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은 잠을 잘 때처럼 신체성에서 분리된다(비밀학 개요, 2024, 321)."
인간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지니고 있다는 데에서 거의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를 움직이고 운용한다는 사실이다. 마지막 인간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자기 안에 잠들어 있는 능력의 발달을 통해서 그 감춰진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인류 역사이래로 모든 인간이 찾았고 찾기 위해서 무수히 노력한 그 과정이 인류 역사라는 생각도 든다. 지금도 어떻게 찾을 것인가가 당연히 화두인데, 15세기 이래로 약간 물밑으로 가라앉은 것 뿐이다. 그 방법이 다양하게 내려오는데, 필자가 파악하기에 내려오는 모든 방법이 인간의 본성을 근간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인간의 본성을 반드시 파악해야 한다.
슈타이너가 주장하는 인간의 본성은 육체, 영혼, 정신인데, 현 인류는 육체와 영혼 또는 육체와 정신으로 영혼과 정신을 분리하지 않고 애매모호하게 같이 취급한다. 즉 영혼과 정신이 같이 취급되어서 각각의 속성이 배제되거나 무시되고 있다. 결과는 정신이 사라져서 발달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망가지고 있다. 늘 되풀이하지만 특히 문제는, 인간의 정신이 발달하는 단계에 있는 아이들이다. 그 시기 아이들의 정신이 발달하지 못하게 되어서 아이들의 인생이 어렵게 되기 떄문이다. 왜냐하면 정신이 보이지가 않아서 깊이 성찰하지 않으면, 그 정신에 휘둘린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나쁜 소식이고, 좋은 소식도 있다. 정신은 언제라도 스스로 파악하면, 즉 깨달으면 즉시 삶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천년동안 어두웠던 동굴이라도 불을 켜면 한 순간에 밝아진다고 말한다.
필자가 파악한 정신을 깨닫는 방법이다. 정신은 보이지 않아서 상대방의 정신을 통해서 전달된다. 일종의 도제식 방법이다. 여기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것 첫째, 이것이 7-14세 사이의 아이들에게는 교사에 대한 권위로 연결된다. 이 시기 아이들의 정신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교사를 존경해서 교사가 보는 시각이 아이들의 정신에 연결되어야 한다. 즉 이 시기 아이들은 자신의 정신을 이렇게 발달시킨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의 정신은 그 상태로 멈추거나 잠을 자게 될 것이다. 둘째, 정신이 온 몸에 분포되어있기 때문에 그런 정신을 깨울려면 깨달은 사람을 온전하게 '존경'해야 한다. 존경하는 '이것'을 옛 선사들이 제자들에게 실험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온다. 요컨대 인간의 본성이 존경해야 정신이 깨어난다. 정신을 깨달은 사람을 온전히 존경하면, 자신의 정신이 꺠어난다는 말이다. 이것이 정신이고 인간의 본성이다.
셋째, 이것이 화두를 드는 이유, 방법이다. 화두는 궁금한 무엇이다. 사람이 궁금하면 자신의 자아에 연결된다. 왜냐하면 무엇을 곰곰이 생각하는 이 자체가 자신의 자아, 본성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자아에게 '이것이 뭘까'하고 물으면, 자아가 대답해 주게 된다. 문제는 생각이 많아서, 번뇌라고 하는데, 마음이 가라앉은 상태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 불가에서는 행자생활을 오래 시킨다. 이 번뇌가 가라앉을 때 즈음, 큰 스님이 불러서 그떄부터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신을 깨닫는 방법으로, 역시 정신의 속성에 기반하고 있다.
물론 이렇게 해도 깨닫는다. 하지만 오랜 시간 화두를 잡고 참선을 해야 한다. 더불어 깨닫기 전까지 자신의 삶을 온전히 몰두해야 한다. 그래도 깨닫는다면 충분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깨닫고자 한다면, 슈타이너의 방법을 권한다. 슈타이너의 방법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가 먼저이다.
인간의 본성은 육체, 영혼, 정신인데, 각각은 그 속성이 있다. 먼저 위 문장에 나온 영혼의 속성이다. 영혼은 인간의 의식에 따라서 다른 상태를 지닌다. 인간의 의식은 세 가지로 분류된다. 깨어있는 의식과 꿈꾸는 의식, 그리고 잠자는 의식이다. 깨어있는 의식에서 영혼은 육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 자아와 연결되어 있어서 각각의 활동이 함께 이루어진다. 즉 신체 안에 존재한다. 반면 잠자는 의식에서는 이 관계가 달라진다.
다음은 달라지는 관계이다. 깨어있는 의식에서는 육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 자아가 같이 연결되어 있다가, 인간이 잠을 자면 육체, 에테르체와 아스트랄체, 자아는 서로 분리된다. 즉 육체와 에테르체는 잠을 자거나 깨어있거나 같이 연결되어 있고, 이 관계는 죽을 때까지 유지된다. 이 관계가 떨어지는 것이 죽음이다. 아스트랄체와 자아는 깨어있는 경우에는 연결되어있지만, 잠을 자는 경우에는 신체에서 분리된다. 슈타이너는 이를 아스트랄체가 자신의 고향(정신)인 우주에 간다고 말한다. 자신의 고향이란 우주, 별들의 세계인데, 인간은 태어나기 전에 이 세계에서 존재했다가, 자신의 존재가 생명의 핵, 배아로 줄어들면서 물질 육체를 입는다고 한다. 이것이 탄생이다.
아스트랄체와 자아가 잠을 자는 시간에 무사히 자신의 고향에 머물러서 정신적 에너지를 받아야 다시 신체로 돌아와서 살아갈 힘을 얻는다고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몸과 마음이 힘들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잠을 자고난 뒤에 느끼는 충만함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정신과학은 이 잠자는 의식에서의 아스트랄체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다.
다음은 여기에 주목해서 권하는 슈타이너의 교육방법이다. 교육방법은 관찰하는 방법과 사지(팔과 다리)를 활용하는 방법이 있다. 먼저 관찰하는 공부를 한 다음에 그 공부에 리듬을 통한 공부를 한다. 관찰하는 공부는 깨어있는 의식에서의 공부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깨어있지만, 잠자는 상태의 의식(의지가 잠을 자기 때문이다)을 지닌다. 관찰이 끝난 뒤에 그것을 리듬으로 변환하면 아스트랄체에 전달된다. 그러므로 아이들의 아스트랄체에는 리듬이 내재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밤에 잠을 자면 아이들의 아스트랄체는 우주에서 자신이 가진 리듬을 그림으로 변환시킨다. 다시 아스트랄체가 신체로 돌아오면 자신의 에테르체에 그 그림을 연결한다. 그러면 에테르체에 그림이 생성된다. 이 그림을 아이들이 이튿날 학교에 가지고 온다는 것이다. 교사는 아이들의 그 그림을 가지고, 전날 수업내용에 관한 이해와 판단하는 수업을 하면, 아이들의 정신에 각인이 된다는 것이다.
관찰하는 방법은 깨어있는 의식에서 공부를 하므로 인간의 의식이 잠을 자는 상태이다. 예컨대 책을 읽거나 가만히 무엇을 보는 공부이다. 반면 사지를 통한 공부는 온 몸을 뢀용하는 공부로 노래를 부르거나 손으로 작업을 하는 공부 '뜨개질' 등이 있다. 두 가지 교육방법이 서로를 보완해 주도록 한다면 많은 도움을 얻을 수가 있다. 이러한 정신에 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교육이 이루어지니 아이들이 짜증을 내고 힘들어 한다는 것이 슈타이너의 주장이다. 아이들의 발달단계, 정신의 발달단계에 따르면 아이들은 힘들어 하지 않는다고 슈타이너는 확실하게 주장한다.
다음은 여담으로 필자의 경험이다. 어느 날 문화센터에 가곡공부를 하러 갔는데 거기에서의 경험이다. 발성연습을 하고 노래를 부르는데 갑자기 필자의 위에서 톡쏘는 듯한 느낌이 전해졌다. 마치 콜라를 마신 후에 톡쏘는 듯한 느낌이었다. 신기해서 기억하는데, 역시 슈타이너가 그 이유를 말해주었다.
"예를 들어서 수업시간내내 상상력을 고무하지 않고 설명만 해주면 위산이 생겨납니다. 그럼 아이의 위에 펩신이 너무 많아 집니다(청소년을 위한 교육 예술, 2023, 37)." 이 펩신이 음악시간에 노래부르기를 통해서 온 몸에 퍼지게 되고, 그러면 톡 쏘는 느낌이 생긴다. 물론 수업시간에 설명만 하지 않고 상상력을 적용해도 펩신이 온 몸으로 퍼진다. 또 그런 아이들이 음악시간에서 톡 쏘는 느낌을 얻는다. 이런 느낌이 있어야 음악시간에서 즐겁게 노래를 부른다. 이렇게 설명하는 수업(관찰하는 수업)과 사지를 통한수업(음악)이 서로 보완이 되어서 아이들이 온전하게 발달한다. 물론 필자 역시 그런 느낌이 있고 부터는 노래도 재미있고 집에서 읽는 책도 재미가 있다. 그래서 만약 인간의 발달단계에 필자가 이런 교육을 받았다면, 훨씬 더 재미있게 공부를 했을 것이다는 생각, 아쉬운 생각은 여전히 든다.
웃음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혈액은 아레에서 위로 올라가서 영영소를 위에 전달해야 하는데 그럴려면 횡경막을 통과해야 한다. 이 횡경막을 통과시켜주는 존재가 웃음이다. 이렇게 정신(인간의 본성)을 통하여 교육을 받으면 어려움이 거의 없다고 한다. 마치 바로가면 힘들지 않은데 돌아가는 경우가 인간의 본성을 무시한 교육이라는 생각도 든다.
마지막 슈타이너의 육성이다. "근본적으로 오늘날 사람들은 내적으로 무감각하게 되어서 현재의 상태에 대해 더 이상 놀라지도 않습니다(인간에 대한 앎에서 나오는 교육과 수업, 2024, 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