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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결심
어둑해진 마당에는 능금나무 가지 사이로 저 멀리 서쪽 하늘에는 둥지를 찾아가는지 새 한 마리가 횅하니 스쳐 지나간다.
저 새도 집을 찾아 하늘 길을 나는데 나는 지금 집을 나선다. 어둑한 밤하늘을 혼자 집을 찾아 날아가는 저놈도 나처럼 외롭지 않을게야 희미하게 보이는 하늘의 별들도 모두 혼자 외로이 반짝이는 것을 보니 무언가 전하고 싶은 말들을 전할 수 없으니 저렇게 반짝이며 자기 마음을 알리는 것은 아닌지 하늘의 별마저 외롭게 보인다.
나무와 철사 줄로 얼기설기 엮어놓은 문이랄 것도 없는 문을 밀고 자갈돌로 다져진 길에 나왔다. 왼쪽으로 돌아 산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긴다. 가면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오빠의 도움으로 대학 진학은 어림없다. 어떻게 하더라도 방범을 찾아야 한다. 길을 걸으면서 이 생각 저 생각 나래가 되어 먼 허공을 가로지른다.
어쩌면 방법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궁리를 해본다. 이젠 집에서 학교 다니는 것도 귀찮은 생각이 든다.
가족이면서도 마음에도 없으면서 억지로 웃으며 대하는 올케의 말대가리 같이 생긴 그 긴 얼굴 보는 것도 괴로움이 될 것만 같다.
매사에 정하나 없는 오빠의 근엄한 얼굴 천과 솜으로 만든 포건 한 인형이 아니라 핏기 하나 없는 하얀 밀랍 인형 같은 모습을 보는 것 또한 유쾌한 일은 아니지 싶다.
길을 걸으면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바다의 파도처럼 저 먼 수평선에서부터 밀려오는 것 같다.
어느 듯 오르막길에 다다랐다. 계속 가면 높은 고개를 지나면 떨어진 곳은 아니지만 면이 다른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낯선 지방이다. 오른쪽으로 가면 밤나무가 숲을 이루고 못이라 하기는 규모가 작은 웅덩이가 있다.
이젠 제법 깜깜한 밤이다. 하늘에 별은 더 많고 더 밝게 빛을 낸다. 이젠 별 따라 길을 가는 것이 편하다 오른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이곳은 그의 인적이 없다. 무섭기도 하고 조용하기도 하다. 천천히 걸어가면서 이 밤에 여기에 나 외에 사람이 올 일도 없으니 괜찮겠지 생각하지만 조그마한 소리에도 귀가 쫑긋한다.
더 가기에는 아무래도 겁이 난다. 왔던 길을 되 뒤돌아 나온다. 걸음을 빨리하여 강으로 향한다. 집에서 입는 채로 나왔다. 11월 하순이지만 밤바람이 차다. 그래도 견디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다. 강에 가서 흐르는 물을 보고 있노라면 무언가 생각이 정리되겠지 아니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겠지 천천히 걸어가든 발걸음을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바꾼다. 면사무소 쪽 불빛이 강을 비춘다. 강물에 비췬 불빛이 월주(月柱)가 되어 미풍에도 설의 마음 같이 바다의 조그마한 파도 모양 일렁인다.
둑에 앉았다. 서쪽 밤하늘에 높은 산이 시꺼멓게 하늘과 접해있다. 시꺼멓게 변한 산 위에 별들은 수를 놓은 듯 반짝이며 보였다. 아니 보였다. 가만히 있지 못한다. 바람 따라 흐르는 외톨이 구름들이 지나다니며 별빛을 막으며 훼방을 놓는다.
무수한 많은 크고 작은 별들 그중에서 밝게 반짝이는 별 하나를 보며 말을 걸어본다.
너 이름은 머니 너 있는 곳은 좋으니 어떻게 하면 너 있는 곳에 갈 수 있을까? 바람에 움직이는 구름 타고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면 훨훨 날아다니는 새들 중에 가장 빠른 제비를 타고 갈 수는 없을까? 아니면 마음이 가면 몸은 여기 있지만 벌서 가 있는 것이 아닌가? 물질의 이동에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지만 마음의 이동에는 그 무엇도 필요치 않을 것이다. 올려다본 밤하늘의 별과 별 사이는 얼마 되지 않은 거리인 것 같다. 훌쩍 뜀박질하면 건너갈 수 있을 것 같다. 내 손가락을 걸치면 다 닿는 자리에 있다. 오늘 저녁 이 밤에 여러 별을 가 봐야겠다. 훌쩍 또 훌쩍 계속 뜀박질한다. 한동안 설은 강둑에서 만사를 잊고 별들과 즐겁게 이야기하며 생각을 정리한다. 이별 저 별 방문하기도 하고 아픈 마음을 틀어 놓기도 하며 하소연하기도 한다. 머리를 돌려가며 온 하늘의 별을 다 올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별과 이야기하기는 처음이다. 설이 가슴을 열어놓고 답답한 마음을 이야기하면 어느 별도 거절하는 법 없다. 환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 알아들었다며 이해한다며 속이 많이 상하겠다며 그러면 그렇지 어련하겠느냐며 다 잘 될 것이라며 반짝반짝 대답을 한다. 지금도 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듣고 밝은 얼굴로 반짝이며 대답을 한다. 고개를 돌려 북쪽 하늘을 본다. 내가 아는 별이라곤 북두칠성밖에 없다. 일곱 개의 별이 아라비아 숫자 7 과 같은 형태로 자리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인가? 첫 별부터 마지 막 별까지 말을 걸어본다. 일곱 개의 별이 하나같이 말을 한다. 설아 네가 계획했던 대로 하여라 길이 있을 것이다. 지금 용기를 잃어 주저앉으면 영원히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네 같이 젊을 때 활화산같이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불이 활활 타오르듯 할 때 가장 힘이 있고 용기가 있으며 뜻 한 바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확률이 가장 높은 것이다. 주저하고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고 뒷걸음치며 겁부터 내면 이루어질 것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부딪쳐 보는 것이다 시작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방법이 생각나며 해결의 실마리가 잡히는 것이다. 처음부터 무엇이나 다 잘 알고 잘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다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해결하면서 이루어 가는 것이다. 공부도 그렇고 일도 다 그러하단다. 처음 생각하던 대로 얘기하고 도움을 청해보고 기어이 안 된다면 너 혼자 힘으로 해결하도록 한 번 시도해보아라. 시작이 반이란 말도 있다. 설은 별 하나 나 하나 아니고 별 하나에 물어보면 대답이 하나 별 둘에게 물어보면 대답은 둘 점점 방은 깊어간다.
어느 별 하나를 가리키며 별 하나 자신의 가슴 만지며 나하나 이번에는 자신의 가슴을 만지며 설은 설 둘 하면서 다시 우르르 하늘을 본다. 설의 눈엔 별이 너무 많다. 아래로는 줄이 되고 옆으로 비켜난 유독 빛나는 일곱 개의 별을 본다.이번에는 북두칠성을 세며 북두칠성 일곱 하다. 울먹인다.어느 여름날 더위를 피해 아버지와 함께 과수원 거닐다 들려주신 북두칠성에 대한 아비지의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옛날 우리 고장에 정 몽주라는 선비가 살아 섰다. 이 정몽주라는 선비가 태어나실 때 얘기라면서 한 아기가 태어났는데 아이의 어깨에는 마치 북두칠성의 모양으로 일곱 개의 검은 점이 늘어서 있었다. 이 일곱 개의 점은 분명 범상한 일이 아니다. 하나의 점도 해석하기에 따라 사람의 운명을 길흉으로 가르며 예측하기도 하는데 이 일곱 개의 점은 분명 한나라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영웅이 될 인물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고려 말 이 성계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어떻게 형제의 나라 그러니까? 형의 나라인 명나라를 칠 수 있느냐며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정적인 최영 장군을 죽이고 이 성계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하게 하기 위하여 이 방원 후에 태종이 된 고려 말 충신 정 몽주의 마음을 떠 보기 위하여 하여가를 읊는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萬壽山)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 같이 얽혀서 백 년(百年)까지 누리리라”
물음에 포은 정 몽주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 단심가를 읊으신다. 그 유명한 단심가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는 기우러가는 고려를 목숨을 걸고 끝까지 지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충절의 의인이신 포은 정 몽주 선생이 우리 고장 출신이니 얼마나 자랑스러운 인물인가라며 덫 붙여 그때 이 성계가 최영 장군의 뜻을 받들어 몽골의 칭기즈칸 같이 기마병으로 하여금 전광석화로 정신 차릴 틈을 주지 않고 명나라를 정벌하였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한 번도 남의 나라를 쳐들어간 역사가 없는 것이 자랑 이냥? 가르치는 우리 역사에 적어도 단 한 번의 정벌의 역사로 기록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더욱 국토가 작고 인구가 적은 나라는 큰 나라와 싸움을 하면 진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은 것은 칭기즈칸의 대륙 정벌과 유럽까지의 진출은 이것을 증명하고도 남는 것이다. 지금도 이와 같은 논리는 이스라엘의 중동 전쟁이 그것을 말해준다. 얼마 되지 않은 인구이지만 살고 있는 사람들이 똘똘 뭉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면 천지간에 무서운 것 없다.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각오로 싸움에 임하며 어떤 머리로 싸우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아마 그때 대륙 정벌의 꿈을 이루고 만주 땅을 영원한 우리 영토로 만들었다면 지금과 같이 약소국이 받아야 하는 설움 따위는 없을 것이다.(미사일을 만들면서 대국의 눈치를 보는 따위의 일은 아니 허가를 받아야 하는 설움은 없을 것이다.)
설은 아버지의 그 말씀을 머리에 떠 올리며 다시금 아버지 계시지 않은 처지를 생각하며 슬픔에 잠긴다.
방천 둑에 펑퍼짐하게 앉았던 자세를 고쳐 무릎을 세우고 앉은 자세를 풀고 일어난다. 내가 지금 몇 시간째 이러고 있었던가? 왔던 길을 되돌아 집에 왔다. 어머니 방의 불도 꺼져있고 오빠 내외의 방에도 불빛은 보이지 않는다. 자기방의 방문을 열고 슬며시 들어간다. 방안에는 초등학교 다니는 조카 정훈이의 고른 숨소리가 들어온다. 어쩌거나 효과는 없었지만 자기를 도와주려던 조카 정훈이의 마음에 한 없이 고마움을 느끼면서 자기의 마음을 한결 어루만져주어 눈물이 나는 것을 참는다.
정훈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으며 조카 옆에 슬며시 몸을 밀어 넣으며 이불을 댕겨 덮는다. 잠은 오지 않고 깜깜한 천장을 응시하며 또다시 깊은 생각으로 자신을 몰아넣는다.
여럿 식구들이 둘러앉아 저녁 밤을 먹으면서 나누던 이야기를 다시금 생각해본다. 이젠 집의 도움으로 대학을 간다는 것은 포기해야만 했다. 완강한 오빠의 고집을 꺾을 사람은 우리 집에는 아무도 없다. 엄마가 계시기는 하나 가정경제는 오빠의 수중으로 넘어 간지 오래고 엄마는 단지 엄마라는 이름으로 뒤 방 늙은이로 밥이나 축내는 사람 정도로 취급되고 있을 다름이다. 설은 자신이 대학을 못 가는 아픔보다도 엄마가 계시는데도 아무 말씀 한마디 할 수 없으시며 더욱 며느리까지도 무시하는 듯 하는 행동은 더욱 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래도 어쩔 것인가 엄마를 옹호하며 투쟁할 수 는 더더욱 할 수 없는 일 어차피 싫으면 떠나야 하는 것 무거운 절 보다 가벼운 중이 떠나는 것이 낫다는 옛 말과 같이 내가 떠나야 하는 것이 백번 옳은 길이다 결론을 내린다.
쌕쌕 그리며 자는 조카 정훈이의 옆에 누워있던 자신의 몸을 움직이며 이불을 머리 위까지 당긴다.
이 밤을 지내고 나면 나는 언제 또 오늘과 같이 잠자리에 들 수 있을까? 생각하니 쉬이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그래도 억지로라도 잠을 자야지 하면서 잠을 청해 본다.
음산한 날씨였다. 설은 조그마한 가방에 옷을 주섬주섬 챙겨 넣고 어머니 앞으로 편지를 한 장 써서 어머니 담배 삼지 주머니에 넣어두고 아무도 없는 날 집을 나왔다. 엄마에게는 말할 수 없는 불효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지 않고는 자신의 꿈을 펼칠 기회마저 잃어버리고 말 것이라 생각이 든다. 누가 최선이 아니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차선을 택하는 용기도 있어야 한다고 말 했다.
설은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 내가 생각한 이 결행은 최선의 방법은 아닐지 몰라도 차선임에는 틀림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며 확신을 시킨다. 오빠는 분명 고등학교 졸업하면 집에 가두어 놓고 올케 언니를 도우며 집안일이며 과수원 일을 하다가 일 이 년 내에 중매쟁이를 통해서 말 그대로 치워(시집)보내 버리려 할 것 임에 틀림이 없다. 자기 딸이 결혼을 하는 것을 왜 치워 버린다고 말하는 것일까? 궁금했었는데 이번 대학 문제로 오빠가 하는 말을 들으니 이해할 것 같다. 말 그대로 돈도 들고 귀찮으니 시집보내 치워버리는 것이 오빠 입장에서는 당연한 말 일 것이다. 더욱 옛날에는 모두가 가난했으니 만큼 식구 하나 입을 줄이는 것도 가정에 도움이 되니까 시집보내는 것 즉 결혼하는 것을 치워 버린다고 했을 것이다.
초등학교 고학년인 조카는 고모를 무척 따랐다. 자기가 보기에도 고모는 멋쟁이다. 장차 장가를 간다면 고모와 같은 여자에게 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정훈이다.
어린 조카이지만 고모 사랑하는 마음이 남 달랐다. 대학 간다고 얘기했을 때에도 고모는 대학 가야 한다고 우리 집에도 여자 대학생이 있다는 것 얼마나 근사 한야며 거들었다가 어른들 말씀 중에 끼어든다고 혼 줄이 나고 울면서 건너 방으로 쫓겨났다. 어느 날 자고(정훈은 고모와 한방을 쓰지만 어쩌다 부모 방에서 놀다 잠들 때도 있었다. 그럴 때 억지로 자는 애를 깨워 방을 옮기지는 안는다.) 있었는데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가 오손 도손 나누는 얘기를 들었다며 고모에게 미주알고주알 다 얘기해주어 알았다. 의례히 아들 녀석은 자고 있겠지 생각하신 모양이다. 아니 아들이 얘기를 들었다고 해서 고모에게 얘기해줄 일은 만무하다는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무슨 말씀 끝에 아버지가 고모에 대한 얘기를 하시는 것을 들었다.
아버지 말씀이
“설이에 대해서는 당신 너무 걱정하지 말래도”
가는 음성으로 아내를 설득하시는 중이다.
“내게도 다 생각이 있다.”하신다.
다시 엄마 말씀이
“당신은 맨 날 생각 있다 해 놓고는 어무(시어머니) 말씀한마디면 아무 말도 못 하면서”볼멘소리다.
다시 아버지 말씀이
“이젠 그런 일 없다”
“설이 대학 가는 일은 절대 없다.”
“나도 대학 나오지 못했는데 지(설이)가 우애 대학가노
어림도 없는 소리 하지도 마라.”하시면서
“가시나가 무슨 대학을”
“잘 아는 중매쟁이에게 따로 얘기 해 두었다가.”
“졸업하면 일 년 내에 적당한 혼처를 찾아 시집을 보내겠으니 당신은 걱정 마라”며 마누라를 다독인다.
이러한 부모의 베개머리 송사를 조카는 듣고 고모에게 다 얘기한 것이다. 미주알고주알 다 얘기는 할 수 없어도 대충 중요 내용은 고모에게 이야기했다.
고모는 대학 못 간다. 말은 차마 할 수 없었고 고등학교 졸업하면 시집보내려 한다는 말을 토시하나 틀리지 않게 정확하게 일러바친 것이다.
어릴 때부터 설이는 첫 조카이고 또 생긴 모습도 귀공자 같아 무척 귀여워하였고 자주 데리고 다녔다. 누구에게나 귀여움을 받을 수 있는 생김새다. 그런 조카이니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면 소재지에 사는 친구들 집에 가서 놀 때가 많았다. 여자들만이 있는 자리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이런 보살핌은 초등학교 고 학년으로 올라가서도 계속되었다. 그러니 고모 사랑하는 마음은 더 했으면 더 했지 변함이 없었다.
이성에 대해서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막연하게 본능적으로 사내아이가 아름다운 꽃을 보면 좋아하고 가지고 싶은 마음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모는 한 떨기 장미꽃이며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하얀 옷을 입은 천사이며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그런 예쁜 분이 고모이고 보니 남이라 하더라도 마음을 빼앗길 판인데 피를 나눈 고모이니 오죽이나 좋아하겠느냐 것이다.
그러니 잠결에 들은 부모님의 대화를 고모에게 얘기해준 것이다.
어린 조카는 아직 해야 할 말 하지마라야 할 말을 구분 하기는 아직 어린 철부지이기 때문이 기도 하지만 그 보다 고모 생각하는 마음이 남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사전에 고모에게 귀띔해 주는 것이 부모에 대한 어떤 배신보다 고모에게 운신 폭을 넓혀드린다는 어른들의 깊은 고뇌에서 우러나는 조언은 아니지만 고모를 도울 수 있는 무언가를 내가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팔딱 뛰는 조그마한 가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알 수 없는 자존감은 없지 않았을 것이다.
방학 동안 학교나 도서관을 찾아 공부하기 위해 패스포트 (보통 3개월을 단위로 끊는다)를 구입하기 위하여 돈을 달라 했을 때도 방학이니 집에 있으며 되지 무엇에 서려고 패스포트가 필요 한야며 돈도 주시지 않는다. 겨울철에도 과수원은 농번기나 다름없다. 국광은 익어도 약간 푸르스름하나 홍옥은 익으면 아주 빨갛다. 겨울 동안 저장하여 늦겨울이나 구정(설)에 공판장에 넘기기도 하고 늦가을에 바로 서울로 화물차로 싣고 가 팔기도 한다. 이러려면 선별 작업 또한 만만치 않다. 여름철 못지않게 일손이 부족하니 도우라는 압력이다. 설은 겨울 방학 동안에 통학하며 학교의 도서관에 다니면서 나름대로 대학 진학을 위한 마지막 공부를 하려 했었는데 어머니께 수차 말씀드렸지만 이제는 아애 엄마는 힘이 없다면서 오빠에게 얘기해서 타 서라는 것이다.
설은 어쩔 수 없이 발이 묶이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런 처지이고 보니 이젠 탈출구는 한 길 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날씨마저 자기 마음과 같이 눈이나 비가 올 것 같은 꾸리 무리(구름이 끼고 약간 어두운)한 날씨다. 이렇게 간단히 짐을 사들고 집을 탈출하는 모험을 시작한 것이다.
설은 금년 들어서는 오빠가 자기에게 하는 말이나 행동이 예전같이 않다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동생 설을 자기 앞에 서지도 못하게 할 정도로 닦달했다. 특별하게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말이다. 단순히 올케 언니의 부엌일을 거들지 않는 다든지 집안일을 도와주지 않는 다든지 하는 사소한 것이 아니라 무슨 근본적인 일 그러고 보니 대학 간다는 말이 나오고부터인 것을 보니 자신의 대학문제와 연결되어있는 것이 분명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오빠의 마음은 내가 애원한다거나 눈물로 호소한다거나 또 다른 어떤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도리 킬 수 없음이 확실하다. 이젠 남은 길은 단 한가 지 스스로 개척할 수박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 결심을 하기까지 가장 큰 장애는 늙으신 어머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는 것이 가장 큰 괴로움이었다. 그러나 어쩌거나 다른 방도가 없는 것을 어머니께서 이해 해 주실 것이라 믿으며 딸로 인해 마음 더 상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심정으로 자신의 심정을 담은 편지를 쓴 것이다.
하나는 엄마께 또 하나는 시집간 언니께 썼다 언니에게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 달라며 어쩔 수 없이 집을 나가는 딸에 대해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편안해질 수 있도록 조언하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정훈이의 아버지 어머니의 베개송사를 듣고부터 설은 처지가 비슷한 친구들과 의논을 하였다. 그런 친구들 가운데 어느 친구가 전에 함께 미팅 갔던 은주와 의논해 보라는 귀띔에 자초지종을 은주에게 의논했다. 은주의 말인즉 참 많이 마음 상하겠다며 자기 외삼촌이 직물공장을 하는데 그곳이라도 괜찮다면 얘기해 보겠다며 희망을 준다. 며칠 후 은주는 현장에서 일하는 직수 자리는 언제라도 좋다는 외삼촌의 말씀을 설에게 전한다.
설은 이것저것 가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므로 외삼촌에게 늦어도 12월 초에는 회사에 다니겠다고 말씀드려 달라하고 우선은 친구가 자취하는 방에서 함께 지나기로 마음을 정했다. 금년에는 어차피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일을 하면서 돈을 벌면서 공부를 할 것이다.
은주의 외삼촌은 처음에는 전설을 다른 일자리는 없고 해서 우선은 공장(직수)에서 일을 하도록 해야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일이 잘 풀리려고 그러한지는 몰라도 경리를 보던 여사원이 결혼을 앞두고 신부 수업을 한다면서 이달만 근무하고 그만둔다면서 미리 사표를 제출하였다. 그러다 보니 경리는 어차피 사무실에서 돈을 만지는 중요 자리가 생긴 만큼 연고 없는 사람을 채용하는 것보다 딱한 사정에 처한 조카의 친구를 채용하는 것 또한 명분 있는 일이라 선뜻 그러기로 결정한 것이다. 설은 나름대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먼 미래를 위한 지금의 고생은 어쩔 수 없는 자기 투자라 이해하고 고생하기로 굳게 마음을 먹는다. 집을 나온 설은 그 길로 친구의 자취방에 짐을 풀고 함께 자취생활을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