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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보냄을 받았는가?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1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대 21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24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 25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28 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 (요한복음 1장)
보냄을 받은 사람(들) (6절, 19절)
보통은 “무슨 일”을 하며 사느냐가 사람들의 관심사이지만, 요한복음은 “누구의 일”을 하고 있는지를 문제 삼습니다. “무슨 일”을 하느냐는 기준에서 가수와 미술가의 일은 다르지만, “누구의 일”의 관점에서는 같은 일일 수 있습니다. 한 명령자의 뜻에 따라 한 사람은 노래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림을 그린다면, 두 사람은 모두 한 명령자를 뜻을 따른다는 의미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흰 가운을 입고 환자를 돌보는 두 명의 사람은, 의사의 일이라는 측면에서는 같은 일이지만,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동기와 소명 의식에서는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 요한(6절)이 한 부류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로부터 보냄을 받은 제사장과 레위인들(19절)이 다른 한 부류입니다. 달리 말하면, 요한을 움직이게 한 것은 하나님이고,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움직이게 한 것은 사람들이었다는 얘기입니다. 존재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모든 사람은, 자신이 알든 모르든, 누군가로부터 보냄을 받은 이들이라고 요한복음 이해합니다. 그리고 누구의 보냄을 받았느냐에 의해 그 사람의 정체성이 결정된다고 알려줍니다.
빛에 대해 증언하러 온 사람, 요한 (7-8절)
누가 나를 보냈는가를 아는 것은 곧 나를 이해하는 것이면서 존재 이유입니다. 그가 누구의 심부름꾼인지가 나의 정체이며, 이에 따라 무엇을 해야 할지가 결정됩니다.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는 자신을 보낸 이의 일을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요한은 빛에 대해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빛을 믿도록 만들기 위해 왔습니다(7-8절). 그 빛은 육신이 되신 말씀이면서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14절). 그 빛의 증언자로 보내어진 사람이 요한입니다. 말하자면, 요한은 사람들이 빛을 보도록 빛을 가리키는 손가락(표적, semeion, sign)입니다.
증언하다(marture,w)는 동사는, 복음서를 통틀어, 마태와 누가복음에 한 번씩 사용되는 데 반해 요한복음에서는 31회 나타납니다. 1장에서만도 다섯 번입니다(7, 8, 15, 32, 35절). 이 동사의 명사형(marturi,a)이 등장하는 빈도수도 같은 경향을 보입니다. 마태복음에 3회, 누가복음에 1회, 요한복음엔 14회입니다. “증언”에 관한 요한복음의 유독한 관심을 방증합니다. 요한복음을 일컫는 또 다른 명칭은 “증언자들의 책”이라고 할 만합니다. 1장에서, 요한을 필두로 하여 안드레와 빌립이 빛(예수)을 빛을 증언하는 증언자입니다. 더 큰 구도로 보자면, 예수 그리스도도 하나님을 증언하고, 요한복음서 자체도 증언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20:31).
유대인(산헤드린)이 보낸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질문을 던집니다. 대조적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요한은 증언합니다. 요한복음의 신학에서, 하나님이 보낸 이들의 소명은 증언입니다. 말씀의 육신(1:14)으로 세상에 보내진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말씀이신 하나님을 증언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오셔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20:21)고 말씀하십니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보냄을 받은 이들인 제자들 역시 증언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증언자들을 포함하여, 증언자로 살아가는 모든 시대의 제자들에게 증언자의 모범으로 제시되는 인물이 세례 요한입니다.
너는 그리스도냐, 엘리야냐, 그 선지자냐? (20-21절)
요한에게 “네가 누구냐?”고 묻는 이들은 그들 나름의 예상과 추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래전,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메시아(그리스도)”가 오리라고 예언했습니다(61:1). 말라기에는 여호와의 날이 이를 때 선지자 “엘리야”가 보내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4:5). 신명기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그 선지자)”를 세우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보전합니다(신18:18). 기나긴 세월 하나님의 구원을 대망해 온 유대인들의 전망을 바탕으로, 세례 요한이 이 세 인물 중 하나일 것이라는 기대가 생겨났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 중에는 자칭 메시아라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을 모아들이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랍비, 지도자, 예언자로 명성을 얻은 이들 가운데는, 엘리야와 모세(그 선지자)처럼 행동하고 가르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알려진 이들에게 많은 군중이 몰려 그를 추앙하며 따랐습니다. 요한이 그리스도, 엘리야, 그 선지자 중 하나라는 추측은 유대 전역에 두루 퍼져 있었고, 요한의 대답에 따라 더 많은 지지자를 불러 모을 수도 있었습니다.
“나는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19-20절)
이에 대하여 요한은 주저 없이 ‘아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그 예언자도 아니다’고 반복하는 요한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마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표적)이 “나는 달(목적)이 아니다”고 결연히 선언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요한은 자신에게 기대와 의미를 걸려는 이들에게 ‘나는 아니다’고 분명히 외칩니다. “그(요한)는 빛이 아니라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8절)라는 진실이 요한 자신의 입으로 선언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자신이 무엇이 아닌지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음을 확신하는 사람은,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에게 ‘나는 왕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추대된 그리스도라면, 그는 사람들로부터 보냄을 받은 그리스도이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그리스도는 아니겠지요. 사람들에게 떠받들어져 그리스도가 된 이가 하는 모든 일은 사람의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목적(달)이 아니라 표적(손가락)이 관심의 대상이 될 때, 그 표적은 완전히 실패한 것입니다. 증언자의 가장 완벽한 실패는, 증언자가 주목을 받게 되는 결과입니다. 이는 모든 증언자가 쉽게 빠져드는 위험이며 시험입니다. 스스로 빛나고 싶은 욕망은 물리치기 어려운 본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요한의 증언은 “나는 아니다” 단서를 먼저 앞세웁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다” (23절)
“나는 아니다”라는 언사가 증언자(표적)의 일성(一聲)으로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나는 무엇이 아니다’라는 부정만으로는 내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그 선지자도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인지를 밝혀야 요한의 정체와 소명이 드러납니다. 요한은 증언자로서의 자기 정체를 밝히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사40:3)라는 이사야의 말씀을 끌어옵니다.
요한은 자신을 일컬어 “외치는 소리”라고 말합니다(23절). 소리는 존재가 없으므로 ‘나는 아니다’라는 말과도 공명합니다. 발설되는 즉시 사라지므로 시간을 차지하지도 않고, 공간도 점유하지 않습니다. 형태도 없고 실체도 없더라도, 그러나 소리는 있습니다. 소리는 존재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뜻의 전달을 목적으로 합니다. “외치는” 소리라는 말은, 전하려는 뜻의 긴박함과 간절함을 암시합니다. 소리가 꼭 언어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이 되지 못하는 아이의 소리도 얼마든지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듣는 사람이 주목해야 할 바는 소리 자체가 아니라, 그 소리가 전달하려는 뜻입니다. 뜻만 전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소리이니, 소리는 증언자인 요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기에 안성맞춤입니다.
요한의 세례, 예수의 세례 (25-26절)
“네가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그 선지자도 아닌데,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는가?”는 반문이 요한을 겨냥합니다. 유대인들은 세례가 씻음의 의식, 즉 죄를 씻는 정결례이며, 메시아적인 인물이 모든 백성의 죄를 씻는 세례를 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죄 씻음의 의식이라는 점에서 세례를 베푸는 이의 권위는 특별한 능력으로 인정됩니다. 실제로 세례 요한의 세례가 죄 용서를 위한 것다는 것이 공관복음서들의 일치된 전언입니다(마3:1-12; 막1:1-8; 눅3:3-17). 그런데 유일하게 요한복음에는 요한이 행한 세례는 죄 씻음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베푸는 물의 세례는, 뒤의 오시는 분이 베푸실 성령의 세례를 가리키는 표지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걸맞게, 요한이 예수께 세례를 주는 대목도 생략됩니다.
덧붙여 요한복음에는 “회개하라”는 요한의 메시지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세례자 요한에게는 자신의 세례와 관련한 자신의 고유한 메시지(회개)가 뚜렷이 존재하는데, 요한복음에서만 그 메시지가 누락되어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요한을 세례 요한답게 만드는 회개의 외침은 사라지고, 요한은 온전히 빛(그리스도)을 증언하는 증언자로서의 속성만 남게 됩니다. 요한은 철저히 증언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오롯이 부각되는 셈입니다.
내 뒤에 오시는 그분 (27절)
앞서 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다. 나는 이분을 가리키고 있을 뿐이다”(15절)고 말합니다. 이 증언이 세례 요한의 전부입니다. 이튿날, 요한은 예수께서 오시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 내가 전에 말한 것은 …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고 말합니다(29-30절). 그리고 그 후에는 자신의 두 제자를 예수께 보내어 예수의 첫 제자들이 되게 합니다(35-39절).
소리인 요한은 시종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요한에게 몰려들 것이 아니라, 요한의 소리가 가리키는 빛을 주목해야 합니다. 또한, 요한은 자신의 뒤에 오실 분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분이 누구인지는 요한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분에 대해 요한이 확실히 아는 것이 있습니다. 증언하는 요한 뒤에 그분이 오신다는 것!(15, 27, 30절)! 너희(우리) 가운데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분이 서 계시다는 것!(26절) 오시는 주님을 증언하는 삶을 사는 증언자들 뒤에, 기다림 속에 살아가는 우리 가운데, 주님이 계십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을 자각하는 이들, 그들이 곧 대림절의 시간을 사는 증언자들입니다. 증언자들은 자신을 보내신 분의 소리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를 보내신 분이 있음을 인식하며 그분의 뜻을 이루며 사는 사람들이 그분의 소리가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누구의 보냄을 받았고, 누구의 소리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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