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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문묘(文廟) 배향(配享) 인물
1. 공자 (孔子)
◐ 배향위치 : 중앙 제1위(第一位)
◐ 인물개요:
중국 춘추시대 말기의 대 사상가이며 교육자로 유교의 개조(開祖)시며 성인으로 일컬어진다. 공(孔)은 성이고 자(子)는 남자의 미칭(美稱)으로 '선생' 의 뜻이며,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다. 노나라 창평향 추읍(지금의 산동성 곡부현 남쪽 추현)출신. 탄생 연도에 대해서는 기원전 551(주왕실 영왕21년, 노양공22년)이라는 설(사마천의 "사기"[공자세가])과 552년이라는 설("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이 있다.
아버지는 숙량흘(叔梁紇), 어머니는 안징재(顔徵在)이다. 숙량흘은 60세가 넘어 젊은 안징재와의 사이에서 공자를 낳은 것이라고 한다. 안징재는 공자를 낳기 위해서 니구산(尼丘山)에 기도를 들였다 하는데, 공자의 이름이 구(丘)이고 자가 중니(仲尼)인 것도 니구산과의 관계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혹은 나면서부터 머리꼭대기 가운데가 움푹 들어가 언덕처럼 생겼으므로 이름을 구라고 했다고도 한다("사기")
공자의 조상은 은(殷)왕실과 줄이 닿아있다. 즉, 은나라가 망한 뒤 주공은 은나라 최후의 임금인 주왕(紂王)의 서형(庶兄) 미자계(微子啓)를 송(宋)나라에 봉했다. 송나라는 제 6대 양공희에 와서 조카인 여공에게 죽임을 당하고 왕위를 빼앗겼는데, 양공희에게는 이때 아들 불보하(弗父何)가 있었다. 그가 공자의 조상이다. 그 뒤로 송나라의 10대 대공(戴公)에서 무공(武公) , 선공(宣公)에 걸쳐 임금을 보좌한 재상 정고보(正考父)가 있으나, 그 아들 공보가 (孔父嘉)가 송나라의 정쟁에 휘말렸고(B.C 710)다시 그의 아들 자목금보(子木金父)는 송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옮겨와 살게되었다. 그리고 공보가의 '공'자를 따서 성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이 자목금보의 현손이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이며, 숙량흘은 '키가 10척이고 무예와 힘이 뛰어났었다'고 한다. ("공자가어")
"춘추좌씨전"에는 숙량흘이 전쟁에 나가 무공을 세웠다는 기사가 두 군데(양공10, 17년) 기록되어있다. 공자도 용모나 몸집이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고 한다. "사기"에는 "키가 9척 6촌이어서 사람들이 모두 키다리라 부르며 이상하게 생각하였다."라고 하였고, 또 공자가 정(鄭)나라에 가서 제자들과 떨어져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의 모습을 정나라 사람의 입을 빌어 "이마는 요임금 같고 목은 고요같고 어깨는 자산과 같으나, 허리 아래편은 우임금보다 3촌이 모자라며 초상난 집의 개처럼 축 늘어져 있더라."라고 표현하였다. "공자가어" [곤서(困書)]에서는 '키는 9척 6촌이며 눈두덩이가 평평하고 긴 눈에 툭 불거진 이마를 지녔다.' 는 형용을 보탰으며, 한 대 공부(孔)의 "공총자"가언에서는 장홍(弘)이 공자의 인상을 표현하여, "눈두덩이가 평평하고 꼬리가 긴 눈과 불거진 이마는 황제(黃帝)의 모습이요, 긴 팔에 거북 같은 등을 하고 9척 6촌의 키를 지니고 있는 것은 탕(湯)임금의 용모이다." 라고 하였다. 이같이 공자는 용모가 비범하였고 체력도 강했다 한다.
1. 연국 복성공 안자 (復聖公 顔子)
◐ 배향위치: 동배향(東配享) 제1위(第一位)
◐ 인물개요:
공자의 제자로 춘추 말엽 노(魯)나라 사람이다. 성은 안(顔)이고 이름은 회(回)이며 자가 자연(子淵)이기 때문에 안연(顔淵)으로도 일컬어진다. 노 소공(昭公)21년에 출생하여 애공(哀公) 14년 4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공자보다 30세가 적으며, 집안은 청한(淸寒)하였다. 16-7세 때부터 공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계속하여 공자의 학습 생활을 따랐으며 종신토록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안회는 공문제자 중에서 공자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고, 사람됨이 총혜(聰慧)롭고 배우기를 좋아하였으며, 내향적인 성격으로 침정(沈靜)한 데다가 엄격하고도 근면하였다.
그는 공자의 제자 가운데 덕행수양(德行修養)면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물이다. 공자는 제자들을 평가하면서 덕행 면에서 안연을 제일로 지목하고 그의 인(仁)을 높이 평가했다. 또한 안회는 안분지족(安分知足)으로 자기를 지켰고, 예에 어긋나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명리(名利)에 담박하여 안빈낙도(安貧樂道)하였고, 자신의 장점과 공로를 자랑하지 않았다.
2. 성국 종성공 증자(宗聖公 曾子)
◐ 배향위치: 서배향(西配享) 제1위(第一位)
◐ 인물개요:
공자의 제자로 춘추 말엽 노나라 남무성(南武城) 사람이다. 성은 증(曾)이고 이름은 삼(參)이며 자는 자여(子輿)이다. 추존하여 증자(曾子)라고 하였으며 공자보다 46세가 적다. 집안은 몰락한 귀족으로 빈한하였으며, 그의 부친 증점(曾點)도 공자에게서 수학하였다. 공자는 증삼을 노둔하다고 평하였는데 이는 성격이 내성적이고 일을 신중히 처리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학습하고 수양한 것은 주로 '내성(內省)'과 '신독(愼獨)'이다. 즉 "논어" [학이편]에 "나는 날마다 세 가지로 내 몸을 살핀다."라고 하여 내성을 말하였고 "예기"와 "대학"에 "군자는 반드시 그 혼자 있을 때 삼가야 한다"라고 하여 신독을 말하였다. 그는 유가의 최고 덕목인 인(仁)의 실현을 자신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과제로 여겼기 때문에, 평상시에도 아주 근신하고 신중하게 행동하였으며 결코 자기가 취해야 할 활동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증삼은 특히 효행으로 이름났다. 공자의 제자 중에 효행이 뛰어난 사람으로는 민자건(閔子騫)도 있지만 후세에 끼친 영향은 민자건보다 증자가 훨씬 크다. 그는 효의 전형으로서 어리석을 정도로 몸소 효도를 실천하였는데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의하면 공자는 그를 효도에 능통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효경"은 바로 증자가 지었다고 하였다.
3. 기국 술성공 자사(述聖公 子思)
◐ 배향위치: 동배향(東配享) 제2위(第二位)
◐ 인물개요: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이자 유가학파의 중요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성은 공(孔) 이름은 급(伋) 자는 자사(子思)로 공자의 적손이다. 대략 주나라 경왕 37년에 태어나서 주나라 위열왕 24년에 졸(卒)한 것으로 전해진다.
자사는 일찍이 증자를 사사하여 그 종전을 얻었다. 때문에 "맹자" [이루 하]에는 '증자 자사 동도(曾子子思同道)'라고 되어있다. 그의 학술과 주요 사상은 "중용"에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공자의 중용사상을 계승 발전시켜서 성(誠)으로써 핵심적인 철학체계를 세운 것이다. 자사는 사람을 세 부류로 나누어 하나는 생이지지(生而知之)하여 안이행지(安而行之)하는 사람과 학이지지(學而知之)하여 이이행지(利而行之)하는 사람, 그리고 곤이지지(困而知之)하여 면강이행지(勉强而行之)하는 사람으로 분류하였다. 또 자사는 유가의 사회 윤리관을 개괄하여 군신 부자 부부 곤제 붕우의 교(交)를 천하의 달도(達道)라 하였으며 지인용(智仁勇) 세가지를 천하의 달덕(達德)이라 하였다. 정치 사상으로는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서 수신(修身), 존현(尊賢), 친친(親親), 경대신(敬大臣), 체군신(體群臣), 자서민(子庶民), 내백공(來百工), 유원인(柔遠人), 회제후(懷諸侯)의 구경을 제시하였다.
4. 추국 아성공 맹자(亞聖公 孟子)
◐ 배향위치: 서배향(西配享) 제2위(第二位)
◐ 인물개요:
전국시대 사상가이자 정치가, 교육가로 유가학파의 대표적인 사람이다. 성은 맹(孟), 이름이 가(軻)이며, 자는 자거(子車) 또는 자여(子輿)로 노나라 추읍(鄒邑) 사람이다. 아버지는 맹손격(孟孫激)이고 어머니는 장()씨라고 하나 선계가 분명치 않다.
그가 40세를 전후했을 때 추목공은 그를 발탁하였다. 그러나 당시 추의 정치는 극히 혼란하여 맹자는 자기 나라에서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펼칠 수 없음을 부끄럽게 생각하고는 곧 추를 떠났다. 그리고 그는 일생동안 왕도정치로써 제, 량, 노, 추, 등, 설, 송 등의 나라를 두루 다니면서 제후들에게 유세하였고, 제선왕의 공경이 되기도 하였다.
맹자가 평생 목표로 삼았던 것은 사상 면에서는 유학을 드높이는 것이었고 정치면에서는 왕도정치의 실천 곧 유가의 이상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의 사상 면에서 두드러진 점은 성선설(性善說)이다. "맹자" 7장은 이러한 성선설의 정신으로 일관되어있고 그 중에서도 특히 [고자]와 [진심]두 편에는 이러한 이론이 여러 군데 등장한다.
孔門十哲(공문십철)
子曰 “從我於陳蔡者, 皆不及門也.” 德行, 顔淵閔子騫冉伯牛仲弓. 言語, 宰我子貢. 政事, 冉有季路. 文學, 子游子夏.
논어 선진(先進)편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따르던 자들이 지금 모두 문하에 있지 않구나!” 덕행에는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이었고, 언어에는 재아, 자공이었고, 정사에는 염유, 계로였고, 문학에는 자유, 자하였다.
위에 언급된 제자 10명을 흔히 공자 문하에서 배출된 현인이라는 의미로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고 부른다.
1. 費公 閔損(BC536-487)
◐. 東 配享 第一位
춘추 말엽의 노나라 사람인 閔損은 자가 子騫으로 孔子보다 15세가 적은 孔子의 제자이다. 출신이 빈한하였으며 생모가 일찍 죽고 아버지가 재취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계모는 민손을 심하게 학대하였다. 집안 사정이 매우 어려웠던 관계로 민손은 어리지만 직접 수레나 마차를 끌면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중년에 아버지가 죽어 삼년상을 치르는 중에 노국에 전란이 일어나자 그는 상복 대신 군복을 입고 복역했으며, 그 일이 끝나자 다시 돌아와 삼년상을 마쳤다. 季氏가 그를 費邑의 재상으로 삼았으나 사양하고 평생 벼슬하지 않다가 나이 50세가 되어죽었다.
민손의 사람됨은 恭謹端整하였으며 沈靜하여 말이 없었다. 공자는 민손의 모습을 "온화하도다(誾誾如也)" 라고 하였다. 또 노나라 사람이 장부라는 창고를 개수하자 민자건이 "옛 것을 그대로 이용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필이면 반드시 고쳐지어야만 하는가?"라고 하였다. 이 말을 공자가 듣고 "저 사람이 말을 하지 않을지언정 말을 하면 반드시 도리에 맞음이 있다"라고 하였다. 이는 민손이 평소에 말은 매우 적게 하지만 일단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면 반드시 사리에 맞는 말을 한다는 것이다.
공자가 만년에 제자에 대한 평가에서 德行에는 顔淵, 閔子騫, 冉伯牛, 중궁이라 하였듯이 최고의 제자인 안연과 같은 반열에 둔 것을 볼 때 그의 덕행을 짐작할 수 있다. 민자건은 덕행뿐만 아니라 효로서도 뛰어나다. 初學記』권 17에는 "민손과 증삼은 문도 중에서 효로 일컬어짐이 많아서 효를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증삼과 민손을 들지 않음이 없다"라고 되어있다.
당나라 현종 개원8년(720)에 孔門十哲로 列入되었고 동왕 27년(739)에는 費侯로 추증되었으며 송나라 진종 대중상부 2년(1009)에 랑야공(瑯琊公)으로 追封되었다.
2. 鄆公 冉耕(BC 544-?)
◐. 西 配享 第一位
공자의 제자로 성은 염씨이고 이름은 경이며 자는 伯牛이다. 춘추 말엽 노나라 사람으로 노나라 양공 29년에 태어났으나 졸년은 자세하지 않으며, 공자보다 7세가 적다.
출신이 빈한하였고 冉雍과는 同宗이다. 공자가 노나라의 司寇가 되어 정승의 일을 섭행할 때, 冉耕을 중도의 재상으로 삼았다. 공자가 열국을 주유할 때에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행하였는데 공자가 노나라에 돌아온 뒤 얼마 되지 않아 악질(惡疾)에 걸려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염경은 공자의 제자 가운데 덕행으로 뛰어난 사람이다. 즉 공자는 제자들의 특장을 말하면서 덕행으로 안연 , 민자건, 염백우, 중궁을 들었고, 맹자도 "염우(염경을 이름), 안회, 민자건은 덕행을 잘 말하였다"(맹자. 공손추상)고 한 것이 그것이다. 또한 그는 일을 신중히 처리하였는데 일상생활의 잡다한 일을 잘 처리하는 독특한 재간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염경은 공자의 마음에 든 제자 중 한 사람으로 공자와의 관계가 아주 밀접했다. 즉 염경이 악질에 걸려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려 했는데 공자는 먼저 그를 찾아가 창문 너머로 그의 손을 잡고 "이런 병에 걸리다니!"『논어』 [옹야])라고 탄식하였다. 염경의 덕행 수양은 비록 안연과 같다고 할 수 없지만 후대에 끼친 영향은 컸다. 즉 맹자가 그에 대해 "성인의 전체를 갖추고있다"(맹자. 공손추상])고 높이 평가한 것이 그것이다.
당 현종 개원 8년(720)에 공문십철에 열입 되었고 개원 27년(739)에 운후( 侯)로 추증되었으며, 송 진종 대중상부 2년(1009)에는 東平公으로 추봉되었고 도종 함순 3년(1267)에 다시 운공으로 改封되었다.
3. 薛公 冉雍(BC 522-?)
◐. 東 配享 第二位
춘추 말엽의 노나라 사람으로 자는 중궁이며 공자보다 29세가 적은 공자의 제자이다. 출신이 매우 寒微 하였으며 苒伯牛 염유( 有)와 同宗이다. 일찍이 공자를 스승으로 따르면서 열국을 주유하였으나 사적이 분명하지 않다.
『논어』에 의하면 염옹의 사람됨은 仁篤敦厚 沈靜寡言하였으며, 국량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인다. 『논어』 [옹야]에서 공자가 "중궁은 군왕의 자리에 앉을 만하다(雍也可使南面)" 고 한 것은 중궁의 마음이 넓고 크며 간략하고 중후하여 人君의 도량이 있음을 讚賞한 것이다. 또 『논어』 [공야장]에는 어떤 사람이 염옹에 대해서 "인(仁)하나 말재주가 없습니다.<仁而不 >"라고하자 공자는 "그가 인한지는 모르겠으나 말재주를 어디다 쓰겠는가?" 라고 말하였다. 이는 공자가 말 잘하는 사람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가진 것을 감안할 때 크게 칭찬한 것이다.
『논어』 [안연]에서 仲弓 이 인을 물으니 공자는 "문을 나갔을 때는 큰 손님을 뵌 듯 하고 백성에게 일을 시킬 때에는 큰 제사를 받드는 듯이 하고 자신이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아야 하니, 이렇게 하면 나라에도 원망함이 없으며 집안에도 원망함이 없을 것이다."라고하자 염옹은 "제가 비록 不敏하오나 이 말씀을 종사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과 함께 공자가 제자들을 평하면서 顔淵. 閔子騫, 염백우( 伯牛)에 이어 중궁을 언급하여 그가 덕행으로 뛰어난 제자임을 밝혔다.
그는 또 정치적 문제에 탁월한 견해를 가졌던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논어』 [옹야]에서 염옹은 "자신이 경에 처하면서 간략함을 행한다<居敬而行簡>"라는 말을 하자 공자는 "雍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이는 벼슬을 하는 자는 정책을 연구함에는 아주 신중히 그리고 진실하게 하여야 하지만. 그것을 실행할 때는 간단한 형식으로 실행해야 한다는 염옹의 정치적 소신을 말해 주는 것이다.
중국 역대조정에서는 염옹을 매우 중시하였는데 동한(東漢) 명제 영평 15년(72)에는 '공문십철'에 열입시켰다. 27년(739)에는 薛侯로 추증되었으며, 송 진종 대중상부 2년(1009)에는 천하비공(天下 公)으로 가봉되었고 도종 함순 3년(1267)에 薛公으로 개봉되었다.
4. 齊公 宰予(BC 522- 458)
◐. 西 配享 第二位
공자의 제자로 춘추 말엽 노나라 사람이다. 宰씨이고 이름은 予이며 자는 子我인데, 宰我로 칭하기도 한다. 노나라 소공 20년에 출생하여 周 定王 11년에 卒하였으며, 공자보다 29세가 적다. 가계와 평생의 사적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사기』에 의하면 그는 공자가 열국을 주유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동행하였는데 공자는 여러 번 그를 외교 사절로 제나라와 초나라에 파견했다고 한다.
재여는 지혜가 뛰어났고 언변에도 능한 사람이었다. 공자가 그를 언어에 뛰어난 자로 말하였을 뿐만 아니라 맹자와 사마천도 그가 언변에 재능이 있었음을 인정했다. 맹자는 또한 "재아, 자공, 유약은 지혜가 족히 성인을 알만하다"(『맹자』 [공손추상])고 하여 재여의 지혜가 뛰어났음을 말하였다.
재여는 벼슬에 재능이 있는 자로 이름났고 이에 대해 공자로부터 인정도 받았다. 이는 공자가 여러 번 그를 제, 초등의 나라에 외교 사절로 보냈던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인격수양과 학업에는 비교적 나태했기 때문에 공자로부터 여러 번 질책을 받기도 하였다. 즉 재여는 '五帝의 德'에 대해 공자에게 질문했다가, 또 낮잠을 자다가 공자한테 질책을 당했으며, 애공의 社에 대한 질문에 답변해 준 것에 대해서도 공자로부터 비평을 받았다. 공자가 비록 여러 차례 재여를 비평하였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공자는 재여를 '언어'에 뛰어난 자로 인정했다. 맹자가 "내(재여)가 夫子를 관찰하건대 堯舜보다 훨씬 나으시다"(『맹자』 [공손추상])라고 하였듯이 재여도 공자를 매우 존경했던 것으로 보인다.
재여는 당 현종 개원 8년(720)에 공문십철에 열입되었으며, 동왕 27년에 齊侯로 추봉되었고, 송 진종 대중상부 2년에 臨淄公으로 봉해졌으며, 도종 함순 3년(1267)에 다시 제공으로 개봉되었다.
5. 여공 단목사(端木賜黎公)
◐. 東 配享 第三位
춘추 말엽의 衛國人으로 성은 端木이며, 이름은 賜이고, 자는 子貢이며, 공자보다 31세 적은 공자의 제자이다.
출신이 寒微하여 청년시기에 곧 상업 활동을 하였다. 공자가 열국을 周遊하면서 衛나라에 이르렀을 때 자공이 배알하고 스승으로 모셨다. 후에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면서 상업을 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다. 공자의 逝世에는 모든 제자가 삼년상을 입었으나 유독 자공만은 무덤가에 墓幕을 짓고 육년이 지난 후에 돌아갔다.
자공은 천성이 穎悟하고 낙관적이며 활발하였고 情理에 통달하였지만 다른 사람의 是非에 대하여 평론하기를 좋아하는 흠이 있었다. 이는 그의 마음이 곧고 말하는 것이 솔직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언변이 매우 좋은 것과도 연관이 있다. 그는 언변에 매우 능하여 외교적인 면에서 비범한 재능이 있었다. 공자가 제자들을 평하면서 "언어에는 재아와 자공"이라 한 것도 이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이와는 달리 자공의 가장 두드러진 요소라면 역시 貨殖에 뛰어나다는 점이다. 그는 젊어서부터 상업활동에 종사하였는데 공자를 종사한 뒤에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자공은 많은 재산을 모았으나 이러한 일로 인하여 때로는 학업을 게을리 하고 예를 소홀히 하였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공은 공자의 각별한 총애를 받은 제자였다. 이는 자공이 공자에게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물었을 때 "호련瑚璉"이라 대답한 것이나 "지나간 것을 알려주면 앞에 올 것을 안다"고 한 점 등을 살펴보면 충분히 짐작된다. 만년에는 공자의 학설을 전파하는 공로를 세웠다.
당 현종 개원 8년(720)에 공문십철의 지위에 열입되었으며, 동왕 27년(739)에 黎侯로 봉해졌고, 송나라 진종 대중상부 2년(1009)에 黎陽公으로 추봉하였는데, 도종 함순 3년(1267)에 黎公으로 개봉하였다.
6. 徐公 冉求(BC 522-?)
◐. 西 配享 第三位
공자의 제자로 춘추시대 말엽 노나라 사람이다. 염씨 이며 이름은 求이고 자는 子有 인데, 염유( 有)로 일컫기도 한다. 노 소공 12년에 출생하였으나 졸년은 자세하지 않으며 공자보다 29세가 적다.
출신은 한미 했으며 중궁, 염우와는 동족이다. 청년시절에 그는 季氏의 가신으로 있으면서 공자를 스승으로 받들다가 나중에는 공자를 따라 열국을 주유하였는데, 노 哀公 5년 가을에 노나라의 집정자였던 季桓子가 죽고 季康子가 집정하자 公之魚의 추천으로 진陳나라로부터 노나라로 돌아와 계씨 가족의 총리를 맡았다. 애공 11년에 제나라와 노나라가 교전했는데 이때 염구가 계씨의 장수가 되어 제나라의 진영에 돌입하여 제군을 대파했다. 그 후 염구는 곧바로 계씨 가족의 직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염구는 천성이 활발하고 낙관적이며 솔직하고 숨김이 없었다. 즉 그가 공자를 시종할 때는 화락하고 온아한 얼굴을 하였다. 그리고 학업을 게을리 하여 공자에게 꾸지람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力不足을 말하여 솔직하고 숨김없는 천성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多才多藝한 사람으로 경제관리에 대한 재능과 軍事才幹이 출중하였다. 계강자가 실시하는 田作制度를 지지하여 세 수입을 증대시키고 계씨를 갑부로 만들기도 하였으며, 계씨의 장수가 되어 제나라의 군사를 대파하기도 하였다.
염구는 정사분야에서 가장 저명한 자였다. 공자는 염구를 정사분야의 제일로 지목했으며, 또 노나라 대부인 맹무백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도 염구의 정치 재간을 칭찬했다. 그러나 그는 인격 수양 면에서 노력한 흔적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그는 공자에게 학업을 비교적 게을리 하면서 역부족을 느낀다고 하였고, 공자도 그의 인덕 수양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당 현종 개원 8년(720)에 공문십철에 열입되었고, 개원 27년(739)에는 徐侯로 추봉되었으며, 송 진종 대중상부 2년(1009)에 다시 彭城公으로 봉해졌는데 도종 함순 3년(1267)에 다시 서공으로 개봉되었다.
7. 衛公 仲由(BC 542-480)
◐. 東 配享 第四位
춘추 말엽의 魯國人 으로 성은 仲 이름이 由 이며 자는 子路 이나 季路 로 쓰기도 한다. 출신이 한미 하였으며, 공자보다 9세가 적은 공자의 제자이다.
자로는 젊었을 때 雄鷄(용병을 상징하는 수탉 깃으로 장식한 관)를 쓰고 가돈( 豚: 용맹을 상징하는 수퇘지 가죽으로된 띠)을 차며 공자를 능멸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공자가 예를 차려 가르치자 마침내 儒者로서 자신을 맡겨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다. 공자를 따라 노나라에 있으면서 벼슬을 할 때 계씨의 費邑의 재상이 되었으며 뒤에 노나라를 떠나 위(衛)나라에 이르러서는 위국 대부 공리(孔 )의 蒲邑令이 되었다. 공자가 14년간의 주유를 마치고 노나라로 돌아올 때에 자로도 함께 돌아왔으나 위국 포읍령의 직책은 버리지 않았다. 노 애공 15년에 위국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몸소 그 난리에 뛰어들어 죽었으니 나이 63세였다. 자로는 위인이 용맹하였으면 義 를 숭상하였다. 이는 위나라에 내란이 일어났을 때 직접 말을 몰아가서 싸우다 죽은 일에서도 알 수 있다.
자로는 공자의 가장 가까운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공자의 평에 의하면 정사와 효도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어린 시절에 집이 가난하여 자신은 채소를 먹고 물을 마시면서도 부모를 위하여 백 리 밖에서 쌀을 지고와서 봉양하였다. 장성하여 차츰 귀한 지위에 오르게 되자 깊이 탄식하면서 "슬프도다 가난이여! 살아 계실 적에는 봉양할 길이 없었고 죽어서는 예를 차릴 길이 없구나!" 라고 하였다. 한편 공자가 자로를 "昇堂은 하였으나 입실은 하지 못했다"고 평한 것에서는 자로의 仁德 수양이나 학문은 안연등의 여타 제자들에 미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자로는 살신성인하는 義와 勇이 있었으며 말을 하면 반드시 지키는 신의가 있었으며 자신의 잘못을 지적 받으면 기뻐하는 미덕 등을 지녀 후대 사람의 칭송하는 바가 되었다.
당 현종 개원 8년(720)에 공문십철에 열입 시켰고 동왕 27년(739)에는 衛侯로 증직되었고 송 진종 대중상부 2년(1009)에 河內公으로 가봉되었는데 도종 함순 3년(1267)에 위공으로 개봉되었다.
8. 吳公 言偃(BC 506-?)
◐. 西 配享 第四位
言偃은 성이 言, 이름이 偃이며 자는 子游이다. 吳나라 사람으로 공자보다 45세가 적은 공자의 제자이다. 『공자가어』에는 魯人으로 공자보다 35세 적다고 되어있다.
자유는 공자가 열국을 주유한 후에 제자가 되어 비교적 종사한 것이 늦기는 하였으나 배움에 능하여 이룸이 있었다. 특히 자유는 유가에서 주장하는 禮樂政治를 몸소 실천한 사람이다. 자유가 武城宰가 되어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을 때의 일이다. 공자가 무성에 갔을 때 絃歌의 소리를 듣고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기를 "닭 잡는데 어찌 소잡는 칼을 쓰겠느냐?"하고 하자 자유는 "예전에 선생님께 듣기로 '군자가 도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가 쉽다'고 하셨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공자는 "자유의 말이 옳다. 지금 내가 한 말은 농담이었다"라고 하였다.
맹자도 "자하, 자유, 자장은 모두 성인의 일부분이 있다."라고 하였다. 자유는 사람됨이 자잘한 일에 얽매이지 아니하여 대화나 일의 처리에서 소홀함이 있었다. 이는 자하와의 논쟁에서도 알 수 있다. 자하가 "큰 덕이 한계를 넘지 않으면 작은 덕은 출입하여도 괜찮다"고 하자 자유는 "자하의 제자들은 물 뿌리고 청소하며 응대하고 진퇴하는 예절을 당해서는 괜찮으나, 이는 지엽적인 일이요 근복적인 것은 없으니 어찌하겠는가?"라고 했다. 그러자 자하가 듣고 "언유의 말이 지나치다. 군자의 도에 어느 것을 먼저라 하여 전수하며, 어느 것을 뒤라고 하여 게을리 하겠는가? 초목에 비유하면 구역으로 구별되는 것과 같으니. 군자의 도가 어찌 이처럼 속이겠는가? 처음과 끝을 구비한 것은 오직 성인이다" 라고 하였다. 이처럼 자하가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나누어서 논할 수 없음을 주장한 반면, 자유는 그것을 분명히 구분하여 큰일에는 그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작은 일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공문십철에 열입 되었으며, 당 현종 개원 27년(739)에 오후(吳侯)로 봉해졌고, 송 진종 대중상부 2년(1009)에 丹陽公으로 가봉되었다. 그후 남송 도종 함순 3년(1267)에 오공으로 개봉되었다.
9. 魏公 卜商)(BC 507-?
◐. 東 配享 第五位
卜商)은 성이 卜, 이름이 商이며, 자는 子夏이다. 위나라 사람으로 공자보다 44세가 적은 공자의 제자이다. 자하는 출신이 빈한하였으나 재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로 인해 만년에 강학을 열어 배우는 사람들이 삼백여 인에 이르렀으나 매우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학문을 매우 좋아하여서 魏文侯가 스승이 되어 줄 것을 부탁하였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생 동안 곤궁하게 살았으며 만년에 자식까지 잃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
공자가 제자들을 평할 때 문학에는 子游와 子夏라 하였는데 이때의 문학이란 바로 시경』,『서경』,『역경』등 유가 경전을 말하는 것으로 자하는 이들을 전승하는데 지대한 공이 있었다. 한 번은 자하가 " '어여쁘게 웃는 얼굴 보조개 귀여우며, 아름다운 눈 초롱초롱 반짝거리네. 흰 바탕에 채색 베푼 것이로다.'라고 함은 무엇을 말한 것입니까?"라고 질문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은 뒤에 하는 것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자하가 "예는 뒤에 하는 것이로군요?"라고 말하자, 공자가 "나를 일깨워주는 사람은 상이로구나! 비로소 함께 시를 말할 만하다."(논어』[팔일]) 라고 하였다. 이는 공자가 자하의 시에 대한 견해를 극찬한 경우로서 문학에는 자하라고 한 공자의 말과 맥을 같이하는 대화이다.
당 태종 정관 21년(647)에 종사되었고 개원 8년(720)에 공문십철에 열입 되었으며 다시 동왕 27년에 魏侯로 봉해졌다. 송 진동 대중상부 2년(1009)에는 東阿公으로 가봉되었는데, 도종 함순 3년(1267)에 다시 魏公으로 개봉되었다.
10. 潁川侯 顓孫師
◐. 西 配享 第五位
전손사는 성이 전손이고 이름이 사이며 자는 자장이다. 진나라 사람으로 공자보다 48세가 적은 공자의 제자이다.『여씨춘추』에는 " 魯之鄙家 "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출신이 매우 천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공자는 자장을 평하여 '벽( )'이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주자는 '용모에만 익숙하고 성실성이 부족함'이라고 풀이하였다. 또 자장이 성인의 도를 묻자 공자는 "성인의 자취를 밟지 않으면 방에 들어갈 수 없다" 라고 하여 자장의 학문 태도가 형식상의 모방에 다소 치우침이 있어서 昇堂入室 하기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공자는 일찍이 자장의 부족함에 대하여 반복해서 충과 신에 대한 교육을 하였다. 자장이 정치에 대하여 물었을 때 공자는 "마음에 두기를 게으름이 없이 하고 행하기를 충성으로써 한다"라고 하여 忠 과 無倦(게으름이 없을 것)을 강조하였다. 또 자장이 덕을 높이며 의혹을 분별함에 대하여 물었을 때 공자는 "忠信을 주장하며 의에 옮김이 덕을 높이는 것이다"라고 하여 충과 신을 강조하였다. 또 행行에 대하여 물었을 때는 말은 忠信하고 행실은 篤敬할 것을 강조하였다. 자장은 공자의 가르침을 항상 공경히 듣고는 꼭 띠에 써서 그렇게 행하도록 노력하여 게을리 하지 않아 마침내는 공자의 우수한 제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당 현종 개원27년(739)에 陳伯으로 봉해졌고, 송 진종 대중상부 2년(1009)에 宛丘侯로 가봉되었으며, 正和 원년(1111)에 潁川侯로 봉해졌다. 남송 도종 함순 3년(1267)에 陳國公으로 가봉되었고 공문십철로 올려서 聖廟에 從享되었다.
宋朝六賢(송조육현)
조선 시대, 문묘(文廟)에 모시고 제사하던 중국 송나라의 여섯 명현(名賢). 곧 주돈이(周敦頤), 정호(程顥), 정이(程頤), 소옹(邵雍), 장재(張載), 주희(朱熹)를 이른다.
1. 道國公 周敦頤(1017 - 1073)
◐. 東 配享 第六位
북송 때의 철학가로 '北宋五子'중의 한 사람이다. 본래의 이름은 敦實인데 영종의 舊諱를 피하여 돈이로 고쳤다고 한다. 자는 茂叔이다. 道州의 營道사람으로 송나라 진종 천희 원년(1017)에 출생하여 송나라 신종 희령 6년(1073)에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일찍이 南安軍司理參軍, 桂陽縣令 등 여러 관직을 거쳤고 만년에는 여산의 蓮花峰아래에 거처를 정하고 濂溪로 이름하니 후인들이 그를 염계선생으로 칭하고 그의 학파를 염학파라 하였다.
철학적으로는『역전』『중용』, 韓愈의 [原道]에 의거하고 도교와 불교의 일부 사상을 받아들였다. 진단(陳 )의 『無極圖』를 개변하여 세계본체와 그 형성 발전을 논한 『태극도설』을 저술하였으며, 孔孟의 정통 사상을 위주로 한 철학 이론 체계를 수립하였고, 『중용』의 '誠' 사상을 계승, 개조하여 '성이란 우주 본체와 인류 만물의 근본 속성이며 법칙'이라고 하였다. 人性論으로는 性을 五品, 즉 剛, 柔, 善, 惡, 中으로 나누고, 이 중에 중은 "온화하고 절도에 맞으며 천하에 통달할 수 있는 길이고 성인의 일이기 때문에 성인은 가르침을 세워서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그 악惡을 바꾸어 저절로 그 중中에 이르게 할뿐이다"(『통서』)라고 하였다. 정치사상으로는 禮, 樂으로 천하를 다스릴 것은 주장하고, 만물은 각각 그 이치를 얻은 후에야 조화롭기 때문에 예가 먼저고 악이 뒤라고 하였으며, 악을 정치 교화의 도구로 인식하였다.
그의 사상은 송나라 명리학의 개창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그는 송 명리학의 開山祖師로 인정받았다. 저서에는 『太極圖說』, 『通書』등이 있고, 이 밖에 淸人들이 편찬한 『周子全書』가 있다.
송나라 영종 가정13년(1220)에 元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종 순우 원년(1241)에 汝南伯에 봉해졌고 공자의 廟廷에 종사되었으며, 元의 인종 연우 6년(1319)에 道國公으로 가봉되었고, 명 세종 가정 9년(1536)에 先儒周子로 개칭되었다.
2. 豫國公 程顥(1032 - 1085)
◐. 西 配享 第六位
북송 때의 저명한 철학가로 '북송오자'중의 한 사람이며, 송 명리학 창시자 중 한 사람이다. 자는 伯淳인데 세칭 '明道先生'이라고 하였으며, 河南 洛陽사람으로 송 인종 明道 원년(1032)에 출생하여 송 신종 원풍 8년(1085)에 졸하였다. 進士 에 합격하여 조악(調 ), 上元 의 主簿로 발탁되었고, 晉城, 扶溝의 縣令을 지냈으며, 후에 呂公著의 천거에 의하여 太子中允, 監察御史裏行이 되었다. 젊었을 때 그의 아우 정이(程 )와 함께 주돈이(周頓 )에게 배웠으므로 二程으로 병칭 되었고, 그들이 장기간 낙양에서 강학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학을 洛學이라고 하였으며, 宋儒들은 정호를 공맹의 道를 계승하고 크게 발양한 眞儒로 여겼다고 한다.
정치적으로는 司馬光, 邵雍과 같은 입장에서 王安石의 신정을 반대했으며, 인종에게 개혁 방안<治法十事>를 올려 토지 겸병의 제지와 병역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고 농업 생산을 강조하였다. 철학적으로는 천리를 핵심으로 하는 유심주의의 철학체계를 창립하였는데, 인심(人心)으로부터 출발하여 천리를 해석하여 理와 心 그리고 주관 객관은 융합하여 일체가 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또한 공자의 '仁'의 범위를 확대하여 "仁이란 만물과 혼연하게 한 몸이 되는 것이다"([識仁篇]라 하여 仁을 주관과 객관의 상호 융합으로 보았다. 인식 방법으로는 人心의 自省과 內求를 중시하여, "학자는 반드시 멀리서 구하지 말고 가까이 자신에게서 취해야 한다"(『유서』)고 하였다.
정호의 이론과 그의 아우 정이의 학설은 남송의 朱熹에 의하여 계승 발전되어 송원명청의 통치 사상이 되었으니. 이를 程朱學派로 일컬었다. 저서로는 『定性書』, 『識仁篇』등이 있으며, 후인들이 그와 정이(程 )의 저서를 합편한 『二程全書』가 있고, 『二程集』이 있다.
송나라 영종이 가정 13년(1220)에 純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종 순우 원년(1241)에 공자의 묘정에 종사되었으며 河南伯에 봉해졌다. 원나라 문종 지순 원년(1330)에 豫國公으로 가봉되었다.
◐. 西 配享 第七位
5. 郿伯 張載(1020 - 1077)
◐. 東 配享 第八位
6. 徽國公 朱熹(1130 - 1200)
◐. 西 配享 第八位
대성전에 배향된 우리나라 현사로서 조선 시대에 정해졌다. 신라 시대 2인, 고려 시대 2인, 나머지 14명은 조선 시대 인물이다.
650년~740년경 신라 경덕왕 때의 儒學者, 자는 聰智, 호는 氷月堂. 慶州薛氏의 시조입니다.
元曉大師와 瑤石公主의 아들로 新羅十賢 이며, 强首. 崔致遠과 함께 신라 3대 文章家로도 불렸다. 1022년(고려 현종 13) 弘儒侯에 追封 되고, 文廟에 配享되었습니다.
慶州崔氏의 시조이며, 자는 孤雲․ 海雲이다. 869년(경문왕9) 당나라에 유학하여 관직생활을 하다가, 885년 귀국하였다.
그의 학문관은 유․불․도 三敎를 융합․조화시킨 三敎調和論 내지는 三敎同一論이었나 그는 儒者임을 자처하였고 유학에 대한 학문적 정열과 공자를 존경했다고 한다.
저서에『孤雲集』․『桂苑筆耕』․ 中山覆簣集』․『釋順應傳』등이 있 다.
文昌侯에 追封되었고, 고려 현종 때 內史令에 追贈. 文廟에 配享되어있다.
조선 중종때 周世鵬이 순흥의 白雲洞에 白雲洞書院을 세웠으며,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후, 소수서원으로 사액받았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서원의 시초가 되었다.
안향 선생은 조선시대 배향될 당시 안유로 배향되었는데 조선 문종의 이름이 향이었기문에 임금의 이름은 피휘하여 쓸 수 없었다.
조선시대에서 대한제국으로 그리고 다시 대한민국으로 바뀌면서 안향으로 배향되었으며 아직도 전통을 따라 안유로 배향한 향교가 있다고 한다.
고려 공양왕 때의 성리학자로, 자는 達可, 호는 圃隱이며, 초명은 夢蘭. 夢龍이고, 본관은 延日이다. 東方理學의 祖라고 불리고 있다.
사림에서는 그에게서 비롯하여 吉再. 金叔滋. 金宗直. 金宏弼. 趙光祖로 도통이 이어진다고 설명하여 그를 도통의 鼻祖로 평가하고 있다. 시호는 文忠이며, 저서에 『圃隱集』이 있다.
조선 성종, 연산군 때의 성리학자로, 자는 大猷, 호는 寒暄堂․ 蓑翁이며, 본관은 瑞興이다.
조선 연산군 때의 성리학자로, 자는 伯勗, 호는 一蠹이며, 본관은 河東이다.
金宗直의 문인이며, 金宏弼. 金馹孫 등과 교유하였고, 지리산에서 3년간 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하고 성균관 儒生이 되었다.
1498년(연산군 4) 戊午士禍로 鍾城에 유배되었고, 사후에 甲子士禍가 일어나자 剖棺斬屍되었다.
그는 정치적으로 사화에 희생되었으나 품행과 학문으로 士林의 사표가 되었으며 도통을 계승․전달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조선 중종 때의 성리학자로, 자는 孝直, 호는 靜庵이며, 본관은 漢陽이다.
金宏弼의 문인으로, 金安國․ 金正國. 奇遵 등과 교유하였으며, 1515년 성균관에 천거되고 사헌부감찰․공조좌랑․홍문관부수찬․교리․응교 등 역임하였다.
또 1518년에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賢良科를 실시하게 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新進士類를 등용하였다.
조선 중종 때의 성리학자로, 초명은 迪이고, 자는 복고復古, 호는 晦齋. 紫溪翁)이며, 본관 은 麗州이다.
명종대[명종2년:1547]에 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江界에 유배되고 配所에서 죽었다.
또한 『大學章句』를 심도 깊게 연구하였으며, 그의 사상은 성리학의 발전을 도모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는 성리학의 대표적인 학자로 자리 잡았다. 저서에 『晦齋集』이 있다.
자는 景浩, 退溪. 陶叟 退陶․ 靑涼山人이며, 본관은 眞寶(靑松)이다.
金安國의 문인으로, 성균관에 들어가 李滉과 함께 학문을 닦았으며 盧守愼. 奇大升. 鄭之雲. 李恒등과 교유하였다.
兒名은 見龍, 자는 叔獻, 호는 栗谷)․ 石潭․ 愚齋. 본관은 德水이고, 江陵 에서 출생했음.
1554년 成渾과 道義의 교분을 맺었고, 이 해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고, 다음 해에 하산하여 다시 유학에 전심하였다.
9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 급제하여 ‘九度壯元公’이라 불리고 있다.
우계 성혼과 나눈 人心道心論爭은 조선 성리학사의 대표적인 논쟁으로, 이황과 기대승 사이의 사단칠정논쟁과 더불어 조선 성리학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자는 浩源, 호는 牛溪․ 黙庵이며, 본관은 昌寧이다. 아버지 성수침와 白仁傑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李珥, 宋翼弼 등과 교유했다.
항상 李滉을 흠모, 私淑함으로써 당시 이이와 쌍벽을 이루는 성리학자로 대성했다.
이황의 理氣互發說이 朱熹의 말에 부합된다 하여 감복하였고, 이로써 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하는 이이와 1572년부터 6년간에 걸쳐 四端七情에 대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인심도심이 모두 정情이므로 도심은 理 발한 것이고 인심은 기가 발한 것이라는 말은 맞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이이와 성혼의 이러한 논변은 이황과 기대승간의 四七論辨과 아울러 조선 유학사상의 중요한 업적으로 남았다.
宋翼弼, 李珥의 문인이며 주자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禮 실천의 주체로서 개인의 修身을 강조하고 『家禮』의 보급으로 풍속의 교화와 倫常의 실천에 노력했다.
송익필에게는 예학을, 이이에게는 성리학을 전수받아 그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예론을 깊이 연구하여 조선 유학의 泰斗로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했다.
그의 사상은 아들인 金集과 문하의 宋時烈․ 宋浚吉 등에게 전해져서 西人을 중심으로 한 畿湖學派에서 크게 성하게 되었으며 그의 예론은 모든 儀禮의 규범이 되었다.
자는 汝式, 호는 重峰․ 陶原․ 後栗이며, 본관은 白川이다.
자는 士剛, 호는 愼獨齋이며, 본관은 光山으로 사계 金長生의 아들이다.
김장생과 宋翼弼에게서 예학을 전수받았고, 禮學에 더욱 연구하여 『喪禮備要』등 김장생의 舊本을 하나하나 검토 수정하였으며, 조선 예학의 기본적 체계를 완비했다.
門下에 尹宣擧와 兪棨․ 李惟泰․ 尹文擧 등의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16. 문정공(文正公)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
아명은 성뢰聖賚, 자는 영보永補, 호는 尤庵․ 華陽洞主이며, 본관은 恩津이다.
宋甲祚의 문인으로 李珥의 학통을 계승하여 畿湖學派의 주류를 이었다. 宋浚吉. 李惟泰. 尹宣擧 등과 교유했다.
효종 장례 때 慈懿大妃의 服喪問題 가 제기되자 윤휴(尹鐫) 등 남인의 3년설을 물리치고 1년설을 관철시켜 남인을 실각시키는데 이것은 후일 政爭의 빌미가 되었다.(제1차 禮訟)
仁宣王后의 죽음으로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가 논의되자, 전일의 禮論에 따라 大功說(9개월) 을 주장했으나 남인의 朞年說이 채택되어 禮를 그르쳤다는 죄목으로 실각했다 (제2차 예송)
숙종에게 경종의 왕세자 책봉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鞫問을 받기 위하여 상경하던 중 남인의 주장으로 賜死되었다.
이이의 학통을 계승하고 김장생의 禮學을 전수했고 공자,맹자,주희의 心法이 바르다고 굳게 믿어 일생동안 立心의 요결로 삼았다고한다.
字는 明甫, 號는 同春堂, 同春이며, 本貫은 恩津 이다.
尤庵 宋時烈과 함께 金長生, 金集에게서 성리학과 禮學을 배웠으며, 장인인 鄭經世에게서도 수학하였다.
학문에 전념하여, 淸西派에 속하는 西人으로서 효종 즉위 후 재기용되어 인조 말부터 권세를 잡고 있던 功西派의 金自點과 대립했다.
1차 禮訟이 일어나자 송시열과 함께 南人 尹鑴(윤휴) 등의 3년제를 반대하고 朞年制를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그는 송시열과 학문적 경향을 같이하는 栗谷學派의 성리학자로서 특히 예학에 밝아, 그의 文集 가운데에는 禮說에 관한 질의 문답이 많다.
18. 문순공(文純公)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1631-1695
1차 禮訟논쟁이 일어나자 西人으로서 송시열과 함께 행동하였으며 서인이 老論, 少論으로 분열될 때 소론의 領袖가 되었다.
明德, 知覺 등도 理氣의 合이며 虛靈 역시 이기의 합이므로 심 또한 이기의 합이라고 주장하여 이이,김장생(金長生),송시열 등의 학설에 반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