 어느 지역보다 우리 동포와 민족 문화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곳이 모란강시가 아닌가 생각된다.
" 바다 동쪽에 융성했던 나라 "
발해국의 영토중 일부에 해당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역사에서 멀어져 갔던 불운의 땅, 모란강. 그럼에도 지금까지 같은 피가 흐르는 우리 민족들이 여전히 살고있어 왠지 모르게 애착이가는 우리 땅 같아 漢字로 쓰여진 간판을 제외하곤 별다르게 남의 땅이라는 느낌이 들지 없었다. 대대로 우리 선조들의 삶의 터전이던 동북3성과 내몽고지역으로 흘러간 우리 유민들의 눈물도 얼룩져있고, 뒤늦게 "온돌과 디딜방아 " 등 우리 고유의 문화유산이 속속 발굴되는 여기도 역사 속에 우리 땅이 아니었나! 더더욱 잔잔한 감동을 피할 수 없었다.
이국 나그네의 낯설움보다는......,
특별히 이번 여행은 모란강시에서 12 km 쯤 떨어진 해림시에 무공해 농산물 수입을 위한 현지 방문을 목적으로 왔으므로 인민정부의 외자유치국장과 실무직원이 모란강 공항으로 마중을 나와 내 이름 석 자를 크게 쓴 피-켓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등소평과 종씨라는 漢族 국장과 高씨 성을 가진 인민정부 실무자(중국 동포)가 함께 나왔는데 작은 키에 평범한 차림을 한 高氏 성의 중국 동포는 왠지 첫눈에도 범상치 않은 사람임을 엿볼 수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내가 해림에서 업무를 보고 떠날 때까지 그림자처럼 함께했던 그는 30대 중반에 젊은 나이로 소수민족의 어려움을 딛고 하얼빈 대학에서 열공학을 공부한 엘리트였으며 양친 모두가 교육자로 정년을 마친 아주 훌륭한 중국 동포 집안의 자제였다.
탁월하게 구사하는 중국어 솜씨와 우리말을 잊지 않기 위하여 공부할 책을 부탁할 정도로 확실한 민족의식을 지닌 앞날이 기대될만한 중국 동포였다. 아주 귀한 파트너를 만난 덕에 좋은 중국 비즈니스를 예감해 보기도 하며 시종일관 나를 도와서 함께한 그를 앞으론 高先生이라 부르기로 하였다.
이곳으로 오기 몇 일전 이메일로 고 선생에게 부모님 고향이 어디시냐고? 물었더니 그의 대답은 기대와 달리 다소 충격적이었다. 대답인즉, " 나도 그거이 알고 싶어 답답합니다. 내 아버지는 고아이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이집 저집으로 옮겨 다니며 살았기에 할아버지 할머니도 또 고향도 모른답니다." 그야말로 더 물어볼 말이 없는 통한의 대답이었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사흘이면 돌아갈 줄 믿었다가 평생의 이별이 되고만 수많은 이산가족들과 만주 벌판을 떠돌며 막연히 귀향의 날을 꿈꾸며 힘겹게 목숨을 부지 했던 우리 민족의 아픈 상처를 들쳐 낸 듯한 괜한 질문을 한 것 같아 고 선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홀홀단신 월남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고 즐거운 듯 살았지만 언제나 마음 한 귀퉁이는 실향의 언저리를 맴돌며 외롭고 힘든 삶을 營爲할수 밖에 없었던 내 어머니의 지난 세월이 그러셨듯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고 선생의 아픔을 충분히 짐작 할 수 있었다. 가족의 사랑이 아무리 크다 한들 떠나온 고향을 그리는 마음만 할까? 까마귀도 고향 까마귀는 반갑다던데.....,
제법 쌀쌀한 눈바람이 불어대는 모란강 공항을 빠져나와 이십 여분 해림시로 가는 동안 도로 좌우로 펼쳐진 비옥한 농토.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융단을 깔아 놓은 듯 광활하게 뻗어나간 옥토가 휴면 상태라 하니 높고 낮은 산들이 국토의 대부분인 우리나라를 생각해볼 때 심히 부러운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점점 썩어져가는 지구촌에 최후의 청정지역으로 남기려는 창조주의 깊으신 뜻이 담겨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 해 본다. 과거 이념이야 어떠했었든 간에 그 땅을 지키는 사람들의 순종에 익숙한 마음 , 그 가난한 양심을 아시고서 말이다.
예약된 린하이 호텔의 9층 전망이 좋은 방에 여장을 다 풀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이 해림시 인민 정부 관리들이 우르르 몰려와 호텔 3층의 리셉션 장소로 안내되어 상견례를 하게 되었다. 아직도 엄동설한의 끝 무리인 것도 모르고 살랑살랑한 봄옷만 가득 담아 와서 마음 쓰이는 이국 나그네의 속도 모르고 가득채운 술잔을 쉴 새 없이 들이 대기 시작하였다. 나름대로 피한다고 피했지만 탄알을 가득채운 집중 사격을 완벽히 피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상술이 아닌 손님 접대를 철저한 미덕으로 여기는 중국 사람들의 환영하는 마음이 고맙기도 했지만 참 힘들었던 밤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해림에서 가장 좋다는 호텔임에도 불구하고 둘째 날 아침부터 전기가 나가는 뜻밖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샤워는커녕 면도할 물까지 데스크에 부탁해야 될 형편이 되었다. 그 내용인즉 해림시 도시 전체의 전기설비 정기 점검 때문에 일년에 한두 번 전기가 나간다는데 하필이면 그날이 바로 오늘이 돼 버렸다는 것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더니, 원 참!
어쨌든 빡빡한 5일간의 일정 때문에 따지고말고. 할 것도 없이 일찍 찾아온 고 선생의 안내로 첫 방문지인 산시진(진:한국의 "리"정도의 행정 단위)이라는 산간 오지 마을로 버섯과 잣 등 유기농 농산물 수입 상담을 위해 출발하였다. 해림시에서 대략 30여 킬로 좁은 비포장 길을 지나는 동안 우리나라 50년대에 사람이 끌던 인력거와 소와 말이 끌고 가는 우마차가 우리가 탄 최신형 아우디 승용차와 뒤 섞여서 함께 길을 가기도 하였다. 늦게 간다고 나무라는 사람도 없고 굵직한 클랙션으로 나팔을 불어 대도 들은숭 만숭 피하는 사람도 없거니와 그럼에도 교통사고가 별로 없다는 믿기 어려운 설명에 무질서 속에 질서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인가? 그런 저런 생각 속에 한 시간 가량 흙먼지를 날리며 비포장 길을 달려 산시진 마을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영원한 광복군 사령관 김좌진 장군의 발자취를 돌아볼 수 있었다.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부농의 아들로서 개화사상이 투철하여 15세 때 집 노비들과 머슴들을 풀어주고 죽기까지 평생을 항일 운동에 몸바쳐온 독립 운동가 김좌진 장군의 유적지가 인적조차 드믄 흑룡강 성 해림시의 벽촌마을 산시진에 있었음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 유명한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타도하고 黑龍 강 쪽으로 부대를 이동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여 부총재에 취임하였고, 1925년에는 만주로 돌아와 신민회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으면서 잘 알려진 성동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간부 양성에도 주력하였고 1929년경에는 한족연합회를 결성하여 이곳 산시진에서 황무지 개간, 문화계몽 사업, 독립정신 고취와 민족의 단결을 호소하다가 이듬해 박상실에 의해 암살당한 민족의 별 백야 김좌진 장군, 그가 생활하던 초라한 숙소와 차마 보고 싶지 않은 암살 장소에 이르러 숙연함으로 애국애족의 참다운 정신을 조용히 다짐해 보기도 하였다.
지금의 중국은 결코 자동화로 무장된 첨단 산업만 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 자동화로 생산하면 농촌에 많은 저임금의 인력들이 손을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동화에 의한 대량 생산 체재보다 인력 소모가 더 중요한 국가 과제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산시진에서 처음 방문한 잣 공장도 지극히 원시적 방법으로 잣을 생산하고 있었다. 불과 십 여살 정도의 소녀에서부터 머리가 하얀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내일의 풍요로움을 꿈꾸며 즐거운 표정으로 뽀얀 알 백이 잣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골라 담고 있었다. 초라한 주변 환경에 낙후된 시설 그리고 온종일 일해도 얄팍한 월급봉투를 면할 수 없지만 그래도 바쁘게 손을 놀리며 얼굴 가득히 잣 색깔만큼이나 뽀얀 희망의 빛이 감돌고 있음을 볼수 있었다. 봄에 씨 뿌리고 여름 내내 땀 흘려 가꾸고 그리고 가을의 풍년을 겸손하게 기다리는 욕심 없는 농부의 마음처럼…….
오전 내내 잣 공장 상담을 끝내고 흑목이 버섯 재배 공장으로 안내 되었다. 아직 제철이 아니라서 생 버섯은 볼 수 없었지만 쉼 없는 노력과 개발의지로 명실 공히 세계 최대의 버섯 생산국이 되기 위하여 땀 흘리는 그들의 표정과 광활하리 만치 드넓은 식용균 생산 단지와 정부 측의 전폭적 뒷받침에서 오래지 않아 세계 최고의 무공해 농산물 생산국 위치에 오를 날도 결코 멀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잘 정돈된 비옥한 농토와 저렴한 인건비 그리고 묵묵히 도전하는 만만디 정신 지금의 중국이 꾸준히 지탱해 갈 수 있는 확실한 밑거름인 것 같았다.
그럼 우리 민족에겐 과연 그런 밑거름이 없는 것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우리에겐 세계 만민이 경이로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격려의 박수를 쳐주었던 IMF 환란 때의 신명나는 히스토리가 있지 않았던가? 돌배기의 돌 반지에서 부터 신혼부부의 결혼반지, 목숨처럼 간직했던 칠순을 넘긴 백발 할머니의 금비녀에 이르기까지 아낌없이 겨레와 국가 앞에 던저져 풍전등화 같은 이 나라의 운명을 거뜬히 구해내지 않았던가! 지구촌 어디를 둘러봐도 찾아볼 수 없는 前代未聞의 그 민족적 사건을 우리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거울삼아 지혜롭게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쌀 개방을 중지하라고 과일 수입을 중단하라고 이런저런 나라끼리의 약속도 저버리고 중단하라고 시위하는 소박한 우리 농민들의 속 타는 마음을 모를 리 없지만 그러나 이제는 구시대적 흑백 논리에서 벋어나 지구촌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무한 경쟁 체제를 겸허히 인정하여 WTO든 FTA든 당당히 접수해버리고 환란 때의 자생능력으로 지금의 어려움을 거뜬히 극복하는 지혜로움이 필요한 것 같다. 필경 우리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어려움이 아니라면 지구촌 모든 나라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일인즉, 우리만 유독 큰소리로 신음하는 것은 보기 좋은 모양세도 아닐뿐더러 선진국을 향한 경제규모 세계 10위의 대한민국 국위에도 걸맞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방문한 두 업체 모두가 아직은 수출 상담에 기본적 준비가 덜된 상태라서 의외로 상담 시간이 길어져 늦은 밤까지 산시진에 머물러야만 했다. 바쁜 일정에 쫓겨 제법 쌀쌀한 눈꽃 추위도 잊은 채 상담을 마치자마자 산시진을 치리하는 미모의 기려굉 당위 서기와 촌장이 베푸는 만찬에 초대되어 중국식 소주와 특유의 흑룡강 성의 특별한 요리로 후덕한 대접을 받았다. 그 다음날도 아침 9시에 무려 40킬로나 멀리 떨어져있는 횡도화자진의 버섯재배 단지를 방문하였는데 꽤 추운 날씨에 몸살 기운이 슬슬 돌아 호텔로 가서 눕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다. 알고 보니 방문한 그곳이 흑룡강 성에서도 눈이 가장 많이 오고 유난히 추운 지방이라는 것이었다. 털 점퍼를 입었어도 모를 일인데 홑껍데기 점퍼를 입었으니 춥지 않고 배길 수 있었으랴, 상담하는 넓은 사무실에는 미지근한 라지에터가 벽 언저리만 간신히 지키고 있을 뿐 무공해 버섯 사겠다고 찾아간 이국 나그네의 추운 마음을 녹이기엔 턱없이 미지근한 있으나 마나한 화롯불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그러나 깔끔한 매너와 다양한 무역 경험을 지닌 그곳 동사장(대표자)의 협조로 신속히 상담을 끝낼 수 있었음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우리는 인근의 동북 호랑이 보호소를 방문하여 백두산 호랑이의 사촌들을 만나 보았다. 국내에서도 많이 보았던 낯설지 않은 생김새들이었다. 가까이 간 우리 일행을 보고 으르렁거리는 새끼 호랑이의 장난스런 엄포에 잠시도 쉬지 못하고 뛰어다닌 피로가 일시에 풀리는 듯 즐거워하며 다음 행선지로 옮겨가기 시작하였다. 이미 3년 전부터 나의 母校를 통해 교류하게 된 해림시 부시장께서 점심을 대접하겠다는 갑작스런 전갈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우리의 상담 장소까지 찾아와서 대접을 하겠다니 그들의 따뜻한 인간적 배려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우리는 이후로도 오전 오후를 나누어서 할 수 있는 한 여러 업체를 방문해서 거래 상담을 하였다. 시내에서 꽤 먼 산속에 사슴 120 마리를 키우면서 녹용을 소재로 "루寶酒"(루: 사슴)라는 기능성 술을 만들어 한국으로의 수출 길을 마련키위해 노력하는 漢族 黃사장도 만났고 특별히 호박씨와 잡곡 등을 수출한다는 무역업체를 방문했을 때는 고향집 대청마루에서나 볼 수 있었던 부자지간의 정겨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백발의 연로하신 아버지는 한가로이 카드놀이를 즐기고 있었고 그곳의 사장격인 아들은 투명한 유리로 막힌 옆방에서 아버지의 시중을 들어가며 회사 일을 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무척이나 다정다감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난 나로선 갈급한 풍경이어서 큰절이라도 덥석 하고 싶은 자상하신 아버지의 잔영으로 가슴에 담을 수 있었다. 또 효성스런 그 아들이야말로 바로 우리 모두의 모습이 됐어야 하지 않는가? 하고 이미 지나 버린 세월을 향해 悔恨의 소리 없는 외침을 질러본다.
더구나 내가 해림을 떠나던 날 연세 높으신 아버지와 효자 아들은 " 앞으로의 거래가 어떻든 계속 안부를 전하고 싶다며 오늘 점심을 꼭 대접하겠다." 는 것이었다. 사실 그날 인민정부의 담당 국장과의 점심 약속이 예약되어 있었지만 잦은 전화에 워낙 독촉이? 심해서 결국은 선약된 담당 국장을 무역회사로 오라고 양해를 구하여 의미 있는 점심 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다. 더구나 좋은 만남을 뜻하는 선물이라며 냉동 송이버섯을 정성스레 얼음까지 채워서 챙겨주던 중국인 아버지와 아들, 그야말로 나라가 틀리고 족속이 다르고 삶의 문화가 다른 것이 진솔한 인간관계에 전혀 문제가 될 수 없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고 비록 한 가지 언어로 시원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는 없었을지라도 무언가 건네려하는 따뜻한 마음을 넘치도록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대로 중국의 여러 곳을 다녀 봤지만 이렇듯 따뜻한 인간 거래에 후덕함은 처음 누려보는 즐거움인 것 같았다.
마지막 일정까지 시종일관 함께하며 나를 도왔던 高선생의 제의로 자신의 대학 동창생이 살고 있는 신합촌이라는 조선족 마을에 중국 동포(조선족)들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의미 있는 일인 것 같아 즉석에서 털털 거리는 택시를 잡아타고 시내에서 멀지 않은 동포 마을을 방문하였다. 먼저 찾아 간곳이 떡 공장을 한다는 田氏성의 젊은 동포의 집이었다. 대문 앞에 서투른 우리말로 " 떡공장 " 이라고 써놓은 것이 좀 장난스럽긴 했어도 화려한 네온의 간판보다 더 정겨워 보이는 것은 같은 피가 흐르는 동족에의 이심전심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조부께서 독립 운동가였기에 전 가족이 긴 세월 생명의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며 험난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삶을 회고하는 듯 잠시 멈추었던 말문을 천천히 열기 시작했다. 일본군을 피하기 위하여 하얼빈으로 갔다가 발각되어 다시 목단강으로 옮겼지만 그것도 힘들어서 작은 도시 이곳 해림으로 피해 와서 겨우 정착하게 되었다는 파란 많았던 독립 운동가의 삶과 누구하나 돌보지 않는 그 후손들의 어려운 처지를 볼 때 송구스런 마음을 감출길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이름 없이 평생을 헌신하다 빛도 없이 사라져간 그분들이 있었기에 조국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고 그러기에 우리가 여유론 生을 보낼 수 있음을 잘 알면서도 고마운 마음은커녕 그런 분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까맣게 잊고 희희낙락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自問해 보십시요" 라는 말이 있기도 전에 우리의 선구자들은 풍전등화 같은 조국과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독립운동에 나선 것이다. 황량한 만주 벌판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조국의 존립을 위한 험난한 길을 택했던 것이다. 이젠 전쟁도 끝이 나고 독립운동도 끝이 났지만 그들의 가족들은 여전히 어려운 삶을 면치 못하고 중국의 한 소수민족으로 묵묵히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명예로움도 그리고 조국의 아무런 배려도 누려보지 못한 채로 말이다. 아무쪼록 국가적 차원에서 실현 가능성이 있는 정책이 확고하게 수립되어 꾸준한 관심 속에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따사로운 報恩의 계절이 빨리 올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한편 조선족 소학교에서 어린 아이들을 육성하는 30대 중반의 젊은 교장 선생님 한분이 동석하여 최근에 학교에서 일어난 심각한 사건 하나를 듣게 되었는데 다름 아닌 " 코리안 드림 "에 얽힌 여덟 살짜리 여자 아이의 안타까운 이야기였다. 이제 소학교 2학년인 여아의 어머니는 남편과 어린 딸을 남겨두고 오래전에 돈을 벌기위해 한국으로 떠났다고 한다. 처음 몇 달간은 꼬박꼬박 적지 않은 돈이 남편과 아이에게 송금돼 왔지만 최근 얼마 전부터 무슨 연유인지 송금이 끊겼다는 것이다. 마땅한 직업이 없던 남편은 극도의 실망과 불안으로 허구한 날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그러다 어떤 일로 공안(경찰)에 구속되는 설상가상의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빨리 나와야 6개월 정도라니 이제 소학교 2학년 밖에 안 된 여자아이를 어떻게 보호해 줄 것인가?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교사들이 며칠을 고민한 결과 교사들이 차례로 돌아가며 양육시키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밥을 먹이고 잠을 재우고 옷을 갈아입히는 문제는 그럭저럭 해결한다 해도 문제는 심각한 정서불안으로 인한 여아의 정신 건강관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에 대한 걱정이었다.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여아가 두렵고 외로우면 엄마를 부르고 아빠를 부르곤 하지만 어느 한쪽도 아이 곁에 없으니 스스로 정서를 조절할 수 없는 어린 마음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가 남겨질까 전교사가 전전긍긍 고민하며 자식을 키우는 교사로서의 사명감과 동족에의 사랑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고 한다. 아무쪼록 돈벌러간 엄마로 부터의 소식과 구속된 아빠가 풀려나길 기원해 본다. 그야말로 남의 일 같지 않은 가슴 아픈 일이다.
그리고 붕괴 직전의 가정이지만 어린아이의 마음에 평생의 상처로 남지 않게 극적으로 가족이 다시 모여 원래의 모습이 회복될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해 본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이 아닌 상처를 주었던 " 코리안 드림 " 수혜자이자 피해자가 하필이면 중국 동포들이 대부분이라니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빠듯한 일정 때문에 현지 업체가 미처 자료 준비를 못한 원목 건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불과 닷새 밖에 안 됐는데 꽤 오래전에 집을 떠난 느낌이다.
오후 4:30분 출발하는 비행기 일정이기에 최소한 3시간 정도는 여유가 있어서 고 선생과 나는 모란강가에 유서 깊은 빈강 공원을 돌아보기로 하였다. 겨레의 독립을 위하여 우리민족이 가장 활발하게 항일 운동을 벌인 도시 중의 하나로 불세출의 독립운동가 김좌진장군을 비롯한 많은 항일 운동가들이 활동했던 곳이기도 하며 "애수의 소야곡"을 부른 가수 남인수와 “눈 물젖은 두만강” 을 부른 가수 김정구 등이 머물렀던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모란강시!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느낄 수 있는 삶의 애환과 실향의 아픔이 도시 곳곳에 묻어 있어 이국에의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나 보다. 차라리 오래전에 왔었던 고향 근처의 어느 도시쯤이란 말이 더 편할 것 같았다. 또한 모란강시에는 옛 발해국의 유적지로 알려져 있는 용두산 성새, 남성자성새가 자리 잡고 있으며 현재 조선족 약 13 만 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또한 조선족 소학교. 중학교. 조선민족상점, 조선민족예술관, 조선민족도서관, 조선민족출판사 등 우리의 문화의 얼이 깊이 스며있어 말 그대로 북방 의 "코리아타운" 이라고 불리 우는데 전혀 손색이 없는 도시라고 전해지고 있었다. 모란강역에서 쭉뻗어나온 太平路가 모란강에 의해 막히는 지점의 '빈강공원(濱江公園)'에 강을 따라 길쭉하게 잘 정돈된 산책길이 나있어 많은 시민들의 좋은 휴식 공간이 되어준다. 제일 먼저 빈강공원 한복판에 부상한 두 사람을 안고 있는 항일투쟁의 상징 「팔녀투강상(八女投江像)」의 육중한 모습이 강렬하게 시야로 들어온다.
멀리 1938년 10월 하순경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던 항일연군 제5군 예하 제 1사단의 백여 명의 전사들이 우수훈 하 서안의 로도 구에서 숙영하다가 일본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모두가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위급한 상황에 "랭운"을 비롯한 8명의 여전 사들이 비장한 각오로 백여 명의 전우들을 엄호하기 위한 저격 임무를 띠고 우수훈 하에 뛰어들어 일본군의 시선을 모은 끝에 집중 사격을 받고 野生花같은 향기론 삶을 그만 접은 것이다.
곱게 핀 스믈다섯의 언니 戰士로부터 부모님 앞에서 어리광이나 부렸어야 할 열세살의 애띤 소녀 戰士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이 땅의 해방과 건설을 위해 소중한 생명을 아낌없이 바친 인물로 추앙받고 있었다. 그 여덟 사람의 女戰士 중에 漢족 여성이 여섯이고 두 사람의 조선 여성이 바로 항일련군 제5군 제1사 피복창 창장인 안순복과 戰士 리봉선 이다.
탄약이 다 떨어질 때까지 일본군과 싸우다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명예로운 죽음을 택했던 항일 게릴라 여성 대원 여덟 중에 두 사람, 오직 한번 피울 수 있는 생명의 꽃을 두려움 없이 강물로 던졌던 그날의 피맺힌 절규도 잊은 채 무심한 모란강은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
그저 이방의 나그네로 잠시 들렀다가
우연히 알게 된 그대들의 숭고한 이야기
그냥 듣고만 가기엔 숙연한 마음이 발길을 잡아
이렇게 빈강 언덕에 서서 강물을 바라보며
어디쯤인가 그대들을 싣고 간 먼 세월을 찾아봅니다.
그대들의 고향이 어디신지?
어떻게 이곳에서 멈추게 된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지만
우수훈 하에 몸을 던져
지지 않는 헌신의 꽃을 피웠던
그대들의 넋을 보았기에.
훗날 고향에 가면 말 하리라
만주 벌판 목단강 나루에
장한 두 아낙이 꽃이 되었다고
영원히 시들지 않는...,
- 終 -
15th, Apr, 2006
모란강 八女投江像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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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 (수필)
*** 빵 굽는 사람 ***
글/豊泉李祜雨
여보! 나 말이야 회사 일이 안정되는 데로 "빵 만드는 기술학원을 다녀야 겠어," 하고 김장 배추를 다듬고 있던 아내에게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아내가 좀 의아하다는 듯이 대답한다. " 왜요? 갑자기 빵 만드는 학원을 가신다니? 그게 무슨 뜻이에요? " 하고 아내가 반문한다.
"응 다름이 아니고 어차피 난 퇴직금이나 연금을 타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노후를 좀 일찍이 준비해야 할 것 같아서 그 일환으로 빵을 만들어 홈 메이드 브랜드로 팔기도 하고 반가운 이웃과 나누어 먹기도 하며 시간이 나면 책도 좀 읽어 볼 수 있기 때문이지" 하고 대답하였다.
허기야 장사라면 나름대로 특별한 기술과 몫이 좋은 장소에 그럴싸한 건물, 그리고 서너 달은 걱정 없이 버틸 수 있는 자본을 기본적으로 구비해야 됨에도 오히려 결격 사유가 더 많은 내가 빵 굽는 일을 한다니 듣고 있던 아내는 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이 생각은 즉흥적 발상이 아니다. 지난 4월에 둘째 딸아이를 먼저 출가 시키고 난 뒤 뭔가 잃어버린 것 같은 허탈감에 몇 날을 밤잠을 이루지 못해 애를 쓰며 마음고생을 하던 터에 새삼 50 대 후반이 되어버린 나와 아내의 노후가 전혀 준비되지 못했음을 불현듯 느끼게 되었다. 결과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서 좀 쉽고 실현 가능성이 높은 분야를 생각하다가 먹기도 좋아 하지만 만들기도 좋아 하는 빵 굽는 일을 구상하게 된 것이다.
내 인생에 처음으로 맞이한 자식의 결혼식, 출가하는 딸아이의 손을 잡고 하객 석을 지나 주례 목사님 앞에까지 가는 동안 왜? 그리 설움이 북받쳐 오르는지, 금세 울어 버릴 것 같은 아비의 심경에 아랑곳 하지 않고 생글거리며 미소 짓는 딸아이의 표정을 애써 두둔하며 긴장 속에 많은 하객들의 축복을 받으며 서투른 결혼식을 무사히 치룰 수 있었다.
딸아이가 서너 살쯤 됐을까? 집안 식구들이 곤히 잠들어 있는 새벽 5시쯤이면 전등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 매일매일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놓고 가는 튀김 과자를 부스럭 거리며 오작오작 먹고 있던 귀여운 딸아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혼자 싱겁게 웃어본다. 엄마 아빠가 단 하루라도 산타클로스의 책무를 게을리 하다 딸아이 머리맡에 튀김과자가 없는 날에는 아침부터 난리가 나던 재미있던 시절, 꼬마 벼락대신을 모시고 살기에 조심스럽기는 했어도 나름대로 삶의 보람과 기쁨들이 부족하지 않았던 시절인 것 같았다. 그러든 딸아이가 5살쯤이던가, 마침 리어카에 배경 물을 싣고 집 앞을 지나가던 사진사가 보이 길래 사진을 찍어 주었더니 찍고 난 뒤 난데없이 사진사의 배경 소품 중에 하나인 노란 옥수수를 달라고 울고불고 때를 쓰는 바람에 한참이나 애를 먹은 적이 있었다.
물론 딸아이는 그 옥수수를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알고 달라고 했던 것이었다. 결국 만지고 물어 뜯어보고 먹을 수 없는 소품인 것을 억지로 이해하고 끝이 났던 참 난감하긴 했어도 재미있었던 일이었다. 그랬던 딸아이가 이제 성년이 되어 결혼을 하게 되다니 그야말로 빠른 세월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랜만에 친정에 온 딸아이가 제 결혼식 날 찍은 사진을 보고 " 왜? 아빠는 울려는 표정이야? " 하고 내게 물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마음속으로 대답하였다. 그래 먼 훗날 아빠 나이가 되면 너도 알게 될 것이다. 아마도 네 자식으로부터 같은 질문을 받게 될 것이라고….
그 옛날 서운해 하시는 어머니 마음을 헤아려 드리지 못하고 내가 떠났듯이 이제 아이들이 우리 곁을 떠나는구나! 민들레 홀씨 되어 때 마침 불어온 바람을 타고 홀연히 둥지를 떠나듯이…… 창조 질서에 따라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낮선 곳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또 자식을 낳고 … 또 그 다음 세대에도 그렇게 저렇게 개미 채 바퀴 돌듯이 반복되는 우리의 삶, 오는가 싶더니 곧 떠나버리는 아쉬움으로만 가득 찬 수많은 세상 이야기들, 좀 여유롭다면 벌어 논 재산을 적당히 나누어 관리하여 쓰지만 그렇지 못한 형편이기에 새로운 창출에 의한 수입을 예정하여 계획하고 그 결과에 의해서 나머지 삶을 일구어 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조금은 힘에 벅찬 일일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올지도 안 올지도 모르는 미래의 일을 긍정적으로 믿고 확신하며 한번 밖에 쓸 수 없는 인생을 담보로 열심히 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가슴 벅찬 일인가? 혹 얻을 수도, 잃어버릴 수 도, 그러나 어차피 내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우린 너무 많은 것을 추구하다 그나마 있는 것 조차도 다 잃어버리고 눈물짓는 바보짓을 일삼으니, 그야말로 한 오멜 이면 풍족한 것을 ……. 부족하기는 하지만 아침 마다 아내와 같이 출근하여 며칠 전에 들여온 노후 대책용? 자동기계를 깨끗하게 닦고 조이며 곧 시작될 빵 굽는 사업에 희망을 품고 즐겁게 하루를 시작한다.
도심에서 좀 떨어진 사람들이 많지 살지 않는 작은 동네일지라도, 라일락 향기를 따라 오다 우연히 들를 수밖에 없는 외진 곳이라도, 수더분한 이웃들과 더불어 살 수 있는 동네였으면 좋겠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까치소리 요란할 때, 오랜 친구 기쁜 모습으로 찾아 드는 고향 같은 동네였으면 좋겠다. 온 동네에 빵 굽는 냄새가 구수하게 퍼질 때, 갓 구어 낸 빵으로 가득한 진열장을 기웃거리며 입맛을 다시는 장난꾸러기 좁쌀친구들이 있었으면 참 좋겠다. 그 아이들을 통해서 아름다운 꿈과 선한 마음을 느껴보며 순진한 동심의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동심의 세계에는
믿음이 있고
소망이 있고
언제나 사랑이 샘솟고 있기 때문이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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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
*** 보릿고개 마을에서 ***
글 /豊泉 李祜雨
검게 탄 아낙네의 수줍고 질박한 모습
굳은 살 손마디, 백발 농부의 후덕한 인심
우둘투둘 노란 양재기 보리밥 한 주걱
산나물에 고추장 참기름 두른 비빔밥,
실로 이 땅을 꾸려가는 더없는 自尊이다.
저만치,
소나무 숲에서 날아온 싱그런 피톤치드香
껍데기만 번지르한 낡은 폐부로 스며들어
일상에 구겨지고 얼룩진 靈肉을 씻기우며
대자연이 품고 있는 맑은 精氣를 담아준다.
꺽쇠무리 솟대들,
太平聖代 그 시절을 찾으려
하늘 향한 침묵의 날개 짓에
아암, 그래야지, 산마루 넘던 조각구름
빙긋이 은빛 미소로 화답하는 보릿고개길
天下大將軍 눈을 부라려 세월을 되돌리니
조막때기 운동장을 해가 지도록 누비며
온 종일 허공에 대고 헛발질을 일삼는다.
까만 옛날 벌거벗고 개울물에 미역 감던
반세기 전, 코 흘리게 그 아이들이....
- 終 -
5th,May,2008
라이온스 클럽 봄 나들이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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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
*** 小 白 山 ***
글 / 豊泉 李祜雨
사람이 살만한 산,
하얀 눈옷을
걸쳐입은 소백산
의연히
넓은 가슴을 열어
고운 마음엔
들꽃의 신비스런 향기처럼
험한 세태 메마른 정서엔
배려와 용서로
희미해가는 겨레의
장한 마음을 회복하려
온누리
숨쉬는 공간으로
백두대간의 精氣를
발산시킨다.
경망스레
가파르지않아
쉬운 듯해도
호락호락 다가오지않는
연화봉 오름길
내리막 없는 오르막길
숨이 차오를 때면,
헝클어진 머리에
아지랑이 가득 피운
벗과 마주보는 미소가
더없는 힘이 되어준다.
벗이 있기에
오를 수 있는 산,
벗이 있었기에
절반의 힘으로
오를 수 있는 산,
짊어진 등짐에 슬쩍 묻어온
삶의 찌꺼기는 모두 내려놓고
남아있는 인생길도
도란거리며 함께 걸어갈
좋은 벗을 삼아가는
소백산 연화봉 길,
멀리 보이는
웅장한 산줄기의 굽이침이
비로봉을 가슴에 품고
발아래 죽령을 거느린
우람하고 거대한 몸체임에도
오만한 형상 전혀 보이지않고
큰 자가 지녀야 할 낮은 겸손으로
“ 小白山 ”
그 작은 이름을 갖고서도
묵묵히 백두대간 등줄기를
굳건히 지탱하고있다.
눈 덮인 오름길 언저리마다
겨울잠에 취한 철쭉이
초라한 모습 감추려
하얀 눈가루 뿌려 雪花를 피운
소박한 겨울나무가 되어
지나는 사람들을 반긴다.
저만치 야생화 무리,
문패만 내걸고 보이지않는다.
강인한 생명력 기품 있는 청초한 빛
머릿속까지 스며 들 그윽한 香氣
끊어질듯 말듯 반만년을 이어온
우리네 韓民族을 닮은 듯하여
이름마다 구절구절 애착이 가는
들꽃 무리들
오직 한번의 삶을
그 잘난 자식사랑으로
소진하고
겨우 삼베옷
한 벌 입고 가신
어머니 마음처럼
화사한 봄날을 사양하고
외로운 계절을 혼자 지키다
시드는 구절초(九折草)
하얀 눈 속에서
올망졸망 소곤거리다
긴 잠을 이룬다.
칼바람 허리를 후리고
때론 뿌리째 흔들어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하얀 계절을 넘어 봄을 기다리는
이름모를 들풀들의 숨소리가
소백산 雪原을 가득 메운다.
- 終 -
20th, Jan,2008
www.poongyol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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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
*** 원 적 산 ***
글/ 豊泉 李祜雨
개울 옆
산수유나무 가지엔
서툰 새봄이 마실 와서 졸고 있고,
원적산 정수리엔
한 움쿰 잔설이
봄볕에 녹아 빈 계곡을 적신다.
심술쟁이 봄 바람도
파릇파릇 어린 새싹
보기 민망스러워,
아뿔싸! 남녘 화신 더 오기 전에
벌써 떠난 동장군을 허둥대며 찾아간다.
바람 소리만 무성한 들판
추운 줄 모르고 나생이 캐는
아낙네들 수건 두른 머리에
아주 옛날
정승이 여럿 났다는
이 서방네 묘지기 영감님
주름진 얼굴에도
청솔모 번득이는
소나무 숲에 머물다 온
여린 봄볕이 따사롭게 쏟아진다.
-終-
29th,Mar,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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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8(수필)
*** 어머니와 고향 ***
글/ 豊泉 李祜雨
화려했던 조선시대에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이없이 희생양이 되고만 단종의 어린 넋이 잠들어있는 작은 도시 영월, 푸른 소나무들은 하늘을 향하여 시원스레 쭉쭉 뻗어 오르며 충절의 고장임을 뽐내고 있지만, 수백 년 세월을 굴곡진 역사의 현장에서 지내 왔던 늙은 소나무들은 골 깊은 껍질을 입은 채, 옆으로 굽은 모습이 되어 두견새 울음 소리 가득한 장릉을 지키고 있었다. 마치 그날의 아픔을 잊을수가 없다는 듯이…….
지금은 아스팔트길로 변해버린 옛 능말 길을 지나 코 흘리게 시절 추억이 흐르는 동강에 이르니 울창한 숲속에서 화사한 옷을 입고 동강을 굽어보던 금강정의 아름다웠던 모습도 이제는 무심한 세월에 쓸려 고색 창연한 모습이 되어 낙화암을 지키고 있었다.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 간식거리 칡을 캐려고 올랐던 우람한 봉래산의 명물, 석탄 운반용 케이블카가 뒤뚱거리며 매달려가던 모습도 보이질 않고, 동네 형들을 따라서 콩서리 갔다가 콩은 먹어보지도 못하고 붙잡혀서 혼이 났던 낙화암 고개 넘어 콩밭 할아버지네 초가집도 흔적 없이 사라져 지나온 세월의 무상함을 실감하며 돌아서는 발길을 말없이 흐르는 동강이 석양에 반짝거리며 반기고 있었다.
여우도 죽을 때는 제가 살던 쪽으로 머리를 돌린다고 하던 옛사람들의 말처럼 나이 오십이 훨씬 넘도록 여러 곳을 옮겨 살다보니 특별한 관심이 없더라도 떠나온 고향을 본능적으로 그리워하게 되나보다. 하루 이틀도 못되는 그야말로 몇 시간을 고향의 가족들과 보내기 위하여 어두운 새벽부터 매표구 앞에서 길게 줄을 서서 고향 가는 열차 표를 사기위해 고생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부럽기조차 하니 말이다.
옛날 5대조 할아버지 때부터 뿌리박고 살았던 강원도 횡성을 떠나 부모님을 따라서 찾아온 소나기 재 넘어 영월 땅, 온통 주변은 숲이 우거진 산들이 삥 둘러 도시의 담을 이루었고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신작로를 질주하는 석탄 운반용 트럭들의 굉음소리와 얼굴과 옷에 석탄 검댕이가 묻어있는 광부 아저씨들의 웃는 얼굴은 어디를 가나 쉽게 만날 수가 있었다.
삼팔따라지라고 괄시가 심했던 혼란스런 시절임에도 삶의 중심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다섯 자식들을 키우며 사셨던 나의 어머니 , 말이 가족이고, 말이 백년해로지, 그야말로 풍운아처럼 세상을 사셨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하신 세월이라야 통 털어 햇수로 10 여년 남짓, 그나마 어머니가 누리신 호강이라야 비온뒤 무지개 만큼이나 잠시....
남편 없는 40년간을 北女 특유의 삶의 의지로 철부지 오남매를 키우셨던 어머니, 겉으로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지만 얼마나 고향의 바닷가를 그리며 사셨을까?! 어머니가 고향 청진을 떠나올 때 외할머니와 외삼촌이 생존해 계셨다고 들었었는데 반세기가 넘는 긴 세월 동안 얼마나 보고 싶으셨을까?! 그럼에도 아버지가 있어도 함께 살지 못하는 철부지들 때문에 내색을 할 수도 없으셨으니...,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서 36년간의 치욕의 삶을 살던 그 시절, 열여덟의 어린 나이에 큰 사람이 되겠다고 중국 북경으로 가셨던 아버지께서 조선 사람으론 드물게 자동차 서비스 공장을 운영하여 큰 재산을 모았으나 당시 中共政府의 외국인 추방 정책에 따라 漢族에게 모두 다 빼앗기고 빈털터리로 환국하여 고향에서 정부미를 찧는 도정공장으로 와신상담 재기를 계획하게 되었다. 고향 횡성에 남아있던 잔여 재산을 정리하여 필생의 사업으로 큰 방앗간을 시작했던 아버지는 믿고 신임하던 아랫사람의 실수로 인하여 정부 쌀은 찧어 보지도 못하고 하루아침에 방앗간을 정리해야하는 심각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아버지는 조상님들이 잠들어 있는 고향을 떠나 가족을 이끌고 이웃도시 영월로 이주하여 전혀 경험이 없는 광산업에 종사 하시게 되었고 나 역시 횡성에서 초등학교 2학년을 채 마치기도 전에 아버지의 철광산이 있는 영월의 초등학교로 옮겨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아버지께서는 많은 시간을 철광이 묻혀있는 산속에서 광부들과 일하시다 늦은 밤이 되어야 집으로 돌아오시는 고된 생활을 반복하시며 광산업에 온갖 열정을 쏟으셨다. 어떤 때는 그 다음날 날이 밝기가 무섭게 산에서 캐온 철광석 견본을 들고 성분 분석을 위하여 상공부가 있는 서울로 출장을 가시기도 하였다. 그럴때마다 어린 내 눈에도 무엇인가? 곧 좋은 일이 이루어 질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울 출장이 많은 횟수를 거듭해도 철광석의 성분분석에 좋은 결과가 나오질 않다보니 광산 운영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광산에서는 광부들의 체불 임금 독촉이 심해지며 집으로 여러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 하였다.
한편 이제나 좀 나아질까? 저제나 좀 나아질까? 기다리며 어머니께서 힘겹게 꾸려 나가시던 집안 형편도 점점 더 어려워졌고, 그런 생활이 길어짐에 따라 어머니는 생각다 못해 호구지책으로 한 여름날 마당에 둘러 앉아 호박죽을 먹던 커다란 이동식 마루를 대문 앞에 내놓고 가까운 원두막에서 받아온 과일로 소꿉장난 같은 노점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겨우 열 댓 개 밖에 안 되는 참외와 수박 서너 통으로 시작한 과일 장사가 지나는 행인들과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잘되 나가는 듯하였다. 그러나 너무 규모가 작았기에 생활에 큰 보탬에 되질 안는 것 같아서, 어떤 때는 서울 동대문 시장에서 해온 여성 한복을 받아다가 장사를 하기도 하셨다. 그 덕에 아버지의 별 도움이 없이도 나와 동생들은 굶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비교적 초가집이 많았던 마을에서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운 좋게도 우리 가족은 송판으로 둥그렇게 담을 두르고 대문이 있는 기와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그곳으로 이사하여 얼마 되지 않아서 어머니께서는 출산을 하시게 되었고 고통스런 진통 끝에 이웃 아주머니들의 도움으로 셋째 남동생을 분만 하셨다. 동생을 낳으시고 푸석푸석 부운기가 그대로 있는 지친 얼굴로 자식들의 밥상을 차리기 위하여 부엌으로 들어가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어린 나의 눈에도 몹시 안타까운 모습으로 가슴에 새겨져 있다.
지난봄에 결혼한 딸아이가 시시때때로 엄습해오는 입덧을 이기지 못해 집 사람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임신 초기를 다스리고 있음을 볼 때, 그 시절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이란? 자식을 위해서라면 실로 초인적인 인내와 베풀 수 있는 사랑의 한계를 훨씬 넘어선 모성애의 극치 그 자체였음을 나이가 들어 가족을 거느릴 즈음 깊이깊이 깨달을 수 있었다.
넓은 창문이 뒤뜰로 나 있어서 언제나 훤했던 안방에 갖 태어난 동생을 뉘여 놓고 마루로 나와 다듬이질도 하시고 어떤 때는 후라이팬처럼 생긴 다리미에 숯불을 피워 담아 옷을 다리시던 어머니의 밝은 표정이 괜히 좋았던 그 때가 바로 내 어린 시절의 행복이었음을 회상 해본다. 안방 건너 작은 마루 앞에 손바닥 만 한 화단 맨 앞줄에는 채송화가 오밀 조밀 심겨져 있었고
무슨 사연이 있는 듯 자주 빛 얼굴에 수줍은 듯이 목을 떨군 채로 서있는 맨드라미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봉숭아가 무궁화 꽃 옆에서 무리지어 피어 꽃밭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문지기처럼 대문 옆에 지켜서있는 해바라기는 어찌나 얼굴이 넓은지 가을에 추수하여 새봄이 올 때 까지 두고두고 간식거리로 먹곤 하였다. 가끔 생쥐란 놈이 등장하여 잘 가꾸어놓은 꽃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그것도 모자라서 참기름 병이 들어있는 부엌의 찬장까지 노략질을 하는 바람에 온 식구가 빗자루와 부지깽이를 들고 시루 뛰고 가루 뛰고 난리 법석을 치곤하였다. 비록 깨끗이 정돈된 새 집은 아니었지만 밤이 되면 등잔불을 쉽게 볼수 있었던 시절에 그래도 전깃불이 들어오는 기와집에 살고 있다는 사실만해도 그런대로 행운이며 자랑이 아닐 수 없었다.
황해도 사리원이 고향이며 청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삼팔따라지, 나의 어머니, 나이 사십에 혼자 되셔서도 올망졸망 오남매를 하나도 잃지 않고 다 길러내신 나의 어머니, 작은 체구였지만 北女다운 강한 삶의 의지와 커다란 사랑을 품고 사셨던 나의 어머니,
어머니가 이 세상에서 여든 한해를 머무시는 동안에, 가득한 한스러움을 믿음의 생활로 절제하며 오직 남편과 자식들을 위한 헌신의 삶이었음을, 내가 부모 되어 사는 중에 더욱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일찍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로 인하여, 불효하는 못난 자식들로 인하여, 당신 육신의 질고로 인하여 고통 하실 때에도, 세상의 어느 누구를 의지하지도 원망하지도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만 여기며 감내 하시던 내 어머니의 겸허하신 모습을 생각하며 어려움에 처할 때 마다 새로운 힘을 얻곤 한다. 서울로 출장 가셔서는 딴 살림을 차려 몇 년이고 오시지 않던 아버지도 용서하시고, 함께 살고 있던 작은 엄마도 가슴에 품으시며 이제 어쩌겠냐며 함께 살자고 하시던 어머니의 강한 모습 뒤에 가려져 있던 인정 넘치는 여린 마음과 눈물, 그 눈물을 볼 때 마다 깊은 뜻도 모르는 어린 나도 어머니와 함께 많이 울며 어린 시절을 보냈었다.
내겐 형이나 누나가 없었기에 힘들 때도 많았지만 반면에 무엇이든 스스로 해결하는 의지를 자연스레 키울 수가 있었다. 그렇다보니 의젓하다는 말을 많이 듣곤 하였지만 그러나 그 의젓함 뒤에는 깊은 가을날 해 저문 오솔길을 혼자 거니는 것 같은 숨겨진 외로움을 쉽게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다름 아닌 삶의 주변에서 쉽게 느끼게 되는 “ 왜? 나는 외갓집이 없을까?”하는 外家에 대한 소외감을 좀체 극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 같은 응석받이 이모를, 친 손자는 걸려가고 외손자는 업고 간다는 외할머니의 따뜻함을 누려 봤으면 하는 것이 어린 나의 본능적 바램 이었지만 왠지? 내게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적당히 잊어가며 사춘기를 지내왔다.
그럼에도 외갓집이라는 명사를 한번 도 써 본적이 없는 허전함과 아쉬움을 지금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마도 북녘의 친정집을 그리워 하시면서도, 자식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아무렇지도 안다는 듯이 미소로 가려 놓으셨던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을 내가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그러기에 이 땅위에 머무는 동안 북녘에 외가 식구들을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 왜냐하면? 언제일지 모르는 훗날에, 어머니를 만날 때 외갓집 안부를 전해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여름 방학이 되면 나는 영월 경찰서 뒷마당에 키가 큰 벚나무에 올라가서 혼자 놀기를 즐겨 했었다. 무더위라도 쫓으려는 듯 바르르 떨며 한 여름을 노래하는 말매미의 신기한 모습을 볼 수도 있고 무성하게 열렸던 까만 열매를 따먹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작은 엄마에게 집을 내주고 춘천 아저씨 댁으로 쫓겨 가신 “엄마”를 생각해보기도 하고 참다못하면 혼자 울어 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든 어느 날 벚나무 아래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며 나무 위의 나를 찾고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작은 엄마가 나를 부르시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다. 이야기인즉 춘천에서 어머니가 오셨다는 기쁜 소식이었다. 나를 만나 보시고 바로 가셔야 하기 때문에 빨리 집으로 가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왈칵 터져버린 울음을 억지로 참으며 집을 향해서 달려가기 시작 하였다. 방에도 들어가지 않으시고 누이동생과 함께 마루 끝에 걸터앉아 기다리시던 어머니 품에 안겨서 소리 내어 흐느껴 울었다. 오랜만에 모자가 함께 세월의 야속함을 원망이라도 하는 듯 한참이나 울고 그간의 쌓인 엄마 와 아들 간에 이야기를 다하기도 전에 야속한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어머니가 떠나야할 시간이 다가왔다. 떠나는 어머니 마음에도 남아있는 어린 아들의 마음에도 견디기 힘들었던 생이별의 아픔,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비로소 어머니께서 영월 생활을 정리하시고 동생들과 함께 서울로 아주 이사를 오면서 끝이 날수 있었다. 물론 아버지께서 長男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 어떠셨던 간에 엄마와 자식을 떨어져 살게 한다는 것은 가슴 아프고 견디기 힘든 일이라는 것을 느끼셨기에 보릿고개 같은 어려운 시기임에도 어머니와 오남매가 함께 살 수 있는 작은 셋집을 동대문 밖에 구해 주시며 늦게나마 아버지의 몫을 다하시려 노력하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육신이 멀쩡하셨던 지난 세월에는 가엾은 어머니를 버려두시고 집 밖에서 인생을 탕진하셨던 아버지께서도 결국은 회복 할 수 없는 육신의 질고로 만신창이가 되셔서야 집으로 돌아오셨고 결코 둘 일수 없는 조강지처의 눈물어린 보살핌 속에 나그네 같은 파란만장의 生을 마감하신 것이 1965년 4월의 어느 날 내 나이 열여섯 살 때의 일이었다. 그 후로 혼자되신 어머니는 사십년 넘게, 아버지께서 남겨주신 가난을 타고 난 부지런함으로 이기시며 먼저 가신 아버지의 기일을 단 한번 이라도 잊은 적이 없이 챙기셨고 부족한 자식들을 위한 기도와 헌신으로 부끄럽지 않은 노년을 보내시다 2004년 5월 23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자식들의 임종을 받으시며 정들었던 교우들의 찬송과 축복 속에 슬픔도 없고 아픔도 없는 영원한 기쁨의 나라 천국으로 오르셨다.
남편과 자식에 매여 힘겹게 살아온 인생 여정의 끝자락에서
예수 믿는 맏며느리를 받으시고
온전히 예수님을 영접하셨던 어머니,
지나온 고난에도 감사,
못난 자식 주심에도 감사,
회복 할 수 없는 깊은 병에도 감사하며
이제 막 꺼져가는 숨결 중에도
병원 복도에서 들려오던 찬송 소리에
환한 표정 지으시며 긴 세월 오는 동안
생명처럼 챙기시고 거둬 주셨던 오남매를 뒤로한 채
영원한 처소, 하늘나라로 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이 글을 적는다.
이번 설에는 무작정 고향을 다녀오리라,
아무도 기다리는 사람이 없을지라도
아내와 둘이서만 이라도 꼭 고향을 돌아보리라,
아주 까만 옛날,
가을 운동회 하던 날 달리기를 하다가
입고 달리던 팬티 고무줄이 끊어져서
발가벗고 뛰었다는 내 어린 시절 전설 같은 이야기가,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유효하게
즐거운 웃음거리로 전해지고 있는 횡성읍을 지나서,
어디엔가 어머니의 발자취가 남겨져 있을
치악산 뒷자락 월현리를 돌아,
그 옛날 아버지께서 씨름 장사가 되어
황소를 끌고 오셨다는 둔내를 거쳐,
어쩌면 나의 자식들 대에서는 소설속의 이야기쯤으로
잊혀지고 말 것 같은 옛 고향의 얼을
가슴에 가득 담아 개선장군처럼 돌아오리라,
-終-
12th, Jan,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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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
*** 경사리 사람들 ***
글/ 豊泉 李祜雨
아마도 이십 여 년 전의 일인 것 같다. 집안 대대로 지켜왔던 고향의 先塋이 어느 날 갑자기 군부대 사격장으로 지정되어서 移葬을 해야 된다는 비보를 국방부로부터 접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날벼락 같은 소리에 친척들이 모여 여러 날을 의논한 끝에 각자 집안의 부모님만 공원묘지로 移葬을 해 드리고 조부모님 과 그 윗분 들은 화장하여 선영 앞을 흐르는 개울물에 띄워 드리기로 결정하였다.
그곳에서 태어나 天壽를 다하셨고, 처음 밟았던 그 흙으로 돌아가신 조상님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 드리는 것 자체가 그 분들의 永眠을 헤치는 것 같아서 熟議 끝에 靈魂 만이라도 고향 땅에 永存하시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 결국 어머니가 준비 하신 하얀 명주 보자기에 아버지의 유골함만 정성껏 싸서 가슴에 안고 고향 땅을 떠나 경기도 마석의 공원묘지로 옮겨 모시게 되었다.
그 후 삼십 년이 다 되도록 내 마음 속에 “ 낯선 곳에 누워 계시는 아버지를 모셔다 가족 묘지를 다시 만들어야지.”라는 희망 사항은 空轉만을 거듭하며 여러 해를 지내 왔다. 그러나 이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사십 년을 홀로 지내셨던 어머니 마져 떠나셨다 지금은 멀리 떨어져 계신 두분이 한 울타리 안에서 안식하실 수 있는 유택을 어서 마련해 드려야 할텐대 아직 때가 이르지 못해 마음만 졸여진다. 솔직히 내 마음속의 알량한 효심 보다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공짜로 달고 왔던 “장남 ”이라는 허울이 지닌 先天性 의무감 때문이기도 하고, 또 다른 이유는 험한 세상 바람에 아무렇게나 허물어져 버린 父母님 代의 복잡한 집안 風潮를 바로 잡기 위해 “나”로부터 아픔을 자초하는 반성과 성찰의 계기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허기야 잘 된다 할지라도, 나도 흙으로 돌아간 먼 훗날 어디 쯤 일 탠데 , 후손 삼사 대가 지나간 백 년 후에라도 괜찮은 집안으로 불리어 졌으면 하는 바램이 지나친 욕심일까?!
아니면 턱없는 망상일까? 名門家를 꿈꾸는 百年大計의 훼밀리 프로젝트가….
그러나 스스로 다짐했던 그 결심도 사는 동안 쉴 새 없이 엄습해 오는 불가피한 일들로 인해 뒤로 순연되어 여전히 희망 사항으로만 남겨져 있는 것이 늘 안타까울 따름이다. 허기야 백 년 프로젝트가 당장 숨 넘어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늘은 경사리 근처에 가족 묘자리로 적당한 자투리땅이 매물로 나온 것이 있다 하여 그 내용을 알아 볼 겸 마을을 잘 아는 사슴 농장 집 아주머니를 찾아가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고 나오는 길에, 화재가 났던지 불에 타다 검게 그을린 廢家 앞을 지나게 되었다. “아니, 저 집은 불이 났었나 봐요? “ 마을을 안내하겠다며 따라 나온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 네, 작년에 불이 났었지요.” “ 바로 저 집에 사는 사람이지요.” 대답하며
손가락으로 몇 집 건너 조립식 패널로 깨끗하게 지어진 새집을 가리킨다.
“ 더구나 작년엔 사회적으로 모두가 어려웠던 시기였는데, 설상가상 불까지 났으니 참,” 내가 말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주머니는 “ 그래서 마을에서 새로 지어 주었지요.” 라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마을에서 집을 지어 주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쉽게 이해하질 못했다. 그러자 내 마음속이라도 꿰뚫어 보는 듯, 빙그레 미소를 머금은 사슴 농장 집 아주머니는 다시 말을 잇는다. “ 우리 마을 경사리 에서는 옛날부터 마을에서 화재로 인하여 재산을 잃은 사람에게는 마을 사람들이 十匙一飯 마음을 모아서 그 사람에게 새 집을 지어 주는 전통이 있지요. 이웃 간에 따뜻한 정이 아직도 살아있어 그런대로 살만한 마을이지요. 그러니 아저씨 네도 잘해서 이곳으로 이사를 오세요!” 라고 말 하며 글자 그대로 후덕한 인심 속에 여유론 삶을 살아있는 경사리 마을의 주민답게 환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연초에 부푼 마음으로 벽에 걸었던 두툼한 달력도 이젠 다 떨어져 나가고 달랑 한 장 남아 올해를 지키고 있다. 꽤 긴 것 같은 일 년이었는데 어느새 년 말이 다가 왔으니…., 그 동안 나는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 혹 나만 살자고 내 이웃을 밟고 일어서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우연히 라도 남의 가슴에 못질은 하지 않았었는지? 스스로를 돌아 봐야 하는 반성의 계절이 저 만치 우리 앞에 와 있다.
병약한 몸에 벌이가 시원치 않아 추운 겨울에도 불을 지피지 못하고 살아가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연탄 나눔 운동에 구슬땀을 흘려 봉사하는 작은 사람들, 그들은 엄동설한을 녹이는 진정한 빛의 사람들 이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온 세상이 군불 땐 아랫목처럼 따뜻한 사랑으로 가득 채워지리라 믿는다.
깊은 밤, 소리 없이 쌀가마 선행을 하고도
끝내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던 나눔의 사람들,
그 들이 있었기에 내일도 밝은 해가 뜰 것이라 확신한다.
뜻하지 않은 화재로 가진 것을 다 잃고 힘들어 하는 이웃을
일으켜 세워 더불어 살아가는 고운 마음의 경사리 사람들,
그 사람들이 있기에 여전히 세상은 아름답게 지탱되어 갈수 있었나 보다.
오랜만에 느껴본 뿌듯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가을 하늘이 새삼 아름답게 느껴지는 원적산 오름 길, 구름 뒤에 숨어있던 해님도 살포시 얼굴을 내 밀어
메마른 대지 위로 따사로운 가을볕을 내려 쬐고 있었다.
-終-
26th, Nov,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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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 가 을 ***
글 / 豊泉 李祜雨
매미소리 뜸해진 두충나무숲
해가 지면 鄕愁처럼 스며드는 가을 香
끊어질 듯 말 듯 귀뚜라미 가슴앓이에
강아지풀 고개 숙여 歲月如流 歎息해도
철부지 밤송이 秋月을 먹으며 익어간다.
- 終 -
30th,Aug,2008
이상 동인지 원고 10편을 올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파안대소~얼굴 사진이 멋진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