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
김종직(金宗直) 1431년(세종 13)∼1492년(성종 23). 조선 초기의 문신.
시호: 문충(文忠) 道德博文曰文。廉方公正曰忠。
도와 덕이 널리 알려진 것을 문(文)이라하고,
청렴하고 공정(公正)한 것을 충(忠)이라한다.
참고: 문간(文簡) 博文多見曰文; 居敬行簡曰簡
문학이 넓고 본 것이 많은 것이 ‘문(文)’이고
경(敬)에 거(居)하여 간소(簡素)하게 행동함이 ‘간(簡)’이다.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계온(季昷), 호는 점필재(佔畢齋). 밀양 출신.
아버지는 사예 숙자(叔滋)이고, 어머니는 사재감정(司宰監正) 박홍신(朴弘信)의 딸이다.
1453년(단종 1)에 진사가 되고,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1462년 승문원박사로 예문관봉교를 겸하였다.
이듬해 감찰이 된 뒤 경상도 병마평사‧이조좌랑‧수찬‧함양군수 등을 거쳐 1476년 선산부사가 되었다.
1483년 우부승지에 올랐으며, 이어서 좌부승지‧이조참판‧예문관제학‧병조참판‧홍문관제학‧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고려말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은 아버지로부터 수학, 후일 사림의 조종이 된 그는 문장‧사학(史學)에도 두루 능하였으며, 절의를 중요시하여 조선시대 도학(道學)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나 많은 시문과 일기를 남겼으며, 특히 1486년에는 신종호(申從濩) 등과 함께 《동국여지승람》을 편차(編次)한 사실만 보더라도 문장가로서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무오사화 때 많은 저술들이 소실되었으므로 그의 진정한 학문적 모습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후일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사관으로서 사초에 수록, 무오사화의 단서가 된 그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중국의 고사를 인용, 의제와 단종을 비유하면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것으로, 깊은 역사적 식견과 절의를 중요시하는 도학자로서의 참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정몽주‧길재 및 아버지로부터 전수받은 도학사상은 그의 제자인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유호인(兪好仁)‧남효온(南孝溫)‧조위(曺偉)‧이맹전(李孟專)‧이종준(李宗準) 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의 도학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김굉필이 조광조(趙光祖)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시켜 그 학통을 그대로 계승시켰다.
이처럼 그의 도학이 조선조 도통(道統)의 정맥으로 이어진 것은 〈조의제문〉에서도 나타나듯이 그가 추구하는 바가 화려한 시문이나 부‧송 등의 문장보다는 궁극적으로 정의를 숭상하고, 시비를 분명히 밝히려는 의리적 성격을 지닌 것이기 때문에 이를 높이 평가하였던 때문이다.
세조‧성종대에 걸쳐 벼슬을 하면서 항상 정의와 의리를 숭상, 실천하였는데, 이와 같은 정신이 제자들에게 전해졌고, 실제로 이들은 절의를 높이며 의리를 중히 여기는 데 힘썼다. 이러한 연유로 자연히 사림학자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고, 당시 학자들의 정신적인 영수가 되었다.
이들 사림들이 당시 훈척계열(勳戚系列)에 의하여 빚어지는 비리와 비도를 비판하고 나서자, 이에 당황한 훈척계열인 유자광(柳子光)‧정문경(鄭文烱)‧한치례(韓致禮)‧이극돈(李克墩) 등이 자신들의 방호를 위해 1498년(연산군 4)에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그 결과 많은 사림들이 죽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고, 생전에 써둔 〈조의제문〉으로 빚어진 일이라 그도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으며, 밀양의 예림서원(藝林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김천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의 덕림서원(德林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점필재집》‧《유두류록(遊頭流錄)》‧《청구풍아(靑丘風雅)》‧《당후일기(堂後日記)》 등이 있으며, 편저로 《일선지(一善誌)》‧《이존록(彝尊錄)》‧《동국여지승람》 등이 전해지고 있으나, 많은 저술들이 무오사화 때 소실된 관계로 지금 전하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한때 문간(文簡)으로 바뀌었다가 숙종 때에 다시 환원되었다.
조의제문(弔義帝文)
‘정축년 10월 어느 날에 내가 밀성(密城)에서 경산(京山)으로 오던 도중에 답계역(踏溪驛)에서 자는데, 꿈에 칠장복(七章服 제왕의 의복)을 입은 신인이 근심된 빛을 하고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초 회왕(楚懷王)의 손자인 심(心)인데, 서초패왕(西楚霸王 항우)에게 피살되어 침강(郴江)에 버림을 받았다.’ 하고서, 그대로 홀연히 사라졌다. 내가 놀라 깨어서 생각하기를, ‘초 회왕은 남초(南楚)의 사람이요, 나는 동이(東夷)의 사람이며, 남초는 거리가 여기서 만여 리나 될 뿐 아니라, 세대로 말한다 하더라도 천 년이 넘었는데, 이제 와서 꿈에 보이니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 하고, 또 사기를 상고하여 보니, 의제를 강에 던졌다는 말은 없으니, 아마도 항우가 사람을 시켜 몰래 죽이고 그 시체를 강물에 던진 것이었던가. 그것은 알 수 없다. 드디어 글을 지어 조상한다. 오직 하늘이 사물의 법칙을 제정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누가 사대(四大) 오상(五常)의 존귀함을 알지 못하겠는가. 중국에는 풍요하고 이적(夷狄)에는 인색할 이 없으니 어찌 옛날에는 있었고 지금인들 없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동이 사람이며, 또 천 년이나 뒤에 났지마는, 공손히 초나라의 회왕에게 조상하노라. 옛날 조룡(祖龍 진시황)이 어금니와 뿔(牙角 무력)을 희롱할 적에 사해의 파도가 크고 거칠었었다. 비록 전유추예(鱣鮪鰍鯢 철갑상어ㆍ다랑어ㆍ미꾸라지ㆍ도롱뇽) 같은 잔 물고기도 생명을 보호하지 못하고 그물에서 새어 나려고 몸부림친다. 그때 육국(六國)의 유손[遺祚]들은 결딴나고 쫓기어 겨우 평민되는 것을 면하였다. 양(梁)은 남쪽 나라 대장의 후예로서 고기와 여우의 뒤를 이어 거사(擧事)하였다. 왕을 구해 얻어서 백성들의 바람을 따랐고 웅역(熊繹 초 나라 시조)의 제사 없던 것을 이었도다. 하늘의 옥새를 쥐고 남쪽을 향하고 앉으니 천하에 진실로 우씨(芋氏 초 나라 임금의 성)보다 높은 이 없었다. 장자(長者)를 보내어 관중(關中)에 먼저 들어가게 하였으니, 그 역시 그의 인의(仁義)를 볼 수 있었다. 승냥이처럼 사납고, 이리처럼 탐하는 자 마음대로 관군(冠軍 총대장 송의(宋義))을 죽였으니, 어찌 먼저 잡아 도끼날에 피 묻히지 않았던가. 슬프다. 대세가 그렇지 못하였으니 나는 더욱 왕에게 황구하게 여기는 바이라, 도리어 그들에게 식혜나 초와 같이 먹히고 말았으니 과연 천도가 거꾸로 되는도다. 침산(郴山)이 우뚝 하늘을 찌를 듯, 태양빛 어둑어둑 저물어가고, 침강(郴江)은 주야로 흘러흘러 물결이야 일어나건만 다시 오진 못하도다. 하늘같이 깊고 땅같이 오래된 한 언제나 다할쏜가. 혼백이 이제까지 아직도 방랑하며 떠도누나. 나의 마음이 쇠나 돌이라도 뚫기로 왕이 문득 내 꿈속에 나타났다. 자양(紫陽 주자)의 노련한 붓을 본뜨니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근심된다. 구름 같은 술잔 들어 땅에 부으며 영령(英靈)이 와서 흠향(歆享)하기 바로옵네.
丁丑十月日。余自密城道京山。宿踏溪驛。夢有神人。被七章之服。頎然而來。自言楚懷王孫心。爲西楚霸王項籍所殺沈之郴江。因忽不見。余覺之愕然曰。懷王南楚之人也。余則東夷之人也。地之相去。不啻萬有餘里。世之先後。亦千有餘載。來感于夢寐。玆何祥也。且考之史。無投江之語。豈羽使人密擊而投其尸于水歟。是未可知也。遂爲文以弔之。惟天賦物則以予人兮。孰不知其尊四大與五常。匪華豐而夷嗇兮。曷古有而今亡。故吾東夷人又後千祀兮。恭弔楚之懷王。昔祖龍之弄牙角兮。四海之波殷爲衁。雖鱣鮪鰌鯢曷自保兮。思網漏以營營。時六國之遺祚兮。沈淪播越僅媲夫編氓。梁也南國之將種兮。踵魚狐而起事。求得王以從民望兮。存熊繹於不祀。握乾符而面陽兮。天下固無尊於芋氏。遣長者以入關兮。亦有足覩其仁義。羊狠狼貪擅夷冠軍兮。胡不收以膏諸斧。嗚呼勢有大不然者。吾於王益懼爲醢醋於反噬兮。果天道之蹠盭。郴之山磝以髑天兮。景晻曖而向晏。郴之水流以日夜兮。波淫泆而不返。天長地久恨其曷旣兮。魂至今猶飄蕩。余之心貫于金石兮。王忽臨乎夢想。循紫陽之老筆兮。思螴蜳以欽欽。擧雲罍以酹地兮。冀英靈之來歆云。
해동잡록 2 본조(本朝)
○김종직(金宗直)의 본관은 선산(善山)이며 자는 계온(季昷)이요, 숙자(淑滋)의 아들로, 스스로 호를 점필재(佔畢齋)라 하였다.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몸가짐이 단정 성실하고 학문이 정밀 심오하며, 문장이 고고(高古)하여 당대 유종(儒宗)이 되었다. 사람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여 전후(前後)의 명사들이 많이 그 문하에서 나왔다. 성종이 중히 여겨 발탁하여 경연에 두었고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벼슬에 있게 하면서 쌀과 곡식을 특사하였으며, 죽으매 시호를 문간(文簡)이라 하였다. 연산군 무오사화(戊午士禍)가 구천에까지 미쳐 유문(遺文)을 불태워 없앴는데 뒤에 잿더미에서 주워 모아 세상에 간행하였다.
○ 공은 타고난 자질이 매우 높아 총각 때에 벌써 시를 잘한다는 소문이 있었으며, 매일 수천 마디를 기억하였고, 나이가 약관(弱冠)도 못 되어 문명(文名)이 크게 떨쳤다. 〈지서(志序)〉
○ 친상을 당하여 복상을 마치자 금산(金山) 황악(黃岳) 밑에 서당을 짓고 그 옆에 못을 파고 연(蓮)을 심어 놓고 서재의 이름을 경렴당(景濂堂)이라 하였는데, 그것은 무극옹(無極翁 주염계)을 사모하였기 때문이다. 매일 그 안에서 시만 읊고 세상일에는 뜻이 없는 것 같았다. 〈비서(碑序)〉
○ 공이 일찍이 승무원에 들어갔는데 함종군(咸從君) 자익(子益) 어세겸(魚世謙)이 본원의 선진(先進)이 되어 공의 시를 보고 크게 탄식하기를, “가사 나로 하여금 채찍을 잡고 그의 종이 되게 하더라도 달게 받았을 것이다.” 하였다. 〈비서(啤序)〉
○ 공이 경연에 들어가 임금을 모시는데, 말이 길지 않으나 뜻이 통하여 강독이 가장 뛰어났으므로 임금의 사랑이 그에게로 쏠렸다. 〈비서(碑序)〉
○ 공은 몸집이 작았으므로 어자경(魚子敬 어세공(魚世恭))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 만약 그에게서 누가 재주를 빼앗아 간다면 한 어린아이만 남을 것이다.” 하니, 듣는 사람들이 깔깔 웃었다. 상동
○ 공은 천성이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아버지가 병들어 야위매 공이 상심하여 〈유천부(籲天賦)〉를 지었다. 상동
○ 공의 아버지는 길재(吉再)에게서 배웠으며, 한때의 선비들이 모두 종직(宗直)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마음을 같이하고 뜻을 모아 끼리끼리 서로 따랐다. 이승건(李承健)이 그때 한림(翰林)이었는데 사기(史記)에 쓰기를, “남인(南人)이 서로 도와서 스승은 제자를 칭찬하고 제자는 스승을 기리어 스스로 한 당을 만들었다.” 하였더니, 그 후 이극돈(李克墩)이 승건(承健)의 사초(史草)를 보고 매양 직필(直筆)이라 칭찬하였다. 《유선록(儒先錄)》
○ 점필재(佔畢齋)가 답계역(踏溪驛)에 이르렀는데, 그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칠장복(七章服)을 입고 나타나 스스로 초회왕(楚懷王)이라고 하면서,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우(項羽))에게 죽음을 당하여 침강(郴江 호남성에 있음)에 잠겨 있다.” 하고는, 갑자기 보이지 아니하였다. 내가 깜짝 놀라 깨어서 말하기를, “ 회왕은 남초(南楚) 사람이요, 나는 동이(東夷)의 사람이다. 지역이 서로 만여 리나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시대의 차이가 또한 천여 년이나 되는데 내 꿈에 와서 나타나니 이 무슨 징조일까.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물에 던졌다는 말은 없으니, 아마 항우가 사람을 시켜 몰래 그 시체를 물에 던졌던 것이다.” 하고, 드디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슬퍼하였다.
홍치(弘治) 무오년(연산군 4년) 7월 17일의 전교(傳敎)에 이르기를, “한 비천한 선비로서 과거에 급제하여 형조 판서에 이르렀고, 임금의 총애가 조정의 으뜸이었다. 지금 그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편수한 사초(史草) 속에 부도(不道)한 말로 선왕조(先王朝)의 사실을 거짓으로 기록하고, 또 그의 스승 종직의 〈조의제문〉을 기재하고 말하기를, ‘충성과 의분의 뜻이 있다.’ 하였으니, 이것은 종직이 속으로 신하 노릇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품고 있음이 하루아침의 일이 아니니, 해당하는 죄명을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7월 27일에 역적 모의를 하였다고 하여 죽이고 종묘에 아뢰었다. 본전(本傳)
○ 유자광(柳子光)이 함양(咸陽)에 노닐면서 시를 지어 그 고을 원에게 현판에 새겨 붙이게 하였는데, 점필재가 이 고을 군수가 되어 말하기를, “자광이 어떤 작자인데 감히 현판을 한단 말이냐.” 하고, 떼어서 불사르게 하였다. 무오년의 화가 일어나매 선생이 무덤 속에서 극형을 받고 아울러 〈환취정기(環翠亭記)〉도 철거되었으니, 세상 사람이 함양에서 현판의 원한을 보복한 것이라 하였다. 본전(本傳)
○ 함양군에서 해마다 임금에게 차[茶]를 바쳤으나 이 고을에서는 차가 나지 않으므로 매양 백성에게 부과하니, 백성들은 돈을 주고 비싸게 사서 바쳤다. 점필재가 처음 이 고을에 와서 그 폐단을 알고 손수 《삼국사(三國史)》를 열람하다가 신라 때에 당 나라에서 차의 종자를 얻어다가 지리산(智異山)에 심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말하기를, “고을 함양 이 산 밑에 있으니 어찌 신라 때에 남긴 종자가 없겠는가.” 하고는, 여러 늙은이들에게 찾아 가서 물어 보았더니 과연 암천(巖川) 북쪽 대밭 속에서 몇 떨기를 얻었으므로 차밭[茶園]을 그 고장에 마련하게 하였더니, 몇 해가 안 되어 원내(園內)에 두루 번식하였다. 선생이 다원(茶園) 시 두 수를 지어 기록하였다. 본집(本集)
○ 함양 고을에 학사루(學士樓)가 있다. 학사 최치원(崔致遠)이 군수로 있을 때에 올라가 즐겼던 곳인데, 훗날 사람들이 이름 지어 학사루라 불렀다. 누각 아래에 매화 한 그루가 있는데 반은 마르고 썩었으나 가지는 아직도 정정하여 해마다 맨 먼저 꽃이 피었다. 점필재가 이 고을에 와서 보고 사랑하여 드디어 시를 지었는데,
학사루 앞에 홀로 섰는 신선이여 / 學士樓前獨立仙
만나보고 한 번 웃으매 옛모습이 의연하구나 / 相逢一笑故依然
가마 타고 지나다가 부여잡고 위로하노니 / 肩輿欲過還攀慰
올해는 봄바람이 너무 심하구나 / 今歲春風太劇顚
하였으니 이는 바람에 넘어질까 두려워해서이다. 상동
○ 황산강(黃山江) 상류에 도요저(都要渚)가 있다. 강가에 사는 백성이 거의 백 호나 되어 집들이 빽빽이 들어섰고 울타리가 서로 이어 있는데, 농사를 하지 않고 오로지 배를 부려 고기를 잡아 팔아서 재산으로 삼는다. 그 풍속이 순박하여 한 집에 손님이 오면 여러 집에서 술과 찬을 준비하기를 예의로 삼았고 관혼상제(冠婚喪祭)에 있어서도 모두 다 그러하였다. 만일 음란한 행동을 한 계집이 있으면 물가에 모여 의논하여 그 아낙을 배에 실어 물에 띄워 내쫓았다. 상동
○ 〈동도악부(東都樂府)〉 7수를 지었는데, 1, 회소곡(會蘇曲), 2, 우식곡(憂息曲), 3, 치술령(鵄述嶺), 4, 달도가(怛忉歌), 5, 양산가(陽山歌), 6, 대악[碓樂 방아타령], 7, 황창랑(黃昌郞)이다. 상동
○ 〈일본에 가는 사람을 전송하는 시[送人日本詩]〉에 이르기를,
오랑캐 네 길거리가 정연히 세 거리로 갈라져 있도다 / 蠻衢井井分三町
하였고, 주(註)에, 일본 도시의 도로가 모두 사방으로 통하는데, 정정(丁町)마다 중로(中路)가 있고 세 정(町)이 한 조(條)가 되고, 조 가운데는 큰 길이 정연하며 모두 9조가 있다. 상동
○ 점필재 시의 〈오매유장진(烏昧劉將盡)〉의 주(註)에, 오매초(烏昧草)는 동인(東人)이 오을배(烏乙背)라고 부르는 것으로써 하전(下田 토질이 좋지 못한 밭)에 나는데, 어떤 것은 손가락 크기만 하기도 하고 혹은 탄환같이 생긴 것도 있어 삶아서도 먹고 날로도 먹을 수 있다. 가뭄이 심하여 백성이 굶주리면 캐어다 먹는데, 이것은 범문정공(范文正公)이 진상한 오매초가 아닌가 한다. 매(昧)와 배(背)는 같은 음이니 동인의 말이 전하여 오을배(烏乙背 을방개를 말하는 듯)라고 한다. 상동
○ 공에게 〈일본 벼루〉라는 시가 있는데,
구리에 새긴 옥골(매화의 별칭)이 추호 같이 미묘하니 / 銅鑴玉骨妙秋毫
배에 싣고 들어와 해마다 부르는 값 비싸도다 / 海舶年年索價高
빛깔은 마간홍(짙붉은 빛) 같아 발묵을 잘하고 / 色似馬肝能潑墨
용미보다 미끄러우니 날아 올라갈까 두렵도다 / 滑勝龍尾恐飛騰
하였다. 그 주에, 벼루의 네 모퉁이에 밤나무 잎을 새겼는데 그 가장자리와 밤나무 잎이 극히 기교적이다. 상동
○ 귤(橘)과 유자[柚]는 제주에서 나는 것인데, 해마다 서울에 와서 바쳤다. 공이 〈탁라가(乇羅歌 탁라는 제주의 옛이름)〉를 지었는데,
집집이 열린 귤 흰 서리가 겨운데 / 萬家橘柚飽淸霜
대바구니에 따 담아 바다 건너 왔구나 / 採著筠籠渡海洋
대관이 받들어 대궐에 올리니 / 大官擎向彤墀進
소담스레 빛깔과 맛과 향기를 보전하도다 / 宛宛猶全色味香
하였다. 상동
○ 오매(烏梅)ㆍ대모(玳瑁)ㆍ흑산호(黑珊瑚)와 부자(附子)ㆍ청피(靑皮)는 세상에 이름난 물건인데, 물산(物産)으로 동국의 곳간일 뿐 아니라 정기(精氣)가 모두 사람을 살리도다. 점필재가 탐라 노래 14편을 지어 풍토와 물산을 대강 기록하였다. 상동
○ 나월상인(羅月上人)이 늘 소라 한 개를 품고 다니면서 혹은 산속에서 혹
은 성읍(城邑)에서 문득 불곤하였는데,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들으면 곧 상인(上人)이 온 것을 알았으므로 스스로 나승(螺僧)이라고 하였다. 선생이 시를 지어 보내기를,
다음날 홍류동에 들어가게 하면 / 他年許入紅流洞
소라 소리 울리며 푸른 산에서 나오리라 / 須遺螺音出翠嵐
하였다. 상동
○ 강인재(姜仁齋 강희안(姜希顔))의 《양화록(養花錄)》에 이르기를, “서울 지방에서 매화를 접붙이는 것은 모두 천엽(千葉) 홍백 매화로서 짝이 많은 열매를 맺는데, 곧 화보(花譜)에서 이른바 중엽매(重葉梅)라는 것이다.” 하였는데, 점필재가 말하기를, “담 밑에 한 꽃이 있는데 천엽도(千葉桃)와 같다. 빛깔은 연하고 짙은 것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곧 천엽홍매(千葉紅梅)라고 말하나 매화와는 같지 않다.” 하였다. 상동
○ 지리산(智異山) 서북쪽에 저연(猪淵)이 있어 고기가 여기에서 나는데, 매년 가을에는 용유담(龍游潭)으로 내려갔다가 봄이 되면 도로 저연으로 올라온다. 고기잡는 이가 바위와 폭포 사이에 그물을 쳐두면 고기가 뛰어오르다가 그물 안으로 떨어지는데, 등의 무늬가 가사(袈裟)와 같으므로 가사어라고 부른다. 점필재의 〈가사어〉라는 시가 있다. 상동
○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손자 인종(仁種)이 타던 말이 죽자 후원에 묻었다. 사람들이 그 조부의 풍도가 있다고들 하였다. 점필재 시에,
청백한 것을 참으로 그 자손에게 물려주었구나 / 淸白眞能遺子孫
하였다. 상동
○ 남을 위한 〈전원사시영(〈田園四時詠)〉이 있는데, 1, 매파춘색(梅坡春色), 2, 죽창하풍(竹窓夏風), 3, 국정추월(菊庭秋月), 4, 송대동설(松臺冬雪)이 그것이다. 상동
○ 금강산은 동쪽의 으뜸이고, 묘향산(妙香山)은 북쪽의 으뜸이요, 구월산(九月山)은 서남쪽의 으뜸인데, 두류산(頭流山 지리산)에 오르면 눈 안에 이상의 으뜸가는 세 산이 오히려 작은 언덕 같이 보인다. 《유산록(游山錄)》
○ 〈도연명(陶淵明)의 술주(述酒)에 화답하다.〉라는 시에,
유유의 찬시(임금을 죽이고 왕위를 뺏음)의 죄를 치고 / 誅劉裕纂弑之罪
연명의 충분의 뜻을 펴도다 / 發淵明忠憤之志
하였다. 본집(本集)
○ 유면(兪勉)ㆍ전가식(田可植)ㆍ정지담(鄭之澹)등과 선산부(善山府) 연봉리(延鳳理)에 살면서 모두 장원에 뽑히었으므로 그 동네를 장원방(壯元坊)이라고 불렀는데 점필재 시에,
마을 사람이 예부터 교육을 중히 여기어 / 鄕人從古重膠厗
뛰어난 인재를 해마다 조정에 바치네 / 翹楚年年貢舜廊
한낱 성서의 연봉 마을을 / 一片城西廷鳳里
오가는 이들이 장원방이라 가리키네 / 行人指點壯元坊
하였다. 상동
○ 최 선생 한공(漢公) 태보(台甫)가 점필재 계온(季昷)과 함께 회시(會試)에 갔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그대는 재주가 비상하니 반드시 과거에 급제할 것이나 나는 부기(附驥 후배가 선배의 뒤에 붙어 명성을 얻음)의 가망이 없다.” 하니, 점필재가 말하기를, “옛날 손근(孫僅)과 그 아우 하(何)가 같이 시험을 보아 형은 장원이 되고 아우는 둘째를 하였는데, 우리 두 사람도 어찌 근과 하가 안 될지 알겠는가.” 하고, 절구 한 수를 읊었는데,
못가의 봄 풀은 비 흔적도 많은데 / 池塘春草雨痕多
남들은 우리를 손근과 손하 같다고 말하네 / 人逭吾行是僅何
문 앞을 지나며 봄빛이 늦었다 말하지 말라 / 莫道過門春色晩
성안의 도리는 아직 피지도 않은 것을 / 滿城桃李未開花
하였는데, 이해에 모두 급제하였다. 《소문쇄록》
○ 점필재가 비로 말미암아 증약역(增若驛)에 머물면서 시를 지었는데,
증약역에서 큰 비를 만났으니 / 增若驛中三日雨
무술날 밤중에 천둥소리 요란하고나 / 戊戌夜半一聲雷
의관도 벗지 않고 앉았으니 / 不辭衣服冠而坐
기한과 갈증이 한꺼번에 찾아드네 / 其奈飢寒渴幷來
하였다. 또 한식날 비오다[寒食日雨]는 시에,
고향에 벼슬한 이 많다고 자랑하지 말라 / 休誇故里印纍纍
작서(하찮은 벼슬아치들)가 설치니 감히 헤아릴 수 없도다 / 雀鼠紛紜莫敢窺
마흔 일곱 해에 머리는 세려는데 / 四十七年頭欲雪
동지 뒤 1백 5일 날 [한식] 보슬비 내리네 / 一白五日雨如絲
하였는데, 앞에 시는 기련(起聯)이고 뒤에 것은 영련(領聯)인데 모두 측자[仄字]를 놓았으나 시어(詩語)는 타당하다. 상동
○ 성화(成化) 임인년 무렵에 개령(開寧) 사람이 밭을 갈다가 돌부처를 얻었는데, 귀ㆍ눈ㆍ입ㆍ코가 다 없어진 채 밭두렁에 놓여 있었다. 우연히 천식(喘息)을 앓는 사람이 절을 하였더니 병이 약간 덜한 것 같았다. 이에 영험하다 하여 남녀가 좋은 천과 향촉(香燭)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이 밤낮으로 끊임이 없었고, 중도 내왕하였으므로 금산 태수(金山太守) 이인형(李仁亨)이 그 말을 듣고 포졸을 보내어 잡아다가 쫓아버렸다. 점필재가 시로써 태수를 치하하기를,
풀밭에 버려져 세월도 모르는 / 抛擲田萊不記春
미욱한 돌덩이에 무슨 신이 있단말고 / 頑然拳石有何神
처음에는 밥이나 얻으려던 목거사가 / 初如求食水居士
차츰 돈을 긁어모으는 토사인이 되었구나 / 漸作撞錢土舍人
남녀 몇 집이나 전하여 물들었던고 / 男女幾家傳汚染
향등 켠 한 마을이 우물쭈물하는데 / 香燈一里欲因循
바로 우리 원이 빈주의 태수인 양 / 我侯直是邠州守
요사를 쳐부셔 사방을 진동시켰네 / 擊破妖邪震四隣
하고, 스스로 주석하기를, “옛날 왕사종(王嗣宗)에 빈주(邠州) 태수가 되어 귀신의 사당 밑에 있는 요사스런 여우를 잡아 죽였는데, 그때 사람들이 훌륭히 여겨, ‘성조(聖朝)에 바야흐로 영웅이 있음을 믿겠네[聖朝方信有英雄]’라는 시구까지 있었다. 이번의 돌부처는 그 괴이함이 요사스런 여우보다 더하거늘 요골(妖骨)을 잡아 내쫓고 지전(紙錢)을 불살라 버려 어리석은 백성들로 하여금 밝게 그 잘못을 알게 하였으니, 참으로 세상에 드문 기특한 일이다.” 하였다. 상동
○ 점필재가 어버이가 늙었으므로 함양(咸陽)의 원이 되었는데, 강진산(姜晉山)이 시로써 전송하기를,
가상타 그대 청반을 마다하고 군수를 바라니 / 多君乞郡阻淸班
기쁘게 어버이 계신 곳에서 즐거움 다하리 / 好向庭闈罄一歡
오정이 예로부터 짝을 앎을 어이할꼬 / 五鼎從來知匹奈
영원토록 사모하여 추반이 울 것일세 / 終天永慕泣錘瘢
하였는데, 추흔(錘痕)에 울었다는 옛일을 빌려다 쓴 것이다. 《진산세고(晉山世穚)》
○ 대궐 안의 흰 따오기를 보고 시를 지었는데,
붉은 여귀 푸른 이끼 하얀 옷에 비치니 / 紅蓼蒼苔映雪衣
대궐 개천 맑고 얕아 위험치 않구나 / 御溝淸淺欠危機
가을 바람에 살며시 은하수를 살펴보니 / 秋風偸眼省雲漢
옛 짝은 아스라이 어디 메를 나는고 / 舊侶微茫何處飛
하였는데, 주에, “사물을 인하여 자기를 비유한 것이라.’ 하였다. 《시격(詩格)》
○ 젊어서부터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높았고 시를 더욱 잘하였는데, 정심하고 넉넉하며 세속의 구덩이에 빠지지 않아 근대의 시조(詩祖)로 추앙된다. 성종이 친서로 칭찬하기를, “문장과 경제(經濟)가 아울러 훌륭하다 하겠다.” 하였다. 상동
○ 〈수오(睡晤)〉시에,
오늘 벼슬 없어 내 처음으로 되돌아오니 / 今日無官返我初
창 안 그윽한 꿈에 화서국에 이르렀도다 / 小窓幽夢到華胥
화로에 창출을 피워 글자를 쏘이며 / 一爐蒼術薰書字
바람에게 부탁하여 책을 덮었다 폈다 하게 하네 / 分付淸風自卷舒
하였는데, 그때 병으로 벼슬을 물러나고 마음이 한가로웠었다. 동상
○ 두류산(頭流山)에 해유령선암(蟹踰嶺船岩)이 있는데 전해 오기를, “상고(上古) 적에 바닷물이 넘었을 때 배를 이 바위에 매었는데 방게[蚄蟹]가 지나갔으므로 이 이름이 생긴 것이라.”고 하는데, 물가의 산과 바다의 섬이 어떤 것은 전부 드러나고 어떤 것은 반쯤 드러나 있어 마치 사람이 장막 안에 있으면서 그 상투만 드러내 보이는 것 같다. 《유두류산록(游頭流山錄)》
○ 판원(判院) 이변(李邊)이 늘 강직하다고 자부하여 남에게 말하기를, “내 평생에 남을 속인 일도 없거니와 벼슬한 뒤로부터 한 번이라도 거짓 병으로 결근한 일도 없었다.” 하였다. 점필재가 말하기를, “옛날 벼슬하는 이로서 병이라고 임금께 핑계한 사람도 전과 후에 수두룩하였는데 이 말은 좀 지나친 말인가 한다.” 하였다. 《추강냉화(秋江冷話)》
○ 공은 문장과 도덕이 당대 진신(搢紳)의 영수였으므로 조정에 일이 있을 때에도 그에게 물었고, 학자로서 의문이 생겼을 때에도 그에게 질문하였었다. 《추강집(秋江集)》
○ 김종직은 후배 학도들을 권장하여 학문을 성취한 사람이 많았다.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은 도학(道學)으로 이름이 높았고, 김일손(金馹孫)ㆍ권오복(權五福)ㆍ조위(曹偉)ㆍ유호인(兪好仁) 등은 문장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그 밖에도 길을 열어 주어 이름을 이룬 자가 매우 많았다. 《무오사적(戊午事蹟)》
○ 공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하여 한 책을 지었는데, 먼저 족보의 도표[譜圖]를 싣고, 다음에 기년(紀年)을, 또 그 다음에는 스승과 벗 및 평소 벼슬에 임하여 행한 일과 그 훈계의 말이 가묘(家廟) 제사 의식의 법도로 삼을 만한 것을 실어, 제목하여 《이준록(彝尊錄)》이라 하였으니, 이는 《예기》의 ‘겨울 제사 때 이정(彛鼎)에다 명문을 새긴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본서(本序)
○ 점필재는 우애(友愛)의 천성이 지극하였다. 맏형이 종기를 앓는데 의사가 지렁이의 즙이 가장 좋다고 하므로 공이 먼저 맛을 보고 먹였더니, 과연 효과가 있었다. 〈묘지(墓誌)〉
○ 견우의 사는 곳 은하가 관문이 되니 / 河皷之居河爲關
한 줄기 물을 사이에 두고 바라만 보는구나 / 相望脈脈一水間
1년 3백 60일 중에 / 一年三百六十日
이 밤을 제외하고는 길이 홀아비로다 / 除却此宵長爲鰥
〈칠석(七夕)〉
○ 우리 나라 사람은 시의 격률(格律)이 신라 말기에서 고려 말엽에 이르는 동안에 무려 세 번이나 변하였다. 그 동안에 풍교(風敎)를 기록하고 미자(美刺 선을 칭찬하고 악을 비난함)를 나타내어, 개폐(開閉) 억양(抑揚)이 깊이 성정(性情)의 바름을 얻어, 당송(唐宋)과 견줄만하고 후세에 모범이 될 만한 것이 또한 적지 아니하다. 쾌헌(快軒) 김태현(金台鉉)ㆍ괴산(槐山) 최해(崔瀣)ㆍ석간(石澗) 조운흘(趙云仡)이 각각 선집(選集)이 있는데, 석간은 간략하고, 쾌헌은 잡박(雜駁)하며, 오직 괴산의 편저(編著)만이 자못 체재를 얻었다고 하겠다. 〈풍아서(風雅序)〉
○ 우리 나라 병신년에 홍문관과 예문관의 여러 선비들이 건의하여 문신으로서 나이 젊고 총명한 사람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하게 하였는데, 채수(蔡壽)와 권건(權健) 등 여섯 사람이 뽑혔다. 늘 조참(朝參)에 참여하지 아니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문장접(文章接)이라고 하였다. 본집주(本集註)
○ 영일현(迎日縣) 동쪽 10리에 도기야(都祈野)가 있고, 그 들에 해와 달의 못이 있는데, 사람들이 신라 때에 하늘에 제사지내던 곳이라고 일컫는다. 〈영일현기(迎日縣記)〉
○ 고려의 혜종(惠宗)이 얼굴에 방석 무늬가 있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추왕(皺王)이라 불렀는데, 점필재 시에,
탁금강변은 외숙의 마을인데 / 濯錦江邊舅氏鄕
흥룡사 안에는 상서로운 빛이 피어오르네 / 興龍寺裏藹祥光
지금 어른들은 유덕을 품고 / 至今父老懷遺德
퉁소 불고 북 치며 추대왕을 즐기네 / 簫皷歡娛皺大王
하였다. 《동국여지승람》
신도비명(神道碑銘)병서(幷序) 홍귀달/장현광
덕행(德行), 문장(文章), 정사(政事)는 공문(孔門)의 고제(高弟)로서도 겸한 이가 있지 않았으니, 더구나 그 밖의 사람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재주가 우수한 사람은 행실에 결점이 있고, 성품이 소박한 사람은 다스림이 졸렬한 것이 바로 일반적인 상태이다. 그런데 우리 문간공(文簡公) 같은 이는 그렇지 않다. 행실은 남의 표본이 되고 학문은 남의 스승이 되었으며, 생존시에는 상(上)이 후히 대우하였고 작고한 뒤에는 뭇 사람들이 슬퍼하며 사모하였으니, 어쩌면 공의 한 몸이 경중(輕重)에 그토록 관계될 수 있었단 말인가.
공의 휘는 종직(宗直)이고 자는 계온(季昷)이며 선산인(善山人)으로 호는 점필재(佔畢齋)이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매우 고상하여 총각 때부터 시(詩)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고 날마다 수만언(數萬言)씩을 기억하였다. 그리하여 약관(弱冠) 이전에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다. 경태(景泰 명 경제(明景帝)의 연호) 계유년 방(榜)의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천순(天順 명 영종(明英宗)의 연호) 기묘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 정자(承文正字)에 선보(選補)되었다. 이 때 어공 세겸(魚公世謙)은 시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본원(本院)의 선진(先進)이 되어 공의 시를 보고는 감탄하여 말하기를,
“나에게 채찍을 잡고 노예 노릇을 하게 하더라도 의당 달게 받겠다.”
고 하였다.
본원의 검교(檢校)에 승진되었다가 감찰(監察)에 전임되었는데, 마침 입대(入對)했다가 상의 뜻에 거슬리어 파면되었다. 다시 기용되어 영남 병마평사(嶺南兵馬評事)가 되었다가 들어가서 교리(校理)가 되었다. 상이 즉위한 처음에 경연(經筵)을 열고 문학(文學)하는 선비들을 특별히 선발했는데, 선발된 사람 십수인(十數人) 가운데서 공이 가장 뛰어났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함양 군수(咸陽郡守)로 나갔는데, 고을을 다스리는 데에 있어서는 학문을 진흥시켜 인재를 양성하고, 백성을 편케 하고 민중과 화합하는 것을 힘썼으므로, 정사의 성적이 제일(第一)이었다. 그리하여 상이 이르기를, “종직은 고을을 잘 다스려 명성이 있으니, 승천(陞遷)시키라.” 하고, 마침내 승문원 참교(承文院參校)에 임명하였다. 이 해에 마침 중시(重試)가 있었는데, 모두 공에게 권하여 말하기를,
“중시는 문사(文士)가 속히 진취하는 계제가 된다.”
고 하였으나, 끝내 응시하지 않으니, 물론(物論)이 고상하게 여겼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선산 부사(善山府使)가 되었다가, 모친이 작고하자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면서 상례(喪禮)를 일체 주 문공(朱文公)의 예대로 준행하고, 너무 슬퍼하여 몸이 수척해진 것이 예에 지나쳤으므로, 사람들이 그 성효(誠孝)에 감복하였다. 복(服)을 마치고는 금산(金山)에 서당(書堂)을 짓고 그 곁에는 못을 만들어 연(蓮)을 심어놓고서 그 당(堂)의 편액(扁額)을 경렴(景濂)이라 써서 걸었으니, 대체로 무극옹(無極翁)을 사모하는 뜻에서였다. 그리고는 날마다 그 안에서 읊조리며 세상일에 뜻이 없었다.
그러다가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로 부름을 받고는 병으로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으므로, 마지못하여 일어나 부임하였다.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하여서는 말은 간략하면서도 뜻이 통창하였고, 강독(講讀)을 가장 잘했기 때문에 은총이 공에게 치우쳐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치올려 임명되었다. 이어 도승지(都承旨) 자리에 결원이 생기어 특명으로 공에게 도승지를 제수하자, 공이 감히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경(卿)의 문장(文章)과 정사(政事)가 충분히 감당할 만하니,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이윽고 이조 참판(吏曹參判)과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에 전임되어서는 금대(金帶) 하나를 특별히 하사하였으니, 특별한 대우가 이러하였다.
뒤에 호남(湖南)을 관찰(觀察)할 적에는 성색(聲色)을 동요하지 않고도 일로(一路)가 숙연해졌다. 다시 들어와서 한성 윤(漢城尹),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하고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초탁되어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겸하였다.
홍치(弘治) 기유년 가을에는 병으로 사직하고 지중추(知中樞)에 옮겨 제수되었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가기 위하여 하루는 동래(東萊)의 온정(溫井)에 가서 목욕하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공은 그대로 밀양(密陽)의 전장(田庄)으로 가서 요양하고 있었는데, 상이 특별히 전직(前職)을 체직하지 말도록 허락하였다. 그러자 혹자가 녹봉을 받기를 권하였으나 응하지 않고 세 번이나 사양하였지만, 윤허하지 않고 심지어 두 차례나 친히 비답(批答)을 지어 내리기까지 하였는데, 그 비답에는 “마음이 바르고 성실하여 거짓이 없고, 학문에 연원이 있다.[端慤無僞 學問淵源]”는 등의 말이 있었다. 그리고 공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듣고는 본도(本道)로 하여금 쌀 70석을 보내주게 하고, 내의(內醫)를 보내어 약을 하사하였다.
임자년 8월 19일에 작고하니, 향년이 62세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2일 동안 철조(掇朝)하였고, 태상시(太常寺)에서 시호를 문간(文簡)으로 의정하였다. 공의 고(考) 숙자(叔滋)는 성균 사예(成均司藝)로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조(祖)인 성균 진사(成均進士) 관(琯)과 증조(曾祖)인 사재령(司宰令) 은유(恩宥)에게도 모두 봉작(封爵)이 추증되었다.
공은 울진 현령(蔚珍縣令) 조계문(曺繼門)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곤(緄)은 해평인(海平人) 홍문 수찬(弘文修撰) 김맹성(金孟性)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일찍 죽었고, 그 다음은 모두 요절하였으며, 큰 딸은 생원(生員) 유세미(柳世湄)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생원 이핵(李翮)에게 시집갔다. 뒤에는 남평인(南平人) 첨정(僉正) 문극정(文克貞)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숭년(嵩年)이고, 딸은 직장(直長) 신용계(申用啓)에게 시집갔으나 후사가 없다.
공은 평소 집에 있을 적에는 첫닭이 울면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의관(衣冠)을 단정히 하고 앉아 있었는데, 아무리 처자(妻子)의 사이라 하더라도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또 소싯적에는 사예공이 병들어 수척해지자 공이 이를 매우 걱정하여 유천부(籲天賦)를 짓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부인(大夫人)이 생존한 당시에는 공이 항상 조정에 편히 있지 못하고 외직을 요청하여 세 번이나 지방관으로 나가서 대부인을 봉양하였다. 공의 백씨(伯氏)가 악창[癰]을 앓을 적에는, 의원이 지렁이의 즙[蚯蚓汁]이 좋다고 말하자, 공이 그 지렁이의 즙을 먼저 맛보고 백씨에게 먹였는데, 과연 효험이 있었다. 뒤에 백씨가 서울에서 객사(客死)했을 적에는 공이 널[柩]을 받들고 고향에 반장(返葬)하였고, 백씨의 아이를 마치 자기 자식처럼 어루만져 돌보고 가르쳐서 성립(成立)하게 하였으니, 그 타고난 효우(孝友)의 지극하기가 이러하였다.
그리고 관직에 거하여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간략함을 따르고 번거로움을 막았으며, 정(靜)을 주로 삼고 동(動)을 제재하였으므로, 있는 곳마다 형적을 드러내지 않고도 일이 다스려지고 백성들이 차마 속이지 못하였다.
평상시에는 사람을 접대하는 데 있어 온통 화기(和氣)뿐이었으나, 의리가 아닌 것이면 일개(一介)도 남에게서 취하지 않았다. 오직 경사(經史)를 탐독하여 늘그막에 이르러서도 게으를 줄을 몰랐으므로, 얻은 것이 호박(浩博)하였다. 그리하여 사방의 학자들이 각각 그 그릇의 크고 작음에 따라 마음에 만족하게 얻어 돌아갔는데, 한번 공의 품제(品題)를 거치면 문득 훌륭한 선비가 되어서 문학(文學)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 자가 태반이나 되었다. 지금 호조 참판(戶曹參判)인 조공 위(曺公偉)는 공의 처남이고,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강공 백진(康公伯珍)과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강공 중진(康公仲珍)은 공의 생질들이니, 어쩌면 공의 문에 명사들이 이렇게 모였단 말인가. 세상에서 이 때문에 더욱 기이하게 여긴다.
공이 편찬한 《청구풍아(靑丘風雅)》, 《동문수(東文粹)》, 《여지승람(輿地勝覽)》이 세상에 행해지고 있다. 공이 작고한 뒤에는 공이 저술한 시문(詩文)이 더욱 귀중하게 여겨져서 문도(門徒)들이 본집(本集)과 《이준록(彝尊錄)》을 편집해 놓았는데, 상이 대궐로 들여오도록 명하여 조석 사이에 간행하기를 명할 것이다. 내가 평생에 공과 가장 서로 의분(義分)이 있는 사이라 하여, 조태허(曺太虛)가 나에게 글을 지어서 비석에 새기게 해주기를 요청하니, 내 글이 졸렬하다고 해서 사양할 수가 없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오산은 하도 높고 / 烏山崇崇
낙수는 도도히 흘러서 / 洛水溶溶
빼어난 기운이 여기에 모였네 / 秀氣斯鍾
일월의 밝은 빛이 쌓이고 / 日月委明
규벽의 정기가 여기에 잠겨 / 奎壁淪精
문인이 이에 태어났도다 / 文人乃生
옛 서적을 널리 읽어 알았고 / 博洽丘墳
시문은 기이하고 고아하여 / 奇古詩文
조정에 올라서 명성을 발휘하였네 / 陞立揚芬
당에 올라 의심난 뜻 강의하니 / 登堂講疑
문하에 와서 기자를 물어라 / 過門問奇
후학들의 시귀가 되었도다/ 後學蓍龜
부모에게는 효도를 하고 / 父焉孝乎
형에게는 우애를 하니 / 兄焉友于
가정이 모두 화락하였네 / 家庭怡愉
백성을 인자함으로 다스리니 / 臨民以慈
떠난 뒤에도 백성들이 사모하여 / 去後餘思
향리에 사당이 세워졌도다 / 鄕有遺祠
경악에서 담론하고 사려하며 / 論思經幄
주상과 직접 면대하여서는 / 面對日角
큰 은총을 혼자 받았네 / 獨膺寵渥
높은 반열 높은 작급을 / 崇班峻級
계단 따라 오르듯이 하여 / 如階而躡
인망이 진실로 화합했는데 / 人望允協
하늘이 왜 그리 속히 빼앗는고 / 天奪何速
백성이 실로 복이 없음이라 / 民實無祿
구중궁궐에서 걱정을 품는도다 / 九重含戚
공은 만류할 수가 없으나 / 公不可留
좋은 명성은 천추에 전할 게고 / 令名千秋
유고는 한우 충동에 이르리라 / 遺稿汗牛
공은 명성과 실상이 많은지라 / 公多名實
이것이 묻히게 둘 수 없어 / 其令泯沒
내가 이제 붓 잡아 기록하노라 / 我今載筆
자헌대부 지중추부사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지성균관사 홍귀달(洪貴達)은 찬한다.
통훈대부 창원대도호부사 김해진관병마첨절제사 오여발(吳汝撥)은 비문을 쓴다.
통훈대부 행 사간원사간 겸 춘추관편수관지제교 김세렴(金世濂)은 전(篆)을 쓴다.
이상의 서(序)를 갖춘 명(銘)은 홍 상공 귀달(洪相公貴達)이 찬한 것인데, 선생(先生)의 사업(事業)과 문장(文章)이 그 대개가 모두 그 가운데 기재되었으니, 어찌 후인의 문자(文字)로 군더더기를 만들 수 있겠는가. 본부(本府) 사람들이 선생의 덕업(德業)을 사모하여 옛 여리(閭里) 앞에 비문을 새겨 세웠었는데, 임진년의 병란(兵亂)에 보전되지 못했으므로, 난리가 평정된 뒤에는 향인(鄕人)들이 모두 중건(重建)할 것을 생각하였으나 틈을 내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지금의 부백(府伯)인 이 사문 유달(李斯文惟達)이 부유(府儒)들이 일제히 간청함에 따라 구문(舊文)을 가져다 새겨서 옛 길에 세웠는데, 본부 사람들이 인하여 그 수말(首末)을 진술해서 명(銘) 밑에 아울러 기록하려고 하므로, 이것을 써서 주는 바이다.
아, 선생이 작고한 뒤에 불행하게도 혼조(昏朝)가 정사를 어지럽히고 권간(權奸)이 화(禍)를 선동함으로써 그 참혹함이 화가 천양(泉壤)에까지 미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를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나 선생의 도야 무슨 손상될 것이 있겠는가. 삼가 듣건대 당시에 선생의 문하에서 배출된 명인 준사(名人俊士)가 십수(十數)에만 그치지 않았고, 한훤(寒暄), 일두(一蠹) 양현(兩賢)도 모두 선생이 권장 계발시킨 바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 본부 사람들이 선생을 끝없이 사모하고 존상해 오다가, 난리를 겪은 뒤에 마침 어진 부사(府使)가 부임 해 옴을 만나서 그 숙원(宿願)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자 또 좋은 땅에 묘원(廟院)을 옮겨 세워서 스승으로 받들어 높이는 곳으로 삼으려 하고 있으니, 대체로 또한 사문(斯文)의 현통한 운수를 만난 것이다. 그러니 끝내 본부에서 배출되는 인재가 또한 옛날 선생의 문하에서 배출된 제유(諸儒)보다 못하지 않을 것을 기필하겠다.
숭정(崇禎) 7년(1634, 인조12) 9월 일에 자헌대부 공조 판서 옥산 후인(玉山後人) 장현광(張顯光)은 삼가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