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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온산 제단(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한 논리로 완전해독) 원문보기 글쓴이: 티끌
성경은 21세기 우리들에 대한 기록이다
신구약 성경을 예언책이라고 한다. 무엇에 대한 예언인가?
오늘날 우리시대에 이루어질 구원에 대한 예언이다. 구약성경도 신약성경도
모두 오늘날
우리시대에 이루어질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미리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신구약성경을 공히 예언책이라고 한다.
최초의 성경인물은 6천년전 아담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6천년전 아담 때부터 오늘 우리들에 대한 기록을 예언으로
남기신 것이다. 간단히 말해 오늘 우리들에 대한 "구원" 이라고 말했으나,
구원에는 반드시 먼저 율법이 주어지고.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결과에 대해
심판을 하고, 그 심판 이후에 구원을 주시게 된다.
때문에 성경은 아담때부터
바로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 대한 율법과 심판과 구원에 대한 기록이다.
그리고 또한 성경을 봉한책이라고 한다. 어떻게 봉했을까? 성경을 잠을쇠로
잠갔는가? 대못을 쳤는가? 아니다. 성경은 누구나 펼쳐서 얼마든지 눈으로
읽을 수 있다. 다만 그 뜻을 잘 모르기 때문에 봉한 책이 된다.
즉 오늘날
우리가 받을 율법/심판/구원 등에 대한 기록인데, 그러한 것들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눈으로 읽기는 읽고 보기는 보아도 그 뜻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봉한 책이다. 수백번을 읽어도 왜 깨달을 수 없는 봉한 책이 될까?
그 이유는 이렇다.
먼저 구약에서 예를 들어본다.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를 옛적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의 가족사로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봉한 책이다.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를 옛적 노아시대의 가족사로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봉한 책이다.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를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의 가족사로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봉한 책이다.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를
옛적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로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봉한 책이다.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를 파란만장한 이스라엘민족사와 열두지파와 족장들로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봉한 책이다.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를 고대 애굽, 앗수르, 바벨론 등의
역대제국들과 왕들과 온갖 짐승들의 이야기로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봉한책이다.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를 역대 선지자들의 여러가지 예언서와 이상과 환상과
꿈 등으로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봉한 책이다.
다음은 신약에서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를 예수님 당시의 육체의 피흘리는 구속사 이야기로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봉한 책이다.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를 세례요한이
처음엔 예수님을 인정했으나 나중엔 예수님을 부인하는 반역자의 모습으로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봉한 책이다.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를 예수님이
여러 가지 천국비유로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봉한 책이다.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를 예수님이 죽은자들을 살리시고 병든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시고
예수님 자신이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시며 여러 가지 이적기사를
행하신 행적으로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봉한 책이다.
이와 같이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발생했던 과거의 역사와
과거의 사물의 제도와 과거의 행동양식과 과거의 언어로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성경은 읽기는 읽고 보기는 보아도 깨달을 수 없는 봉한 책이며
예언책이 되는 것이다.
세상의 여타 예언들은 화자가 미래에 대해 단순히 서술하는 형식을
취하지만, 살펴보았듯이 성경의 예언은 독특하다. 사실적인 고대 가족사와
이스라엘민족의 역사로 이루어진 독특한 형식의 예언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따라서 대개의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때 그것을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로
변환해서 읽지 못하고 액면 그대로 그 당시 흘러간 과거의 이야기로 읽고
만족한다. 에덴동산의 이야기는 옛적 아담과 하와에게 국한시켜버리고 만다.
출애굽을 시작으로 구비구비 전개되는 이스라엘민족사는 이스라엘사람들의
역사로 만족해버리며 여러 족장들에 대한 기록 또한 그러하다.
그리하여 심지어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계시록의 인맞은자
144000도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할 정도다. 그리고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천년 전 예수님의 초림때 베풀어주신 여러 가지 이적기사나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그 자체로 이미 구원을 다 이루고 천국을 다
성취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는 점이다.
초림때 이미 구원과 천국을 다 성취시킨 세상이라면, 어찌하여 이토록 여전히
억조창생들이 아비규환으로 뒤끓는 사망세상인가를 묻는다면,
그들은 한사코 믿고 죽어서 천당에 가버리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그러나 성경은 죽어서 천당가는 이야기가 아니고 이 세상자체가 낙원이 되고
눈물도 사망도 전쟁도 폭력도 없는 지상천국이 되는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그 기록이 모두 성경기록 당시의 나라와 사람들과 여러 가지 사건들과
행동양식들과 언어와 이름들을 빙자해서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를
기록했음을 알아야 한다.
이처럼 21세기 우리세대의 이야기를 저 육천년 전에서부터 이천년전 시대의
사건들로 빙자해서 기록했기 때문에 성경예언은 봉한 책이 되고 있다.
즉 세상의 여느 예언서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성경을 풀어보겠다고 벼르는 사람들은
또 어떠한가?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한결같이 세상의 여느 예언서 풀이하듯이
성경의 비유문자 단어 한자 한자를 불철주야 연구하며 또한 원전문자 공부에
총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자칭 메시야들은 의례히 비유문자 단어를
해석한답시고 예컨데
"나무는 사람이고, 새는 성령이고, 무엇은 무엇이다" 라는 식으로
성경의 비유문자 단어를 고정화/정형화 해서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이란 오늘 우리들에 대한 이야기를 과거의 문자로 기록한 것이므로
반드시 문맥을 통해 풀어야한다. 다시 말해 오늘의 사건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만이 성경문맥을 통해 공개적으로 그것을 입증해내는 것이 성경풀이가 된다.
즉 오늘의 일관된 일련의 사건을 증거하는 일이 성경풀이가 되기 때문에,
성경의 단어 한자 한자에 초점을 둘것이 아니라, 앞뒤 문맥에 초점을 두어
성경문장 전체가 아우러져 하나의 논리로 풀어져야 한다.
이처럼 성경기록과 오늘의 사건을 일치시키는 작업이 성경풀이가 되기 때문에
단어 자체에 초점을 두고 어디서든지 나무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어디서든지 무엇은 무엇이라고 정형화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비유문자 한자 한자를 고정화/정형화해서 가르치거나 원전의 문자
한자 한자를 공부해서 성경을 풀고자 한다면 그것은 성경문자 자체만을 풀고
있는 것이지 오늘의 일련의 사건을 증거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이만 저만한
넌센스가 아니다.
단어 한자 한자를 아는 일은 별 의미가 없다.
단세포의 단어를 훌쩍 뛰어넘어 오로지 문맥을 통해 전체적인 스토리를
아우러서 하나의 정답의 논리를 도출해내는 성경풀이가 되어야 한다.
성경 어느 곳에서든지 단세포의 단어문자는 그 의미가 얼마든지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그리고 성경은 반드시 상반된 언어로 가득하기 때문에
단어문자에 초점을 두면 안된다. 예컨데 "새하늘과 새땅" 이라는 문자에 대한
기록이 계시록 21장 1절에도 나오고 이사야 65장 17절에도 나오는데,
계시록과 이사야에서 알려주고 있는 새하늘과 새땅에 대한 상황은 아주 다르다.
계시록의 새하늘과 새땅은 그 문장 스토리가 완전무결한 지상천국을 뜻하고,
이사야에서 알려주고 있는 새하늘과 새땅은 그 문장 스토리가 지상천국이
아직 아니며, 다만 보다 나은 세상상황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전자는 그리스도의 천년통치가 끝난 이후의 일곱째날의 영원한 안식을
말하고 있고, 후자는 그리스도의 천년통치 기간을 뜻하고 있는 새하늘과 새땅이
되고 있다. 이처럼 단어문자로는 동일한 새하늘과 새땅이라고 해도 그 전체적인
스토리에서 전자와 후자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이번에는 원어공부를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에 대한 예를 들겠다.
계시록 11장 11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두 증인에게 들어가는 생기가 있고
계시록 13장 15절에서 뒤에 나온 짐승이 먼저 나온 짐승에게 주는 생기가
있는데, 그 둘의 생기가 모두 원어로서도 동일한 이름의 생기라는 점이다.
어찌하여 하나님이 증인에게 주시는 생기와 짐승이 짐승에게 주는 생기가
원어로서도 같단 말인가?
때문에 원어로 성경을 풀어낸다고 큰소리 칠 일이 전혀 못된다는 점이다.
배워서 나쁠것이 없고 유익한 점도 있으나 원어공부가
반드시 성경을 풀어준다는 생각은 반드시 지워야 한다.
하지만 문맥으로 푼다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증인에게 주는 생기는
"생명의 로고스"가 될것이고, 짐승이 짐승에게 주는 생기는
"사망의 로고스" 가 될것이다.
그러므로 비유문자 자체에 초점을 두면 안된다. 그것은 허망한 일이다.
오로지 전체적인 문맥을 통해 오늘의 사건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 성경은 해석이 아니라 증거라고 해야 말이 맞다.
예수님을 일컬어 "증인" 이라고 하지 아니했던가?
우리 모두 예수님을 따라서
성경말씀을 올바로 증거하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 무엇에 대한 증거인가?
비유로 된 성경문자 한자 한자도 중요하다 하겠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성경은 전체가 봉해진 책이기 때문에
오늘의 사건을 옛적 언어로 기록한 성경문맥을 통한 말씀과 오늘 우리들에
대한 일련의 실상의 사건을 일치시켜내는 참신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성경말씀과 오늘 우리세대의 사건을 일치시켜내는 증거가 성경풀이가 되기
때문에 이 성경은 과거엔 풀수 없는 일이다. 과거의 바울도 베드로도 성경을
풀 수 없었다. 아니, 예수님도 초림때는 구약성경 한줄 풀어주신 일이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그날과 그 시에 대해서 아들(초림주)도 모른다고 하지
아니했던가?
왜냐면 성경은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어떤 일련의 사건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깨닫고 성경을
일치시켜 입증해내는 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곧 이 시대에 다시 오신
재림 예수님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마지막 우리세대의 사건을 기록한 예언서요, 봉한 책이므로
다니엘 12장 4절에서
"다니엘아, 미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라고 했던 것이다.
말씀이 풀어지는 이 시대는 그야말로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는
인터넷시대를 살게 되며, 지식이 더하여진다고 했듯이 정보화사회의
지식열풍이 지구촌에 불어닥치고 있음이다.
이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성경은 과거의 이야기가 절대로 아니다.
오늘 우리세대의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바로바로 우리들에 대한 율법과
심판과 구원을 다루는 중차대한 이야기인데 기독인들이여 어이할꼬?
하나님은 21세기 우리세대에 포커스를 두고 저 6천년 전부터 성경기록을
해왔다. 구약에서 양과 송아지를 잡아서 제단에 바치게 한것은 일차적으로
초림 예수님의 육체의 피에 의한 대속을 상징했던 모형의 피였다.
예수님이 그 모형에 대한 실상인데, 하지만 실상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이 초림때 흘려주신 육체의 혈액은 비유의 피이며 의문의 피였다.
예수님의 육체의 피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는 우리죄를 손톱만큼도
도말할 수 없으므로 여전히 비유의 피이며 의문의 피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이 초림때 흘려주신 이러한 육체의 피를 받고
그것을 성급하게도 탐욕적으로 구원의 피라고 믿어버리는 부정직한 자인지,
아니면 그 육체의 피로는 하나님을 아직 도무지 다 알 수 없는 비유의 피이며
의문의 피라고 도리질 할 수 있는 정직한 자인지를
시험하시는 율법의 피였던 것이다. 비유의 피이며 의문의 피이기 때문에
율법의 피인 것이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한 에덴동산에서의 그 시험이 바로 동일한 율법임을
왜 모르는가? 뱀도 있었고 먹으면 죽는 금기의 선악과도 있었던 에덴동산은
낙원이 절대로 아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바로 초림주의 복음을 받은
21세기 우리들의 신앙양심을 저울에 달아보시는 시험 1번지였던 것이다!
때문에 육체의 피를 흘린 예수님의 초림은 율법이지 구원이 아니며
천국이 아니다! 기독인들은 예수님의 육체의 혈액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믿고 있으나 육체의 혈액이야말로 에덴동산을 적시고 흐르는 사대 강줄기이며
그것은 파고 높은 시험의 격랑일 뿐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 에덴동산의 시험과 율법을 받고 그 시험에 무너지고
그 율법을 범한 죄인으로 살아왔다. 에덴동산 범죄의 실상으로 오신
초림주 이래, 우리는 죄인으로 입증되었으므로 이제 마침내 이천년이 흘러
심판을 받고 구원에 진입하게 된다.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이같은 율법, 심판, 구원 등이 모두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해당되는 것임을 알자.
경성해서 경청할 것인가? 말것인가? 듣고 구원받을 것인가? 말것인가?
기독인들이여, 부디 깨닫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