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인간이 죽음을 향해가는 연령대가 되면 현대 과학이 설명하는 것과 같은 것이 내면에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 대략 50대를 넘어서면 특정한 의미에서 내적으로 먼지처럼 해체되기 시작합니다(청소년을 위한 교육 예술, 2023, 182)."
며칠 전에 생전 처음가는 곳을 물어 물어서 찾아 가게 되었다. 물론 네비게이션이 있고, 네이버 길찾기도 있다고 하겠지만, 전화로 불러준 약도만 가지고 찾아간 곳이다.
한참 헤매는데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시간도 다 되어가고 급기야 초조한 마음이 들기 시작하자, 필자는 가까운 약국에 무작정 들어가서 물었다. 거기서 친절하게 가르쳐 주어서 안심하고 찾아가는데, 앞에 골목이 또 나왔다. 혹시 또 잘못 들어갈까 걱정이 되어서 바로 옆 가게에 들어가서 물었다. 필자가 묻자 아르바이트 생인 듯한 여자가 머뭇하는데 순간, 주인인 듯한 남자가 필자를 약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단호하게 '그런 것 모른다'라고 말하였다. 아르바이트 생에게 이런 사람이 오면, 단호하게 대처하라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시 나와서 길을 찾는데, 마침 배달하는 아제씨가 보이길래 찾아가서 또 물었다. 필자가 배달하는 아저씨에게 묻는 이유는 통상 그 마을을 많이 다니기 떄문이다. 이 아저씨가 상세하게 알려주고, 또 필자가 찾는 길에 앞서서 기다렸다가 알려주었다. 무척 고마웠다. 이렇게 어려움을 겪으면, 그 사람 마음을 이해해서 나도 도와줘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다.
무사히 볼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골목에서 지하철 역사를 다시 찾아 가야했기 떄문에 또 길을 물었다. 어떤 여자분이 자기도 그 방향으로 가므로 자신을 따라오라고 하였다. 그 얼굴이 누구를 도와주는 일이 아주 몸에 배인듯 편안해서,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필자도 길을 알려준 사람 덕분에 무사히 볼일을 보았으므로 이런 마음이 연결된 듯,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순간 들었다.
그래서 묻지도 않았는데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라는 생각에, 필자가 그 곳까지 찾아간 이유를 알려주기 시작하였다. 인생을 살면서 '모퉁이'라는 생각이 들면 어느 방향으로 갈까를 고민하게 된다. 필자가 30대에 그 방향을 찾고자 들른 곳이다. 그때 들은 조언이 도움이 되어서, 30년이 흐른 지금 다시 찾아간 곳이다. 그 얘기를 들려주었더니, 그 여자는 자기 집 근처에 있는데 정말 몰랐던 모양, 진지하게 듣고 고맙다는 말까지 하였다.
역시 그날 일어난 일이다. 광역버스를 타기 위해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앞에 줄을 선 여자(30대)가 버스 기다리는 시간을 자신의 핸드폰으로 찾아서까지 보여주었다. 날씨가 추워서 그러기는 쉽지 않았을 터인데, 그 마음이 무척 고마웠다. 필자는 아까 든 마음, 이 여자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또 들었다. 역시 묻지도 않았는데 좋은 정보라고 알려주었다. 물론 그 여자 역시 자기도 지금 모퉁이에 있다고 하면서 몹시 고마워하였다.
필자는 이제까지 일어난 일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필자가 볼일을 못 보았을뻔 했는데,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보았다. 그 중에서 단호하게 알려주지 않은 사람은 소위 말해서 효율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즉 다른 사람에게 시간을 뻈기므로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일은 하지 않는다. 반면 자신의 시간을 내면서까지, 아니면 가는 길에 알려준 사람들은 서로 다르다. 그 '차이점이 뭘까'가 질문이다.
그 차이점은 현대 과학이 요구하는 대로, 현대 과학이 지향하는 대로 살아가느냐와 반면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정신, 에테르체가 반응하는대로 살아가느냐이다. 이러한 두 가지 사안의 근본적인 원인은 '마음'이 서로 다른데에 있다. 현대 과학이 지향하는대로 살아간다는 말은 '마음'이 아니라 '생각'을 근간으로 해서 살아간다는 말이다.
현대 과학은 인간의 정신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을 일종의 원소의 집합으로 본다. 현대 과학이 말하기를 '인간은 70여가지의 원소, 수소, 산소, 염소, 브롬, 요오드 등으로 이루어졌다'(위 책, 202).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오히려 이 방면의 전문가이다. 반면 마음에 근거한 사람은 자신의 에테르체의 반응에 기인해서 판단한다. 에테르체의 느낌이란 물, 불, 흙, 공기에 대한 느낌이다. 예컨대 '불은 따뜻하며 마른 것, 물은 차갑고 촉촉한 것, 저 바깥 들판에 따뜻함과 건조함이, 차가움과 촉촉함이, 따뜻함과 촉촉함이 서로 뒤섞여 작용한다. 이것이 두루 뒤섞여 지구표면을 덮고 식물세계에 작용,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이다(위 책, 201). 이것이 에테르체의 느낌이다.
핵심은 에테르체의 느낌을 아는 것과, 현대 과학이 요구하는 대로 원소의 집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슈타이너에 따르면 인간은 그리스시대까지만 해도 에테르체의 느낌을 파악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반면은, 인류가 15세기 과학혁명 이후로 인간을 원소의 집합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둘의 차이가 궁금해진다.
앞에서 예를 든 단호하게 말한 사람은 현대 과학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렇게 살아가면 위 문장에서 말하는 대로 현대 과학이 말하는 대로 살아가게 된다. 즉 현대 과학은 인간이 70여가지의 원소로 이루어졌기 떄문에 정신이 에너지를 내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즉 인간이 죽음을 향해 가는 연령대가 되면, 원소의 부패가 시작된다. 즉은 후 시체가 되어서 72가지 혹은 74가지 원소가 반응하는 법칙에 따라서 부패하는 것이다. 요컨대 인간에게서 정신의 역할이 사라져 버렸다.
필자가 고마운 마음이 들어서 이런 저런 도움이 되고자 한 것은 필자의 에테르체의 느낌에 대한 반응이다. 더불어 상대 역시 상대의 에테르체가 반응한 결과다. 상대의 에테르체가 필자의 마음(느낌)을 헤아려서 이 사람을 도와주어야겠다는 마음을 낸 것이다. 즉 상대의 에테르체가 '연민'과 같은 느낌을 감지하였다. 결과 필자의 마음에도 연결이 되어서 필자도 도와주어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이렇게 에테르체의 마음, 느낌이 일어나야 하는 이유가 뭘까? 첫째, 가까이 보면, 위에서 보듯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얻는다. 요컨대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떄 누군가의 정보가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 둘째, 인간이 원소 존재가 아닌 에테르체의 존재로 에테르체가 활성화된다. 에테르체가 인간의 생명의 힘이므로, 생기가 생긴다. 무엇을 하더라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이 내면에서 나오게 된다.
셋째, 에테르체는 우주 지혜이다. 우주 지혜란 우주의 정보를 의미한다. 우주 정보란 '직관'이다. 직관은 상상에서 영감으로 나아가 마지막에 얻는 우주정보이다. 이런 지혜가 인간의 정신과학적인 요소, 육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 그리고 자아가 발달하면 얻게 된다. 예를 들면 이와 같이 필자가 얻는 정보가 일종의 직관이다. 만약 단호하게 말한 주인이 자신의 에테르체의 느낌을 파악했다면, 이렇게 대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아가 말하면 단호하게 말한 주인은 자신의 문제에서 어떤 직관을 얻을 확률이 낮다. 물론 이와 같은 정신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한다. 만약 안다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은 분명하다는 생각은 든다.
결론은 자신의 정신을 성찰해야 한다. 문제는 쉽지 않다는 것이지만,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도 없다. 두 가지 선택이 있다. 자신의 정신의 에너지가 고갈되어가는 시점에 먼지처럼 해체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정신을 활성화해서 새로운 에너지를 생성할 것인가이다. 자신의 에너지를 생성시킬려면 소위 말하는 기운줄(?)을 연결시켜야 한다. 기운줄이란 정신이 우주에 연결되는 줄이다. 우리 민족설화에 나오는 썩은 동아줄(호랑이)이 이것의 비유라는 생각이 든다. 정신이 우주에 연결되는 줄, 그 줄은 연결된 사람만이 연결시켜줄 수가 있다. 우주에 이 줄이 연결된 사람이 스승이다. 이런 관점에서 스승이 참 중요하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정신을 성찰헤서 자신의 정신과학적 요소를 발달시키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