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봉헌축일로 시작된 연중 제4주간은 우리들에게 믿음에 대한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혈병을 앓던 여인이 치유를 받았습니다.
또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에게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하고 그 딸을 소생시켜 주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장애물 속에서 기회를, 장애물 속에서 소원이 성취됨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길을 가다 보면 주님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말의 ‘없다’는 ‘업다’에서 왔다는 다음의 이야기를 한 번 기억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전에는 아기들 대부분이 엄마 등에 업혀 다녔습니다.
생김새는 물론 어감조차 촌스러우면서도 정겨운 ‘포대기’에 폭 싸여서 말이지요.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고가(高價)의 유모차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엄마 등에 업혀 바라보던 세상이 우리가 처음으로 대한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아기를 등에 업는 순간 아기에겐 엄마 얼굴이, 엄마에겐 아기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어 없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것은 업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없다’는 ‘업다’에서 왔다고 합니다.
가만 보면 두 말이 엇비슷합니다.
없다와 업다가 관련 있다는 게 낯설게 다가오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수긍이 됩니다.
서로의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서로 기대고 있는 것입니다.
열심한 신앙인들도 어렵고 고통스러운 순간에 주님이 보이지 않으면 낙심합니다.
주님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업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안 보이는 그때가 실은 가장 가까운 때입니다.
민병섭 바오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