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과 아귀찜
박 설 희
한 편의 시를 찾기 위해 지난 겨울호 계간지들을 읽는다. 대다수의 문예지들은 2009년 겨울호 특집으로 21세기의 첫 십년을 정리하는 지면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 공통된 의견은, 미래파를 포함한 새로운 일군의 시인들이 등장했으며 전통의 서정시와는 다른 언술과 화법으로 파편화되고 분열된 현재의 삶을 드러내주었다는 것이다. 감각적인 그들의 시는 환상, 그로테스크, 익명성의 양상으로 전개되었으며 소통부재의 난해시라는 내용이었다.
삼십여 권 가까운 문예지들을 읽어가는 가운데 점차 의아심이 고개를 든다. 오랜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모 계간지의 경우엔 특정 대학교와 관련된(교수거나 졸업생이거나) 시인들의 원고 게재가 절반을 웃돌 정도로 학교 편향이 심했다.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학벌과 연고주의가 문단에서조차 더욱 뿌리 깊다는 의미일까.
또한 문학의 생산과 소비의 양태가 대중문화를 닮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든다. 오스카 와일드가 말했듯이 옷에 유행이 있는 것처럼 예술에도 유행이 있어 누구도 유행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건지……. 새로운 시인이 등장한다. 그는 너무도 뜨겁게 환대를 받으면서 유명 인사가 된 끝에 어느 날 갑자기 무대 뒤로 사라져 가는 것이다. 문단 바깥에서 보면 그들끼리의 열광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기이한 현상들.
갑자기 어젯밤 꿈이 떠오른다. 무슨 이유에선지 시장을 배회하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함지에 그득 담긴 채소, 리어카에 실린 과일, 구멍가게에 쌓여 있는 생선들……. 그 색깔과 냄새가 지금도 생생하다. 꿈 속 거리에서 죽음의 냄새를 한동안 계속해서 맡은 적이 있다. 발길 닿는 곳마다 주검이 놓여 있어서 날마다 누군가의 문상을 가는 형국이었다. 그 죽음들에 진저리가 쳐져서 그런 꿈을 그만 꾸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는데 이젠 매일 밤 시장을 배회하는 꿈을 꾼다. 내 무의식에까지 시장과 자본이 밀려 들어왔나 자괴감과 경각심이 들던 차였다. 아마 그 때문에 문단의 이모저모가 더 부정적으로 비춰지기도 했으리라.
이쯤에서 차를 한 잔 마신다. 창 밖, 밭의 잔설 사이로 종종 걷던 새들이 무엇에 놀랐는지 일제히 날아오른다. 잠시 후 내다보니 어느새 다시 내려앉아 있다. 결국엔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내 고민이 앞서니 작품이 제대로 눈에 안 들어와 다시 읽기 수차례. 드디어 한 작품에 시선이 고정된다.
시에 대해서 쓴 시가 있고, 시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시가 있다. 박철 시인의 「버리긴 아깝고」는 후자에 속한다. 싱겁다고 그냥 넘어간 시. 다시 읽어보는데 내 속에서 갑자기 말들이 반향을 일으킨다. 그 말들은 어느 구석에서 얌전히 숨어 있다가 제 짝을 만났다는 듯 와글와글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아마 문학에 관한 내 고민거리와 연관되어 시사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리라. 특별한 수사나 미학적 장치가 없으면서 시집을 둘러싼 밥집 아주머니와의 에피소드가 주된 내용인 시이다.
버리긴 아깝고
박 철
일면식이 없는
한 유명 평론가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서명한 뒤 잠시 바라보다
이렇게까지 글을 쓸 필요는 없다 싶어
면지를 북 찢어낸 시집
가끔 들르는 식당 여주인에게
여차여차하여 버리긴 아깝고 해서
주는 책이니 읽어 보라고
며칠 뒤 비 오는 날 전화가 왔다
아귀찜을 했는데 양이 많아
버리긴 아깝고
둘은 이상한 눈빛을 주고 받으며
뭔가 서로 맛있는 것을
주고받은
그런 눈빛을 주고받으며
(『시에』2009년 겨울호)
시집이 나왔을 때 가까운 지인들에게 시집을 보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일면식이 없는 / 한 유명 평론가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서명한다는 구절에서 절로 웃음 짓게 된다. 시집을 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와 같은 상황을 겪어봤을 것이다. 아마 그런 심리의 밑바닥에는 유명 평론가의 권위에 힘입어 자신의 작품을 더 많이 알리고 인정받고 싶다는 무의식이 작용한 것일 수도 있겠다. 첫 작품집을 내놓은 신인일수록 잘 모르는 분들에게 작품집을 보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보낸다면 누구에게 보내야 할지 더 많이 고민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박철 시인이라면 등단 20여년이 넘은 문단의 중견이다. 이미 여러 권의 시집을 상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갈등을 한다는 것은 시인들이 평론가들에게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면이다.
시의 착상과 동기와 목적 어디에도 평론가는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러나 작품이 발표된 후의 평론가의 작용은 지대하다. 숨은 의미를 읽어내고 의의를 부여하고……. 평론가는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매개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면서 또 하나의 창작품을 완성하는 셈이다. 그래서 작품은 발표 후에 재탄생한다. 그들의 작업이 중요하다 보니 기대치도 높기 마련이어서 종종 다음과 같은 불평이 나오기도 한다. 너무 서구 이론의 틀에 맞춰 작품을 재단하는 것은 아닌가, 작품보다는 이름에 대한 선입견이 작용한 건 아닌가, 이론을 적용시키기에 좋은 작품만 골라 평하는 건 아닌가, 자기만의 방법론이 필요한 건 아닌가.
물론 나는 평론가의 노고를 부정하지 않는다. 평론가의 권위 앞에서 자꾸 초라해지는 시인의 자화상을 부정하고 싶을 뿐이다. 주변의 반응과 평가에 아랑곳 않고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면서 꾸준히 정진하는 선배 시인들의 모습이 그래서 더욱 가슴에 와 닿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서명을 잠시 바라보던 시인은 거기서 어떤 굴욕감을 느꼈던 것일까. 하여튼 그는 이렇게까지 글을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면지를 찢어낸다. 그러면서 자존감을 회복한다. 시인은 면지를 살살 찢는 것이 아니라 “북” 찢어낸다. 미련을 없애듯이 단번에.
그리고는 가끔 들르는 식당 여주인에게 “여차여차하여 버리긴 아깝고 해서” 주는 책이니 읽어 보라고 시집을 건넨다. 왜 하필 식당 여주인을 떠올렸던 것일까? 자신이 시인임을 알고 있는 그녀가 과거에 문학소녀였을 수도 있겠다. 아님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걸까? 시를 끝까지 읽어보면 시인의 무의식이 그리 하라고 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며칠 뒤 비 오는 날 전화가 온다.
“아귀찜을 했는데 양이 많아 / 버리긴 아깝고”
시인이 시의 전문가라면 식당 여주인은 음식의 전문가이다. 게다가 아귀찜이다. 아귀찜은 갖은 양념에 버무려 익히면 살이 부드럽고 맛있어 누구나 즐겨 먹는 음식이다. 하지만 요리 방법이 쉽지 않아 음식 새내기들은 엄두를 내지 못하는 음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귀찜’ 하면 살집 풍성한 중년의 여인을 떠올리게 된다.
식당 여주인은 능청스레 화답한다. “버리긴 아깝고”. “버리긴 아깝고” 라는 전제로 주는 것은 대체로 주는 쪽에서나 받는 쪽에서나 별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집에 대한 답례로 아귀찜을 준비했고, 화자 역시 사양 않고 곧바로 식당으로 간 듯 하다.
결국 둘은 자신의 작품을 서로 선보인 셈이 됐다. 그리고 “뭔가 서로 맛있는 것을 / 주고받은 / 그런 눈빛을 주고받”는다. 식당 여주인이 시집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는 모르겠다. 그 중에 한두 편의 시를 읽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뭔가 “서로 맛있는 것”을 “주고받은” 그런 눈빛을 주고받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맛있는 것을 주고받고, 눈빛을 주고받는다. “버리긴 아까운” 시집과 “버리긴 아까운” 아귀찜을 통한 교감이 이루어진다. 서로의 작품을 맛보면서 소통의 폭을 심화 확대한다.
일면식이 없는 유명 평론가에게 갈 뻔한 시집. 만약 원래 계획대로 발송이 됐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시인의 찜찜한 마음은 제쳐두고라도, 전달되지도 못하고 어디론가 사라지거나(종종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서재의 숱한 책 사이에 끼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거나 아님 정중한 대우를 받으며 이지적인 눈망울을 마주 보고 있을 수도 있겠다.
시집 한 권에 들어가는 시는 대략 오륙십 편. 이삼 년에 한권씩 시집을 묶는 시인도 있지만 대부분은 최소한 삼년에서 길게는 십년 정도 걸린다. 자연히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따뜻한 물 한 잔을 마시며 곰곰 생각해 본다. “맛있는” 시는 어떤 시일까? 조미료가 많이 들어가지 않아 담백하고 신선한 재료를 써서 질감이 살아있으면서도 향이 좋은 시. 감칠맛이 나면서 뒷맛이 개운한 시. 그리고 몸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는 데 에너지가 되는 시.
이 한 편의 시를 읽으며 나는 미각을 만족시킬 뿐 아니라 포만감과 은밀한 눈짓까지 주고받게 하는 시를 쓰고 싶다는 소망을 가져 본다. (<시와문화> 2010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