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는 아이들의 영혼에 완전히 빠져들 수있는 정서와 영혼 성향을 가지고 교실에 들어가야 합니다 (7- 14세를 위한 교육 예술, 2022, 122)."
필자가 위 문장을 읽는 순간 현장에 있을 때 경험이 불현듯 생각났다. 당시 초등 고학년(5학년)을 가르치는 여교사(50대 후반)가 고발당하는 사건이 뉴스 전면에 등장하였다. 개요는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떠들어서 수업을 하지 못할 정도가 되자, 교장선생님과 상의한 끝에 교실에 홈캠을 설치한 모양이다. 수업시간에 틀고, 쉬는 시간에도 틀자, 학부모가 아이들의 초상권 침해라고 고발한 것이다. 여교사는 고발을 당하자 병가를 내었고, 다른 기간제 선생님이 오셔서 수업을 한다고 하였다. 필자가 근무하는 바로 옆 학교라서 알게 되었지만, 더 자세한 사항은 알지 못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당시 세계를 휩쓴 '신자유주의' 분위기가 우리나라도 휩쓴 때문이 아닌가 한다. 결과 가장 먼저 타겟이 된 것은 교사였다. 이어서 변호사 순위, 지금은 의사들이 타겟이라는 생각이 든다. 신자유주의는 어떤 정서, 정신은 모조리 버리고 경제논리로만 무장한다. 결과는 교사들의 권위가 무너졌고, 이어서 등장한 많은 교권침해 현상 역시 이와 절대 무관하지 않다. 현재도 이어지고 있는데, 먼저 말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돌아간다.
교육은 현실의 지식을 전달해서 실생활에 활용하는 기능도 있지만, 정신을 전달하는 중요한 기능도 있다. 정신이 전달되려면 교사의 권위가 중요하다. 정신이 발달하는 단계의 아이들은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기 떄문에 교사의 권위를 통해서 정신이 전달되기 때문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의 정신은 여린 싹과 같아서 지켜주지 않으면 발달은 커녕 오히려 망가진다. 정신이 보이지 않아서 다만 우리가 모를 뿐이다. 그래서 그 기간에 교육을 통해서 아이들의 정신이 발달하도록 배려되어야 한다. 현재 갈수록 정신병이 많이지는 것이 이와 절대 무관하지 않지만, 이것을 파악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런 사실은 '정신의 속성'과 '인간의 발달단계'를 알아야 이해할 수가 있다. 정신의 속성 첫째, 정신은 상대를 존중(존경)할 때 전달된다. 구체적으로 정신은 삼라만상이 살아가는 원리로, 크게 보아 사랑이다. 삼라만상이 모두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것은 사랑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나의 정신도 사랑이라는 원리로 삼라만상과 함께 한다. 따라서 나의 정신이 발달할려면 그 대상을 사랑해야 한다. 더불어 본받고자 하는 대상은 나보다 정신적으로 더 크고 원만하다고 봐야 한다. 이 사랑이 존경인 것이다. 존경할 때 그 사람의 정신을 내가 본받는다. 슈타이너의 주장을 들어보면, "단순히 존경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런 저런 존경받는 대상괴 날 비슷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내 안에서 발달시킬수 있다고 나를 믿어야 한다(비밀학 개요, 2024, 268)." 이런 존경을 신자유주의가 모두 단숨에 제거했고, 굉장히 효과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늘 되풀이 하지만, 아이들의 정신은 스스로 판단할 수없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결과 아이들의 정신은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사막의 황무지와 같아지는 것이다.
둘째, 정신은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 완성된 상태가 아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서서히 발달해서 점차 지구에서의 삶을 살아간다. 그것이 인간의 발달단계이다. 더불어 각 발달단계에는 정신발달의 중요한 사항이 있다. 인간의 발달단계는 0- 7세, 7- 14세, 14- 21세이다. 0-7세는 아이가 주위환경을 그대로 모방한다. 아이가 주위환경을 모방한다고 해서 겉으로 보이는 부분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양육하는 사람의 정신을 모방한다. 예컨대 양육하는 사람이 화를 잘 낸다면 화를 내는 사람의 혈액순환, 호흡, 맥박을 그대로 모방해서 아이는 자신의 호흡, 혈택순환, 맥박에 그대로 다운받는다. 아이가 화를 잘 내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물론 아이는 훗날 이런 자신을 알기는 어려울 것이다.
7- 14세 교육은 교사의 권위에 기대어야 한다. 아이는 아직까지 자신의 정신을 지구에 연결하지 못했다. 정신세계에서 살다가 지구에 왔는데 그 지구에 아직 적응하지 못했다. 누군가의 거울을 통해서 자신의 정신을 연결해야 한다. 그 거울이 교사의 권위이다. 예컨대 교사가 '이렇다'라고 하면, 아이는 그대로 자신의 정신에 연결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은 아이들이 교사를 믿고 잘 따르게 된다. 물론 교사도 아이들이 믿고 따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이전에는 이런 교육이 이루어졌는데,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렇게 자신의 아이가 교사를 믿고 따르니 부모님들의 '욕심'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한다. 요컨대 아이가 부모님보다 교사를 잘 따르니 싫은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상황이 있을 것이다. 교사보다 부모의 학벌이 더 나을 수도, 돈도 더 많을 수도. 또 아이도 한 명으로 과거와는 다른 상황이다. 결과는 작금의 상황이 되었다. 아이들이 교사를 잘 따르는 것은 인간의 발달단계에 따른 과정으로 교사를 따르지 않으면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인데, 이를 알지 못해서, 무지해서 교사의 권위를 해체하고 만 것이다.
14- 21세 시기 아이들은 사춘기이다. 아이들이 사고를 하게 되어서, 무엇이든 스스로 판단해서 행동할려고 한다. 인과에 대한 이해도 시작되므로, 이때부터 역사교육에서 인과를 도입할 수가 있다. 이 시기는 이상을 품는 시기로, 아이들이 꿈꿀 수있는 모델을 안내해 주어야 한다. 이 시기는 교사의 권위가 통하지 않으므로 아이들은 교사의 실수를 단 한번도 용납하지 않는다. 교사는 아이들을 실력으로 감동시켜야 한다.
21세 무렵 드디어 자아가 탄생한다. 지금부터는 자아가 전면에 나서서 이제껏 발달한 정신을 바탕으로 지구에서의 삶을 살아간다. 요컨대 지구에서 자아가 살아갈 준비가 되었다. 이렇게 살아갈려면 그동안의 발달단계에서 아이들의 정신이 온전하게 발달이 되어야 한다.
위 문장으로 가서 살펴보면, 당시 50대 후반의 여교사가 초등 고학년을 맡으면 대부분 문제가 생겼다. 그리하여 50대 이후 교사는 고학년을 기피하였고, 이것을 넘기지 못한 교사들이 명퇴를 많이 하였다. '그 이유가 뭘까'가 질문이다. 필자 역시 이에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처방이 위 문장이다. 물론 당시에는 필자 역시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여러 방법을 사용한 끝에 알게 되었다. 수업 중에는 아이들에게 집중, 아이들의 모든 행동과 언어에 집중을 하기로 한 것이다.
필자가 실제로 해보니 아이들에게 집중했을 경우 아이들은 교사의 말을 따랐고 수업 중에 떠들지도 않았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정신을 아이들에게 집중해야 한다. 이것을 알게 된 처음에는 참 신기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이들이 교사가 집중하는지 '어떻게 알까'란 생각이 든 것이다. 답은 인간의 아스트랄체이다. 슈타이너의 대답은 아이들의 아스트랄체가 참으로 영리해서 교사가 공부를 해서 가르치는지, 그냥 책만 들고 가르치는지도 안다고 한다.
교사도 생활을 해야 하므로 당연히 생활에 젖는다. 예컨대 빚이 많아서 고민일 수도 있고, 또 교사의 아이가 문제를 일으켜서 해결해야 할 수도 있다. 다른 여러가지 상황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교사가 교실에 들어갈 때는 이런 모든 상황을 내려놓고 온전하게 아이들의 영혼과 아이들의 정서에 집중해야 한다. 2, 30대 교사는 아이들의 정서와, 괴리가 그렇게 크지 않다. 하지만 50대 후반이 되면 저절로 교사는 생활에 젖는다. 이것이 50대 후반의 여교사가 어려운 이유이다. 남교사는 아이들과 호흡이 맞을 수도 있다. 예컨대 운동으로 아이들과 서로 어우러지는 것이다.
당시 필자는 그 이유가 무척 궁금했다. 이런 이유는 몰랐지만, 필자가 찾은 방법은 맞았다. 이렇게 고민하고 찾으면 답을 알려주는 존재가 자신의 자아이다. 그러면 질문을 할 것이다. 나는 '질문을 해도 안 알려주는데'라고. 그 이유는 자신의 본성에 번뇌가 많이 쌓여있어서 그렇다. 먼저 쌓인 번뇌를 없애야 한다. 그 방법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다.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면 서서히 마음이 가라앉는다. 많은 인내와 끈기가 있어야 하고,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꾸준히 계속해야 한다. 어느 순간 번뇌가 사라지고 자신의 본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카르마에 놀아나므로, 카르마에서 벗어날려면 다른 방법이 없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교사가 교실에 들어갈 때는 자신의 생활(?)을 내려놓고 아이들에 맞는 정서와 영혼 상태를 가지고 들어가야 한다. 이렇게 해야 교사도 아이들도 서로 서로 행복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