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교육상황은 눈먼 사람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는 것과 다름없다. 교육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아무도 모른다(인간에 대한 앎에서 나오는 교육과 수업, 2024, 246)."
위 문장을 읽으면서 필자는 그동안 가슴 한켠에 쌓여 있던 응어리가 풀린 듯 시원하면서도 고마운 마음이 솟구쳤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고 누구도 이해해 주지 않아서 혼자 삭이고 있었는데, 그것을 슈타이너가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 누구도 위 문장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필자 역시 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았다면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기 떄문이다. 필자가 배웠던 대학교 교수님들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쳤을 것이다. 왜냐하면 필자가 대학에서 배웠던 지식이 현장에서는 거의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필자가 교대를 졸업하고 현장에 처음 나갔을 때 겪었던 참담함이란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다. 그동안 배웠던 지식을 모두 버리고, 아이들을 보면서 새롭게 하나 하나 연구해 나아간 것이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되었을까'와 '어떻게 해야 할까'가 질문이다.
눈먼 사람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면 당연히 그리지 못한다. 인간 정신이 배제되면 눈이 먼사람과 같다. 당연히 교육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할까? 조야하게 말하면 정신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인류가 무시하고 배제한 까닭이다. 슈타이너의 주장은 당시 정치적 이유로 로마 바티칸 신부들이 그렇게 하였다고 한다(서기 869년). 그렇다면 정신은 정말 없는가. 그렇지 않다. 다만 보이지 않을 뿐, 정신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한다. 인간이 잠을 잘때나, 깨어있을 때나, 꿈을 꿀때나, 그리고 죽음 이후에도 그렇다. 이런 정신인데,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정신이 성장하고 발달하는 시기의 아이들이다. 정신을 배제하면 정신이 성장하고 발달해야 하는 시기의 아이들의 정신은 온전하게 성장, 발달하기 어렵다. 정신이 온전하개 성장하고 발달해야 인간이 지구에서 온전한 삶을 살텐데, 이런 관점에서 지구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처음부터 온전한 삶을 살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필자가 교육을 받을 때를 생각해 보면 분명 뭔가가 있는데, 그것은 무시하고 -필자가 생각하기에- 분명 진실이 아닌데 그것을 진실이라고 우기니 당시 필자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불어 필자는 그것이 무엇인지 또한 알지 못했으니 답답하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그런 사실들이 점차 희미해지고, 학교에 적응을 하였고 지식을 받아들인듯 하다. 그러다가 현장에 나가서 아이들을 가르치자, 그것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짐작하기에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았다면, 현재 사람들처럼 그렇게 적응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자신의 정신에 대해서 안절부절하고, 욕망을 쫓으면서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처럼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당시 필자가 느낀 것은 바로 가는 길이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돌아서 간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정신으로 가는 길이었음을 후일 알았지만, 즉 정신으로 바로 가는 길이 인간 발달단계안에 놓여있다는 의미이다. 인간 발달단계안에는 정신으로 바로 가는 길이 놓여있다. 그 길을 따라서 가르치면 저절로 아이들이 바르게 성장한다. 하지만 안되는 이유는 첫째, 정신을 배제한 지가 오래 되어서 그 자취를 찾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슈타이너에 따르면 15세기 까지는 희미하게나마 남아있었다는데, 짐작하기에 과학혁명이 그 뿌리를 완전히 뽑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지금은 -슈타이너가 주장하기를- 감각세계를 통해서 초감각세계로, 즉 정신세계로 넘어가야 한다. 나아가 이것이 인류의 발전이다.
둘째 정신을 찾는 일이다. 다르게 말하면 인간의 발달단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인간의 발달단계만 알면 그 발달단계에 맞게 가르치면 된다. 지금과 같이 많은 지식은 정신을 배제하고 '대상'을 설명할려니 점점 그 부피가 늘어난 결과이다. 15세기 이전에는 이런 복잡한 지식이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지금과 같이 설명해 놓은 책들은 학교에서 가르치면 안된다고 한다(슈타이너의 주장). 그런 책들은 전문적인 과정을 공부하는 데에 필요할 뿐이다. 전문적인 학자(자연과학자)를 기르기 위해서는 초등학교부터 그런 전문지식의 기초가 되는 지식을 가르쳐야한다는 주장을 당시 교육학자들도 한 모양이다. 슈타이너는 그런 전문학자들은 그렇게 지식을 가르친다고 되지 않고, 초등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그런 능력이 생긴다고 하였다. 오히려 정신을 온전하게 발달시켜주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지금도 강한 탄력을 받아서 현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셋째, 어떻게 정신을 찾을 것인가. 그 방법이다. 첫 번째는 가르치는 교사가 자신의 정신을 파악할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언제나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교사는 아이들과 함께 성장한다. 이를 과거 회자되는 말로 표현하면 선생은 자신의 업으로 인해서 하고, 또 선생을 함으로써 자신의 업을 소멸한다고 하는 말이다. 이 말을 다르게 포장하면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면 서로의 정신이 소통한다. 정신이 소통하면 뭔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두 번째, 인간의 발달단계를 파악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 필자는 교대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이런 단어조차 들은 적이 없다. 0- 7세, 7- 14세, 14- 21세가 인간 발달단계이다. 0-7세 육체가 성장, 발달하는 시기, 7-14세 에테르체의 탄생, 이는 이갈이로 드러난다. 14-21세 아스트랄체의 탄생, 그리고 21세 무렵 자아가 탄생한다. 이것이 인간의 정신과학적인 요소로, 이렇게 정신과학적인 요소가 탄생하면서 정신이 점점 발달해 나아간다.
넷째, 문제는 이렇게 정신과학적인 요소가 탄생해서 발달하는 것에 따른 인간 정신의 '상태'가 있으므로, 그 상태에 맞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역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문제이긴하다. 되풀이 하지만 이런 상태가 무시되어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아이들의 정신이 망가진다. 여담으로 말하면 옛날 임금이 되는 교육이나, 서양에서 특별히 신부와 같은 사제들이 받는 교육이 이런 발달단계에 맞게 이루어지는 교육이다. 다르게 말하면 인간 정신과학적 요소 발달에 맞는 교육을 받으면 임금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정신과학적 요소의 속성을 파악해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다섯 째, 그 시대에 발달단계에 맞는 교육(수행)이 있다. 슈타이너에 따르면 지금 시대는 아틀란티스 다섯 번째 시기라고 한다. 곧 여섯 번째 시기가 열린다고 하는데, 이 시기에는 인간의 육체를 건드리지 않고 정신을 발달시키는 수행이 이루어져야 한다. 과거 수행을 보면 육체적 고행을 통한 수행도 있었다. 부처님의 깨달음도 고행 수행이 아니라 중도였다. 그 중에서 특히 요가가 지난 시대의 수행법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가 인간의 몸을 떠나지 않고는 정신세계로 입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슈타이너는 자신이 주장하는 수행이 '이 시대'에 맞는 수행이라고 한다. 몸에 영향을 전혀 주지 않고 영혼을 통해서 정신세계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영혼은 현실에 매몰되어 있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만약 내가 나의 영혼을 파악하고자 한다면, 현실에 매몰된 영혼 너머의 영혼을 파악해야 한다. 방법은 통상 명상이라고 하는데, 현실에 매몰된 영혼을 가만히 살피는 일이다. 이때 외부의 어떤 상황에도 마음을 뺐기지 않아야 한다. 온전히 영혼에만 집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어렵다. 그래서 정신은 인내와 꾸준함이 언제나 요구된다. 하지만 구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구해지는 것 또한 인간 정신의 속성이다.
현재 교육이 눈먼 사람에게그림을 그리라고 하고 있지만, 문제는 그런 사실조차도 누구도 모른다는 것이다. 필자는 어린 시절 교육을 받을 때를 돌이켜 보면, 분명 필자의 내부와는 전혀 연결이 안되는 상황, 즉 내부의 요구와는 다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하기도 하고, 다른 아이들의 상황도 지켜봤지만 별 다른 방법을 찾지는 못했다.
인간의 발달단계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내부와 연결이 되어있다가 서서히 내부와 단절되어서 외부만 지각한다. 태어나서 3세까지는 자아가 파악되지 않는 상황, 그렇기에 이 시기의 아이들은 주변환경을 그대로 복사한다. 자아가 있으면 거부하거나 받아들이는 등을 할 수가 있는데 자아가 파악되지 않으니 그대로 주위 환경을 다운 받는 것이다. 3세 무렵 어렴풋이 인간은 자신의 자아를 감지한다. 그리고 에테르체가 탄생한다. 그떄까지도 자아는 주위 모든 대상을 자신과 같은 존재로 생각한다. 그리고 9- 11세가 되어야 대상을 자신과 분리해서 인지한다. 이것은 이와 같은 발달단계의 아이들은 자신의 내부와 연결이 되어있다는 의미이다.
자신의 내부와 연결이 되어있기 떄문에 모든 대상을 자신과 같은 존재로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아이들은 자신의 내부 요구에 맞아야 받아들이는데, 맞지 않을 경우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짐작하기에 필자가 이 시기에 의문을 가진 듯하다. 결과는 필자의 내부 요구를 묵살하고 외부의 상황에 마추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필자의 정신이 더 이상 발달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의 아이들은 필자의 시대보다 더 자신의 내부와 연결을 끊을 것을 강요당할 것이다.
이와 같이 아이들의 발달단계에 맞지 않는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아이들의 정신은 발달하기 어렵다 오히려 망가진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의 발달단계에 맞는 교육이 곧 임금을 만드는 교육이다. 요컨대 교육이 인간을 훌륭하게 만들기도 하고 망가뜨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