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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벤야민은 20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가장 중요한 문예비평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가 남긴 방대한 저작들은 여전히 비평가들에게 탐독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그가 내세운 몇몇 용어들은 근대의 사회와 문화 현상을 설명하는데 중요한 척도로 인식되고 있을 정도이다. 예컨대 모방이라는 의미의 ‘미메시스’나 예술 작품에 깃들인 고고한 분위기를 뜻하는 ‘아우라’와 같은 용어들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과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펼쳐지는 근대성의 실체를 탐구하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새롭게 접근한 방법론도 당시로서는 대단히 선구적인 시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파리라는 대도시(메트로폴리스)가 출현하자, 그것에 매혹되면서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며 과거의 물건들을 수집했던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비록 미완성으로 남겨졌지만 당대의 문화사를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을 제공해주기도 했다.
근대문화와 비평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벤야민이라는 거장을 거쳐가야만 한다. 하지만 그의 방대한 저작을 읽어내기도 쉽지 않을 뿐아니라, 오늘날의 상황과 다른 20세기 전반 유럽의 현실에 토대를 둔 그의 이론 체계를 이해하는 것도 결코 만만치 않다. 그런 의미에서 벤야민의 삶과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이 책을 읽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대단히 유용한 경험이었다고 생각되었다. 작년에 세상을 떠난 철학자 김진영의 정치한 연구가 집적되어 있어, 이 책은 벤야민에 대한 평전과 같은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 그래서 책의 부제도 ‘김진영의 벤야민 강의실’이라고 붙였을 것이다.
저자가 행했던 강의의 원고를 엮어 만든 이 책은, 모두 10개의 강의로 구성되어 있다. 그동안 벤야민의 이론과 그가 내세운 용어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을 지니고 있었기에, 그의 생애로부터 다양한 저작을 통한 이론적 분석이 뒤따른 이 책의 내용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특히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매우 급진적이고 정치적으로 살 수 밖에 없었던 벤야민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아마도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라는 책의 제목은, 벤야민이 과거 물건들을 수집하면서 ‘과거를 남김없이 기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자세를 견지했던 것에서 착안한 것이라 여겨진다.
이 책은 저자의 강의를 모아 엮은 것이라는 특성 때문에, 전체적인 흐름을 유지하면서도 개별 강의들도 독립적으로 완결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목차만 보더라도 벤야민의 이론이 지니는 성격이 주요 개념들로 명료하게 정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근대의 특징들을 신화와 종교 그리고 정치와 예술 등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결국 이러한 개념들은 근대성을 해명하는데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 때문에 벤야민은 ‘도시산책자’로 자처하면서,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 찾기’의 일환으로 다양한 물건들을 수집하고 집적하는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나아갔던 것이라고 이해된다.
특히 마지막 강의에 제시된 다음의 구절은 오늘날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증오’와 ‘희생’의 의미를 음미할 수 있게 해준다. 벤야민은 역사 속에서 패배를 당해온 이들에게 ‘복수의 정신’을 강조하고, 이 복수의 정신을 중오와 희생의 정신과 일치시키고 있다. 이러한 내용들은 나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겨진다.
“증오란 정당한 분노입니다. 그것은 미워해야 할 것들에 대해 정당하게 미워할 수 있는 정신이며, 동시에 전통을 탈취하기 위해서 버려야 할 그 무엇인가를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분노와 희생은 서로 등과 배처럼 붙어있습니다. 우리는 ‘희생한다’라는 말을 ‘용서한다’와 혼동하는데, 그것으로는 절대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벤야민은 희생의 이데올로기를 분노로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분노와 희생이 연결되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복수라는 이름으로 이야기를 하려면 이러한 증오와 희생정신이라는 변혁의 힘이 있어야 합니다.”
최근 과거 정부의 부조리한 현실을 바로잡는 문제에 대해, 일부 언론들에서 ‘피로감’ 운운하자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과연 청산의 대상이 된 그들이 얼마나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있는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오히려 그것을 내세우며 다시 과거의 적폐를 불러들이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과거의 ‘적폐를 청산’하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정당한 분노’라고 생각된다. ‘무조건적인 화해’는 어쩌면 반성하지 않는 자들에게 다시 과거의 과오를 되풀이하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에게는 저자가 정리한 벤야민의 사상을 통해서 다시 지금의 현실을 되새길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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