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자나 폭력적인 인간의 본성은 적잖은 경우 성장기에 '나'가 너무 강하게 빨려들도록 버려두었다는데 기인합니다(인간에 대한 앎에서 나오는 교육과 수업, 2024, 107)."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는 '나'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측면으로 존재할 경우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빨려들어가서 존재하는 '나', 둘째, 자신의 내면이 아니라 지나치게 바깥에서 존재하는 '나'이다. 첫째, 자신의 내면에 지나치게 빨려들어서 존재하면 물질적이 되어서 '나'가 물질의 도구가 될 가눙성이 있다. 즉 자신이 물질의 노예가 되어서 자신('나')을 그 도구로 쓴다는 것이다. 예컨대 원하는 물질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을 활용하는 경우, 그것은 범죄행위로 이어진다. 물질에 집착하기 때문에, 집착한 물질을 구할려면 상대 인간에 대한 배려가 어렵기 떄문이다. 둘째, '나'가 지나치게 바깥에 존재하면 쉽게 망상이나 공상에 빠지게 된다. 그러면 쓸모있는 삶을 살기가 어렵다. 이 두 경우에서 보았듯이, 우리는 아이들이 자신('나')을 온전하게 유지, 발달시키도록 보살펴야 한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까? 이것이 질문이다.
인간의 '나'(자아)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온전한 것이 아니고, 아이가 크면서 서서히 지구의 삶을 받아들여셔 적응한다. 구체적으로 테어나서 3세까지는, 자아가 전혀 드러나지 않아서, 이 시기 아이는 온전히 외부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아이가 외부환경에 그대로 노출된다는 의미이다. 결과 이 시기에 아이 자아의 무의식의 바탕이 형성된다. 왜냐하면 아이의 자아가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외부 환경을 아이의 자아가 받아들이거나 배제하는 등을 하지 못하기 떄문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아이의 자아에 어떤 거름막도 없으므로, 외부 환경이 그대로 아이의 무의식에 점착된다는 것이다.
3세 무렵 인간은 자신의 자아를 어렴픗하게 감지한다. 요컨대 아이도 뭔가가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다. 하지만 여전히 분명하지는 않다. 그리고 7세 무렵 에테르체가 탄생해서, 이 시기부터는 아이의 자아는 에테르체와 함께 발달하기 시작한다. 에테르체는 인간에게 생명의 힘을 주는 존재이다. 아이의 자아가 에테르체를 통해서 그와 함께 발달하므로, 우리는 이 시기에 에테르체의 속성을 활용해서 교육을 해야 한다. 에테르체는 생명의 힘으로 호흡, 혈액이 흐르는 힘, 맥박이 뛰는 그 힘이다. 이 시기 아이가 지칠줄 모르게 뛰고 움직이는 것이 이와 같은 생명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생명의 힘을 이 시기에 활용하는 교육을 해야 한다.
9 - 11세 사이 아이의 자아는 자신과 다른 존재들을 비로소 구분한다. 이전까지는 모든 존재가 자신과 같은 존재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9세 이전에는 모든 존재를 아이와 같은 존재로 하는 교육을 해야 한다. 예컨대 달, 별, 나무 등등을 나와 같은 존재로 하는 신화 등등을 이야기로 전달하는 교육이다.
12- 14세 무렵 아스트랄체가 탄생한다. 자아가 아스트랄체를 만나서 그와 함께 발달하는 시기이다. 아스트랄체는 감정체로 영혼의 바탕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이가 어떤 자아가 되면 좋겠는가를 생각해서 그와 같은 자아가 되도록 안내해야 한다. 즉 아이의 감정을 통해서 우리가 아이의 자아를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아이가 세계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인류에 헌신하는 사람을 만들고자 한다면, 그와 같은 교육을 해야한다. 이는 다양한 인물을 통해서 아이가 스스로 선택하도록 하는 일이다. 아이 역시도 아이 내면에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하는 화두를 품는 시기이다.
21세 무렵 드디어 인간의 자아가 탄생한다. 이제까지 발달시킨 육체, 에테르체,아스트랄체를 가지고 인간은 자신의 삶을 지구에서 영위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아이의 자아가 자신의 내부로 너무 깊이 빠져들지 않게 해야 하고, 또 아이의 자아가 너무 많이 바깥에 존재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다음은 그 방법이다.
여담으로 필자의 경우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필자는 필자의 자아가 내부에 깊이 빨려드는 성향에 가깝다. 즉 필자는 언제나 현실에 깊이 발을 디디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정보를 보거나 들었을 경우에도 딱히 돈을 버는 행동에 선뜻 나서지 않는다. 돈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버리거나 선택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만약 필자의 자아가 필자의 내부에 깊이 빨려들었다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직업을 그만 두고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필자의 내부에 깊이 빨려들지 않은 까닭이 늘 궁금했다. 나아가 필자의 자아가 너무 바깥에 존재해서 공상에 빠질 수도 있었겠지만, 공상 쪽은 아니다. 필자는 현실이 늘 궁금해서 공상하기는 어려웠다.
필자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순간 떠오르는 것이 있다. 필자가 아직 세상 모를 때, 이 말은 필자의 자아가 고정되지 않은 상태, 자유로운 상태이다. 이 상태에서 필자는 구구단을 외웠다. 초등 2학년 무렵인 듯 필자는 구구단을 외우면서 구구단에 깊이 빠져들었다. 요컨대 당시 구구단이 너무 재미있어서 필자의 영혼이 거기에 몰입했다. 영혼이 몰입하면 영혼의 속성 상 영혼은 숫자와 하나가 된다. 필자의 자아(영혼)가 숫자와 하나가 되었으므로, 필자의 자아가 필자 바깥으로 나온 것이다.
이것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데, 만약 필자의 자아가 바깥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필자의 내부에 깊이 빠졌다면 물질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자아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설사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도 결과는 허무할 것이다. 이와 같이 정신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누구라도 자신의 정신의 상황에 따라서 끌려가고 만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늘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은 그 방법이다. 자아가 내면에 깊이 빠져들지 않도록 하는 방법은 숫자나 기하학을 하면서 자아가 숫자나 기하학과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가 된다는 말은 영혼이 거기에 몰입한다는 말이다. 다르게 말하면 아이가 재미있어한다는 말이다. 아이가 무엇을 할때 재미있어 하면, 영혼이 그것과 하나가 되고, 이는 자아도 하나가 된다는 말이다. 자아가 자신의 내부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여담으로 전민철 발레리노(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 솔로 무용수)가 발레를 할려고 할 때 아버지가 반대했다고 한다. 이때 전민철 발레리노가 한 말이 유튜브에 영상으로 올라와 있다. "아빠는 내가 발레를 할 때 행복해하는 모습은 안 보여." 전민철 발레리노가 발레를 할 때 영혼이 몰입했고, 자아가 발레와 하나가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아이의 영혼이 발레에 열렸다'이다. 누구라도 영혼이 열리고 노력이 따를 경우에 천재가 된다.
두 번째 아이의 자아가 너무 바깥에 나왔을 경우이다. 이는 아이의 자아가 아이의 내부로 들어가야 한다. 그 방법은 음악을 하는 것이다. 음악은 원래 정신이어서 음악과 하나가 되면 정신 그 자체가 되므로 아이의 자아는 내부로 들어간다. 그렇다면 두 가지 상황을 봤을 때, 아이의 자아를 대상과 하나가 되게 하는가. 또는 아이의 정신과 하나가 되게 하는가가 중요한 핵심이다. 아이의 자아가 너무 바깥에 있으면 정신과 하나가 되게 해야 하고, 반면 아이의 작아가 너무 깊이 내부에 빨려들어가면 바깥으로 나오게 해야 한다.
음악의 경우 노래, 감상, 연주를 하면 음악과 하나가 되므로, 아이의 자아는 내부로 들어간다. 반면 음악을 하더라도 음악의 이론적인 부분, 이해 공부를 하면 아이의 자아는 바깥으로 빠져나온다. 역사를 살펴보면, 역사 인물과 하나가 되면 아이의 자아는 내부로 들어가는 것이고, 역사에 대한 이해 공부를 하면 아이의 자아는 바깥으로 나온다. 요컨대 대상과 하나가 되는 공부는 아이의 자아와 하나가 되어서 안으로 들어간다. 반면 대상으로 보면 아이는 그 대상과 하나가 되어서 아이의 자아는 바깥으로 나온다. 이는 영혼의 속성때문이다.
영혼은 공감과 반감을 하는데, 공감은 대상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활동이고 반감은 대상으로 보는 활동이다. 영혼이 대상과 하나가 되면 의지로 나아가고, 영혼이 대상으로 보면 사고로 나아간다. 영혼의 공감과 반감은 호흡으로 드러나고, 우리는 감정으로 파악할 수가 있다. 어쨌든 인간이 눈을 뜨는 순간 대상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사고로 나아가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사고보다는 의지로 나아가야 범죄도 줄어들고 자신의 삶을 이끄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어떤 일을 하는데 의지가 발현되어야 그 일을 이루기 때문이다.
정신은 보이지 않지만 이렇게 인간의 삶을 이끈다. 자신이 물질적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그것을 파악하면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다. 그러므로 언제나 자신을 성찰해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끌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