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건국년도 즉 우리가 아는 고구려(추모가 건국한...)는 단언하건데
정확히 708년이다.
왜냐하면 고구려 말기 귀족집안의 자제인 고자라는 이의 묘비에 고구려의 역사는 708년이라고 나와있기 때문이다. 고자가 고구려의 귀족집안이라는 것을 안다면 이 708년은 고구려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라 해도 무방하다.(<삼국사기>는 705년으로 되어있음)그러므로 여기 이사이트에서 나오는 고구려의 역사가 900년이라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본다. 물론 고구려 이전(추모의 고구려)의 고구려를 말한다면 맞는것이지만 우리가 말하는 것은 추모의 고구려이므로 <삼국사기>의 B.C 37 - A.D 668 은 맞게 되는것이다.
그런데 왜 추모의 고구려 역사를 900년이라 하는가?
이것에 대한 주장으로 북한이 있었으며 단재 신채호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위에서 보듯이 고자의 묘비에서 708년이라 나와있으므로 잘못된 주장이다. 즉 북한과 단재 신채호가 살아있을당시의 경우를 생각하본다면 왜 고구려의 역사가 900년이라 주장한지 알것이며 특히 단재 신채호의 대표적 논문집인 <조선상고사>를 본 분이시라면 더 잘 이해할것이다.(단재 신채호의 주장은 김부식이 묘청을 이김으로 인하여 조선이 식민지가 되었다고 보았다.그러므로 그의 논문집을 보면 김부식에 대한 부정적 입장이 많이 보이며 이 입장을 우리 학계에서 많이 받아들였으나 요즘 새로운 시각이 대두되고 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왜 추모 고구려의 역사가 900년이라 주장한 근거는
<삼국사기>에 당의 시인(혹은 책사) 가언충이 당태종에게 <고구려 비기>라는 책에서 고구려가 900년 되는 때에 80살 먹은 노인에게 망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또한 고구려현이라는 이름이 <삼국사기>의 B.C 37년 이전부터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한사군중 하나인 현도군에 고구려현이라는 현이 있다.)그리고 <삼국사기> 문무왕조에 보면 문무왕이 보덕국왕인 고안승에게 보내는 국서에 고구려의 역사가 800년이라 나와있기때문에(단재 신채호는 이 800년설을 조작된 것 즉 900년설을 깍은 증거라 말하기도 하였다.) 대체적으로 이 3가지 근거를 가지고 추모 고구려가 900년이라 주장하는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추모 고구려 이전의 것까지 합친것이라 봐야한다. 위의 고구려의 역사는 708(혹은 705)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900-700=200년 200년간의 (추모 고구려 이전의)고구려 역사는 무엇이란 말인가?
위의 200년의 공백은 추모 이전의 고구려 즉 <삼국사기>에 보이는 졸본부여라고 봐야할것이다. 그런데 이 200년의 공백기간에 고구려와 이름이 같은 고구려현 혹은 구려라는 이름이 등장하므로 졸본부여=구려=고구려현 이라 가정할수도 있다. 그럼 고구려현의 고는 수식어로 볼수 있다. 그렇다면 이 수식어 고는 졸본부여의 왕실의 성씨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졸본부여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부여"라는 이름이 들어있으므로 부여의 왕성이 해씨이니 졸본부여의 왕성도 해씨라 가정할수 있다. 그렇게 볼경우 위의 고씨가 왕성이라는 것과 해씨가 왕성이라는 것으로 되어 모순되어 보이나 이렇게 해석할 경우 모순이 아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졸본부여=구려=고구려현 이라 본 이상. 왕성이 해씨 혹은 고씨로 나오는것은 졸본부여(구려)안에서 왕실교체가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즉 해씨-고씨로 왕실 교체가 이루어졌다고 보는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점은 해씨의 해(解)와 고씨의 고(高)의 뜻이 같다.(해(解)=신성,광명-높은데 위치------고(高)=높음-신성함-------해(解)=고(高)=높은데 위치함 신성함)
그러므로 해씨라는 왕족안에서 고씨라고 하는 새로운 방계족속이 나왔다고 볼수도 있다. 해씨라는 왕실안에서 혁명이 일어나 고씨가 해씨에서 나와 왕실이 된것이라 할수 있는것이다.그럼 위의 것을 한번 정리해보겠다.
①졸본부여=구려=고구려현
②졸본부여=해씨(부여의 왕성=해씨--부여의 민족이 세웠다 가정함)
고구려현=고씨(구려=고구려현 같으므로 고는 왕성으로 봄)
③해씨=고씨(높고 신성함)
-해씨안의 방계 집단이 혁명을 일으켜 왕실이 됨 (해씨->고씨)
위에서 정리하듯이 본래 졸본부여의 왕실은 해씨였지만 혁명비슷한것이 일어나 해씨족 안의 방계집단인 고씨가 일어나 해씨와 의미가 같은 고씨로 개칭한것이라 본다. 그 증거로 <삼국사기> 문무왕조에 나오는 고구려 800년설이다. 즉
고구려의 총 역사(추모 고구려 합)=졸본부여(해씨)->고구려(고씨)->추모 고구려
졸본부여(100년)->고구려(100년)->추모 고구려(700) 이렇게 본다면 고구려의 역사가 900년이 됨 동시에 <삼국사기> 문무왕의 800년설도 맞아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한무제가 조선(고조선)을 멸하고 세운 한사군의 하나인 현도군에 위치한 고구려현이라는 지명이 B.C108년에 등장하므로 추모 고구려 이전의 고구려의 역사가 100년이라는데 맞춰지게 되어 무리가 없지 않게 된다.
그러하기에 조선을 멸하고 세운 현도군에 고구려를 누르기 위하여 고구려현을 세운것이다. 그러다 (추모)고구려의 공격이 강해지자 점차 이동하여 요동에 위치한 곳에 다시 현도군을 세우고 고구려현이라 칭하게 된것이다. 하지만 전자의 고구려현은 그 지역에 있는 왕국인 고구려를 누루기 위한 방법이었다면
후자의 고구려현은 국력이 강해진 고구려를 완전히 없엘수 없으므로 (추모)고구려를 교란시킴과 동시에 무역을 하기 위한 방법으로 만든 것이라 할수 있다.
총 결론을 내자 하면 졸본부여=구려=고구려현이라 할수 있으며 졸본부여의 왕의 성은 해씨->고씨로 해씨안의 방계집단이 혁명을 일으켜 해씨와 의미가 같은 고씨라고 칭하며 나라를 얻은것이다. 그리고 해씨 고구려 즉 졸본부여는 100년간 존속하였으며 그 뒤를 이은 고씨 고구려도 100년간 존속하였다.(중국사서와 <삼국사기> 문무왕조 참조)그러다 부여의 추모가 남하한것이며 고씨 고구려의 왕녀인 소서노와 결혼하여 나라를 세운것이다.그러하므로 고구려의 역사가 900년이라 하는것은 졸본부여-고씨 고구려-추모 고구려 이 3계통의 고구려를 하나로 총칭하여 부르는 것으로서 우리가 흔히 아는 추모 고구려는 정확히 700년 정도이다. 하지만 많은 재야 학자들과 북한,단재 신채호의 필요에 의하여 고구려의 역사가 900년으로 전 2계통의 고구려까지 합하여 버린것이다. 그러하므로 만약 고구려의 역사가 900년이라 말할것이라면 추모의 고구려는 700년이다 라고 주를 달아야 할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설명할 경우 고구려 초기 왕실 교체에 관하여 해답을 얻을수 있게 된다.(자세한 것은 "고구려 초기 왕실교체에 관하여" 참조)즉 추모는 고씨인데 반해 아들인 유리는 해씨인것에 대하여 말이다.
이것은 부여남하 세력인 추모와 고씨 고구려의 세력과의 만남으로 추모가 고씨 고구려의 성인 고씨로 성을 개칭하여 고씨 고구려의 세력을 자기것으로 만든 수단이었던 것이며, 전왕실인 해씨와 견제하게 되는것이다. 하지만 유리의 남하로 인하여 추모세력과 고씨 고구려 세력(계루부)간의 알력이 생기자 전왕실인 해씨(연나부=소노부)가 정권 복귀를 위하여 남하세력인 유리와 연합하게 된것이다. 그리하여 해씨(연나부)의 성인 해씨를 유리는 그대로 자기의 성인 해씨를 그대로 나두고 자기 아버지의 개칭한 성인 고씨를 따르지 않은것이다.
이만 논하겠고, 더 자세한 것은 "고구려 초기 왕실 교체에 관하여"를 참조하길 바란다.
(위의 글을 읽다보면 억측이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지금 시간이 없으므로 매우 거친글을 썻다는 점 죄송하게 여긴다. 하지만 이것을 다시 추수려 새로이 부드럽게 글을 다시 올리도록 하겠으니 양해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