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에겐 약 2장의 사진만이 남아있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과 감정과 순간들이 있다.
여행이 끝나가는 것도 아쉬운 일이지만 삶이 끝나가는 것이 아쉽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 하겠지만 나에게 저번 여행은 삶과 같았다. 유한하지만 무한히 변화하여 반복되는 한 번의 삶.
또다시 찾아오고 떠나가길 반복한다. 들숨과 날숨처럼.
트리운드 산을 다 내려오고 맥그로드 간즈를 떠나 주변에 있는 작은, 정말 작은 마을로 향했다.
마을 초입을 지나 걷다 보니 결혼식 같은 것이 열리고 있었다. 우리는 사원 앞에 있는 마을만큼 작은 숙소에서 짐을 풀었다.
마을은 조용했고 - 결혼식 같은 큰 행사가 열리고 있었음에도 - 사람들도 가만가만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밤이 되자 낮보다 더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사원에서 사람들이 손뼉을 친 다음 땅을 치는 행동을 하며 토론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수십 명은 있는 것 같았다. 길가에선 반딧불이가 꽃이 피듯 반짝였다. 우리는 시끄러운 사원을 뒤로하고 반딧불이를 따라 마을을 산책했다.
이상하다. 아직 떠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곳이 그리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집이 그립다는 느낌은 없고 밟고 있는 이곳이 그리워졌다. 나는 어쩌면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곳에서 나고 자라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내 모든 시간이 걸음마다 겹쳐져 지금 걷고 있는 '나'를 이루는 것 같다. 참 뜻깊었다.
마을의 불빛은 반딧불로 환했다.
마을의 온기를 온몸에 안고 마지막 일정만을 남겨둔 채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길은 5천 미터 산을 넘을 때만큼 험했고, 사람과 차들과 매캐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다시 토해버렸다.
자기 길을 얼마나 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고생스러웠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그 너머의 무엇을 보며 걷고 있는지, 걸으며 선택하는 방향이 의미 있게 흘러가는지. 그것을 보아야 한다.
걷고 있는 나에게 물어보았다. 무엇을 보며 걷고 있는지, 나의 방향에 의미가 있는지.
춤을 추는 너를 보고 있다. 눈물 나도록 웃으며 행복하게 춤을 추는 너를 보고 있다.
방향의 의미? 모든 방향은 네가 있을 때 가장 의미 있을 것이다. 마음껏 걸으렴. 네 마음껏.
날짜로 치면 서른째 날로 들어섰다. 도착한 곳은 축제 기간인지 사람들은 주황 옷을 입고 북을 치며 거리를 걸었다.
우리는 좀 더 한산한 곳으로 가기로 했다. 날씨는 처음 인도에 도착했을 때 만큼 더웠고, 사람들의 열기로 더 습하게 불타고 있었다.
삐질삐질 땀을 흘려가며 걷고 있는데 여행 중 최초로 위협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걸어가는 길엔 원숭이들이 많았다. 애를 안고 있는 원숭이도, 덩치가 커다란 원숭이도 있었다. 동물원에서만 보던 애들이 길거리에 돌아다닌다.
거친 숨을 쉬며 뙤약볕에 오르막길을 오르다가 잠시 나무 그늘이 있는 바위에서 쉬고 있었다.
그런데 덩치 큰 원숭이 한 마리가 옆에 내려놓은 가방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방 옆에 앉아 기웃 기웃거렸다. 아마 먹을 것이라도 찾으려 했으리라.
나는 손을 뻗어 원숭이를 쫓아내려고 했다. 인간의 위엄을 보여주는 겸. 나에게 그 원숭이는 아마 손으로 휘적거리면 도망가는 파리쯤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손을 뻗은 그 순간, 원숭이가 이빨을 드러내고 무섭게 달려들었다. 나는 깜짝 놀라 손을 뺐고, 옆에 앉아 계시던 아빠도 놀라서 다가왔다.
손을 살펴보니 두 군데가 할퀴어져 피가 나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원숭이의 반격에 당황해서 정신이 몽롱했다.
그렇게 둘이 얼빠져서 있는데 주변에 있던 꼬마애가 달려와서 뭐라 뭐라 하더니 길가에서 음료 따위를 팔던 아저씨에게 데려가 고춧가루같이 생긴 걸 뿌리고 그 위에 레몬즙을 뿌려서 민간요법을 해주었다.
이때 난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이와 같은 일이 예전에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바로 꿈에서. 그런데 그때 나를 할퀸 건 원숭이가 아닌 사람이었다.
얼굴로 뛰어들지 않은 게 어디냐 하며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길을 떠났다. 실로 의심스러운 민간요법이지만 나를 도와주려는 그 마음은 고맙게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을, 나에게 화를 내고 상처받는 것이 두렵다.
아빠께 이 얘기를 했더니 다 그런단다. 사람들이 나를 할퀴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실 나를 할퀴는 사람은 없다.
할퀴는 건 원숭이가 하는 거고, 사람들은 나를 도와주려고 한다. 내가 상처 입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을 죄다 원숭이로 몰아갈 순 없는 노릇이다. 그러면 나도 원숭이와 다름없지 않은가.
온통 커리맛 나는 음식뿐인 식사가 신물이 날 때쯤 한국 식당이나 체인점을 찾는다. 그리고 인도의 한국 식당이 신물 날때 쯤 한국에 가기 위해 델리로 다시 돌아왔다. 처음 여행을 시작했던 곳. 이제 정말 길었던 여행에 끝을 볼 차례다.
다시 시작하기 위한 끝이며, 새로운 탄생을 위한 끝의 시작이다.
마무리의 더 자세한 내용은 후기에 담도록 하고 35일간의 인도 라다크 여행, 그보다 곱절은 더 길었던 여행 후기는 이제 끝을 내겠다. 안녕.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