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다. 송곳같은 비가 내린다.
내릴 바엔 한 사나흘 쏟아져 버리지.
나는 반쯤 젖어 은행 앞에
비를 피하여
도둑처럼 은행문을 곁눈질한다.
눈 조심해, 이 친구
세상이 아는 큰 도둑들은 도둑이 아니고
좀 도둑들만 도둑일 수 밖에 없는
시절이니까.
에라 모르겠다.
도둑들의 눈에는 모두가 도둑으로
보일테니,
아서라 아서.
이까짓 헌옷 따위 젖어 구겨진들 그 무슨
상관이랴
으하하하, 비가 내린다.
장대같고 칼날같은
비가 내린다.
으하하 으하하하.
(양성우, '비오는 날 은행 앞에서' 전문)
최근 집 한채가 전부라던 전직 대통령은 재판에 넘겨져,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고 국고 손실을 끼친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역대 대통령 중 가장 깨끗하다고 자부하던 또 다른 전직 대통령은 지인으로 하여금 국정을 좌지우지 하도록 했던 죄목으로 역시 중형을 선고받고 재판을 진행중이다.
아직 재벌들은 죄를 짓고도 집행유예로 풀려나서 반쪽짜리 심판이 내려졌다고 여겨지지만, 그래도 떵떵거리며 살던 '큰 도둑들' 일부에게 내려진 판결로 인해 사회의 정의에 조금은 가까워진 느낌이다.
이 시는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화자가, 갑자기 내린 비에 은행문 앞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구겨진 헌옷을 입은 화자는 비를 피하는 일이 아니라면 은행 앞에 갈 일이 없을 지도 모른다.
누군가 누추한 화자의 행색을 보고 은행에 어울리리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혹은 은행 출입에 어울리지 않는 화자를 보고 '좀 도둑'이라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자괴감마저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돈이 넘쳐나는 은행문을 곁눈질하는 것만으로도 뭔가 죄를 짓는 듯한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 시를 쓰던 시절은 큰 도둑들이 넘쳐나던 때이고, 오히려 좀 도둑들에게 정의를 부르짖었던 것이라 여겨진다.
한때 우리 사회에 통용되던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표현도 떠오른다.
가진 것 없는 화자에게 갑자기 내리는 비는 '장대같고 칼날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비록 가진 것은 없더라도, 내가 떳떳하면 그만이기에 구겨진 헌옷인들 상관없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경제적 약자들에게는 삶이 팍팍할 수밖에 없는 시절이다.
그래서 이 작품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지도 모르겠다.(차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