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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토크라시(vetocracy) : 양당이 서로를 거부하는 극단적인 파당정치 때문에 미국 정치가 완전히 동맥경화에 걸려있는 상태를 말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교수
{역사의 종언}(1992)
{정치질서의 기원}(2014)
{트러스트}(1995)-구입할 것
어리둥절한 족속
김--
#1
P시의 심장부에는 이런 낙서가 흐른다.
질주하다 괴물쇼!
S시의 변두리에는 또 이런 낙서.
나의 흐르는 강은 현기증.
누군가 매직으로 휘갈긴 그 낙서는 사람들의 발길 속에서 수련처럼 고요히 피어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낙서는 Y시에서 보았다. 어느 대기업의 고층빌딩 마지막 층이었다.
농담이 아냐. 2천이라는 빚이 어느새 2억으로. 별수 있나. 오늘도 넥타이를 매고 30년간 출근한 건물로 나를 밀어 넣지. 삶이 권태롭냐고? 그럴 리가 있나. 다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 계단이 멈추지 않기를.(?)
글자는 에스컬레이터 벽면을 따라 잠자리 날갯짓처럼 섬세하게(?) 쓰여 있었다. 끝까지 읽어내려면 적잖은 집중력이 필요했다. 허리를 굽혀 상체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모든 정신을 집중한 뒤에야 겨우 마침표를 만날 수 있었다.
이따금 슬픈 농담을 떠올리고 싶은 저녁이면, 나는 어느 중년의 셀러리맨을 상상한다.
그는 이 계단이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그는 이 계단이 영원히 이어져 있기를 바란다.
그는 이 계단 밖으로 추방당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는 양복 주머니에서 펜을 꺼낸다. 잉크가 거의 남지 않은 펜이다.
그는 펜을 꾹꾹 눌러 문장을 만든다. 세상에 사직서를 던지는 심정이다. 다 썼을 때 그는 에스컬레이터 끝에 다다른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니 조금 전에 쓴 문장이 너무도 궁금하다. 그러나 그는 다시 내려가지 않는다. 삼십 년이나 지겹도록 타온 계단이었다. 더 이상은 못 해먹겠어. 그는 옥상으로 통하는 문을 연다.
그리고 다음 날.
그의 낙서는 세 명의 자식을 먹여 살리는 늙은 청소부의 손에 흔적도 없이 지워진다. 청소부는 수세미를 박박 문지르며 신경질스럽게 투덜거린다. 누가 여기에 이따위 낙서를. 못 해먹겠군!
그런 식이다.
한 시간에 육천에서 구천 명을 실어나르는 이 거대한 기계는 규정에 의하면 분당 삼십 미터로 속도가 제한되어 있다.
백화점의 특별 할인 행사를 향해 돌진하는 무리에게는 턱없이 느린 속도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유서를 적을 만큼 충분한 시간을 보장하기도 한다.
그래. 그런 것이다.
#2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직원이 에스컬레이터 끝에서 소리쳤다. 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의미로 양손을 들어 좌우로 흔들었다.
그와 나 사이에는 열다섯 칸의 계단이 놓여 있었다. 직원의 입 모양과 동작은 갈수록 격렬해져 나는 난파하는 배에서 홀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직원은 자리를 떠나더니 곧 수리복을 입은 두 남자와 함께 에스컬레이터를 내려왔다.
“기계를 수리해야 합니다. 손님.”
애써 짜증을 감추려는 노력 때문에 그의 공손한 말투는 지나치게 부드러웠다.
“자리를 비켜주시지요. 불편하더라도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주십시오. 손님.”
직원은 말끝마다 손님이라는 호칭을 잊지 않았다.
두 기사 중 한 명이 공구함을 바닥에 내려놨다. 차갑고 무거운 공구들이 그 속에서 서로 몸을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다른 기사는 손목시계를 검지로 툭 툭 가리켰다. 나는 머뭇거리지 말고 내 뜻을 빨리 전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들을 올려다보느라 목이 뻐근해져 왔다.
“불편이라면 이미 겪었습니다.”
“어떤 불편 말씀이십니까.”
“십분 전엔 치와와를 든 여자가 내 발을 밟고 갔죠. 유도부원처럼 보이는 남학생 무리는 위협적으로 날 밀치고 갔어요. 몸집 자체가 흉기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서 굴러떨어지지 않은 게 다행이랄까요. 당신들이 세일 행사다 뭐다 방송을 해대는 바람에 사고를 당할 뻔했지요. 이 백화점은 최악입니다. 아무도 질서를 바로잡으려 하지 않더군요.”
내 목소리는 점차 고조되어 갔다. 타인과 대화를 해본 지가 언제였더라. 마지막은 2년 전이었다. 기르던 비단뱀이 무지개다리(?)를 건넜을 때였다. 동물병원 원장은 단식으로 자살한 동물은 처음 본다며(??) 미라처럼 말라버린 내 뱀의 피부를 알코올 솜으로 문질렀다.
나는 브라질에서 건너온 동거인에게 마틴 루터 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둘에겐 검은 피부색과 폭력을 싫어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연설하듯 수시로 입을 뻥긋거렸다. 그때마다 촘촘하게 박힌 뾰족한 이빨이 모습을 드러냈다. 살아있는 쥐를 앞에 가져다줘도 입맛을 다시기는커녕 애정을 느끼는 듯했다. 나의 비폭력 뱀은 쥐를 잡아먹지 않았다. 대신 깊은 포옹으로 쥐의 몸을 감싸 사랑을 증명했다. 그 숨 막히는 사랑은 매번 말 그대로 쥐의 숨통을 졸라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폭력이건 사랑이건 결론은 다르지 않았다.(??)
“이 에스컬레이터는 분당 27미터로 움직입니다.”
직원은, 어째서 당신이 그런 것까지 알고 있는 거야, 라는 표정이었다.
“에스컬레이터와 오래 생활하다 보면 자연 알게 되는 법이지요. 사람이 붐비는 오후 7시 이후엔 분당 25미터로 느려지더군요. 진열된 상품들로 고객을 유혹하기 위한 꼼수가 깃든 수치겠지요.”
“백화점의 에스컬레이터가 지하철의 그것과 같아서야 되겠습니까.”
직원이 맞받아쳤다.
“하지만 세상에는 규정이란 것이 있습니다.”
“감사를 나온 겁니까?”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두 기사가 동시에 하품을 했다(??). 각각 에스컬레이터 양쪽 벽에 기대어 입이 찢어져라 벌렸다. 데칼코마니처럼 멋진 앙상블이었다.(??)
“당신은 뭐하는 사람입니까.”
직원이 재차 물었다.
나는 바지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살다 보면 뜻하지 않게 자신을 밝혀야 하는 순간이 오기 마련. 사람들은 첫 만남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타인에게 뭘로 먹고 사는지부터 물어본다.
“에스컬레이터 향유자?”
직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습니다.”
“이건 무슨 업종입니까?”
“보이는 그대로입니다.”
“흠……”
직원은 몸을 돌려 등 뒤의 기사를 바라봤다. 그들은 하품을 멈추고 서로를 향해 코딱지를 날리고 있었다.(??)
“어쨌든 자리를 비켜주시죠. 수리를 해야 하니까요.”
“방해되지 않는다면 이대로 있겠습니다.”
“고집부릴 일이 아닙니다.”
“전 이곳이 편합니다.”
그리고 침묵.(??)
곰곰이 생각에 잠기던 직원이 일순 호기심 어린 눈초리를 띠었다.
“그러니까, 고객님은 에스컬레이터에 흥미를 가지신 분이군요.”
어느새 직원의 말투는 아주 공손하고, 부드럽게 바뀌어 있었다.
나는 만족스러웠다. 그가 내 취향에 대하여 ‘흥미’라고 표현해준 점이. 서른두 살의 무직자. 취업에는 관심 없고 에스컬레이터 타는 것이 삶의 전부라고 말하면, 모두 고개를 흔들며 돌아섰다. 그의 눈에는 내 취미생활이 시간 낭비로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와는 친구가 될 수 있겠군. 단기간에 그와 깊은 공감대를 형성한 기분이었다.
“어차피 기계는 고장이 났고, 괜찮다면 이곳을 둘러보시죠.”
“쇼핑을 즐기진 않습니다.”
“이곳은 평범한 백화점이 아닙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천장 군데군데 매달려 어수선한 분위기를 풍기는 산타와 루돌프 장식, 곳곳에 자리 잡은 크리스마스트리. 실내는 크리스마스를 앞둔 백화점이 어떤지 눈을 감고 쉽게 떠올릴 수 있을 만큼의 조악한 상상력으로 한껏 꾸며져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뭘 파는 거지?
아무리 둘러보아도 백화점에는 상품이랄 것이 없어 보였다. 이맘때쯤 겨울옷으로 치장한 마네킹은커녕 매장 브랜드의 간판조차 찾을 수 없었다. 각양각색의 손님들만 무언가를 찾아 분주히 오갈 뿐이었다.
“장담하건대 이곳에는 흥미로운 상품들이 많습니다. 에스컬레이터보다 더.”
1호점, 2호점, 3호점…… 숫자가 쓰인 간판 아래 ‘아날로그 종’, ‘20세기 멸종군’, ‘독신남을 위한 상품’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희귀동물이라도 파는 겁니까.”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피라냐나 뭐 그런 위험한 동물들을 팝니까.”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이구아나나 개미핥기. 뭐 그런 겁니까.”
“하하하.”
직원의 웃음소리가 불쾌한 G플랫 음처럼 뻗어나와 8층의 소음을 덮었다. 교향곡의 1악장이 끝난 뒤 박수가 터져 나오기 직전의 고요처럼(표현이 과하다) 주변에 정적이 흘렀다.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입을 다문 채 직원의 웃음이 만들어낸 연주에 소박한 예의를 더했다. 물론 그 연주의 숨은 의미는 어렵지 않았다. 일종의 비웃음이었다. 그 웃음은 노골적으로 이런 말을 던지고 있었다. 이구아나라니. 하하하. 지금 장난하십니까.
“그 동물들은 더 이상 판매하지 않습니다. 고객들은 이제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구시대의 구태의연한 취미생활이랄까요. 이구아나나 개미핥기를 애완으로 기르는 건.”
등 뒤로 하나씩 더해지는 사람들의 꼼꼼한 시선이 따가웠다. 멸종 위기의 생물을 관찰하듯 사람들은 나를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아마도 내가 무슨 말을 꺼낼지 기다리는 듯했다.
“간혹 그런 분들이 계십니다. 최신 유행에 둔감하신 분들.”
직원은 재빠르게, 그러나 숨기지 않고 노골적으로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나는 몇 년 전 아울렛에서 싸게 구입한 점퍼를 벗어 던지고 싶었다. 수치심이라는 감각에 예민한 편은 아니었지만, 이 순간 차라리 발가벗고 있는 편이 덜 부끄러울 것 같았다.
“실례지만, 일주일에 백화점은 몇 번이나 출입하십니까? 물론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군요. 오늘부터는 어제보다 더 부지런한 사람이 되십시오. 뭐라 해도 시대를 따라가려면 백화점 출입은 정기적으로 하셔야 합니다.”
직원은 옛 친구에게 진심 어린 조언이라도 던지듯 (+?+) 자신의 역할에 깊이 몰입했다.
“그럼 요즘 유행은 뭡니까?”
시시하면 한마디 해줄 생각으로 쏘아붙였다.
“인간입니다.”
“인간?”
“이곳은 인간을 판매합니다. 고객의 취향에 맞게끔 다양하게 개량된 인간들이 층층이 분류되어 있습니다. 위층으로 갈수록 구하기 힘든 상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명품들이죠. 그러나 개인적인 생각을 보태자면 14층은 가지 않는 게 나아요. 터무니없이 비싸고 다루기는 까다롭죠. 아마도 8층 정도가 적당하실 겁니다.”
직원이 손마디를 꺾었다.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취하는 그만의 전조 동작 같았다.
“한번 둘러보겠습니까?”
직원은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모르는 낯선 곳에 떨어진 어리둥절한 개를 어르는 손길 같았다.
혹시 질 나쁜 몰래 카메라는 아닐까. 하지만 밑져야 본전 같았다. 놀리려면 놀려봐라, 즐겁게 속아주겠다, 라는 마음으로 나는 직원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3
직원은 나를 6호점으로 안내했다.
입구에 ‘우리 시대의 히트 상품’이라는 플래카드가 보였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직원은 데스크에서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둘러보시지요. 의자에 앉은 상품들이 모두 애완이 되길 원하는 사람입니다.”
상품들은, 그러니까 애완이 되길 스스로 원한 사람들은, 푸른 네온 빛이 도는 정사각형 의자에 앉아 대기하고 있었다. 매장과 매장을 구분하는 건 별다를 게 없었다. 성당 창문에서나 보았던 스테인드글라스가 벽 역할을 대신했다.
상품들은, 그러니까 신기하게도 애완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은, 관찰당하는 입장에 놓여 있었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불편해하지 않았다. 그런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다. 허리 숙여 자신을 면밀히 관찰하는 눈동자에 시선을 맞춰 빙긋이 웃어 보이는 여유까지 있었다.
상품들은, 그러니까 애완 인간들은 한마디로 백화점과 상품으로서의 일체감이 존재했다.(?) 세탁기, 에어컨, 냉장고, 침대, 소파, 나무젓가락,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적응해야 했던 쪽은 나였다.
“이리로 오시지요.”
직원이 구석에 있는 30대 중반의 남자에게로 나를 이끌었다.
“아마도 이 상품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대화도 없이??)
“이것은 어떤 종류의 상품인가요.”
인간을 상품이라고 표현하는 말이 입밖에 나올지 걱정스러웠지만, 한번 ‘상품’이라고 내뱉으니 썩 어색하지 않았다.
“평소에 독서는 좀 하십니까?”
“일 년에 한두 권 정도는.”
“요즘 같은 세상에 책 읽을 시간을 남겨두기란 쉽지 않죠. 그런 분들을 위해 나온 상품입니다.”
직원은 신형 청소기를 소개하듯 덤덤하게 말했지만 그 속에 자부심이 가득했다.
상품은, 그러니까 애완 인간은 나를 올려다보았다. 적게 잡아도 내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산을 타다가 그대로 백화점에 들어왔는지 등산복 차림이었다. 바지 끝에는 단풍 잎사귀가 묻어 있었다.
“자기계발서 읽어주는 남자입니다. 나이는 쉰다섯. 신체 건강하고요. 지루해할 때마다 책 한 권씩 던져주면 주인이 집을 비워도 잘 지냅니다. 쉽게 길들일 수 있을 겁니다.”
“길들이다니요?”
“이 상품은 한때 요리사였습니다. 그 밖의 재능을 찾아내는 건 구입자의 몫이죠. 상상력을 발휘하세요.”
“목소리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책을 읽어주는데 목소리가 앙칼지거나 걸걸하면 곤란하겠죠.”
덧붙여 직원은 백아흔두 가지의 자기계발서가 이 상품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다고 말했다. 마치 로봇청소기에 음성 인식 기능이나 감시 기능이 탑재된 것처럼.
“제 말은 한마디가 한 권의 책입니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서 한순간 강력한 호소를 담은 표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 표정은 정중하고 간곡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날 선택해 주세요.
“딱 한 시간만 미쳐라!”
걸어 다니는 서적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두 주먹을 꽉 움켜쥐고서.
“30대! 이제 다시 공부에 미쳐라!”
상품은 나를 보며 소리쳤다. 나는 머릿속에 백 개의 전구가 켜진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한민국 2030, 경력테크에 미쳐라!”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우리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비스에 미쳐라!”
이런 오류가 있나.
미치라고 권유하면서 실제로 미친놈을 데려다 놓다니.
“좋아하는 일에 미쳐라!”
어느 순간 그를 따라 힘껏 두 주먹을 움켜쥔 나를 발견했다.
“‘반 고흐’처럼 너도 미쳐라!”
이런.
정말 미쳐야 하는 걸까.
“도살장의 개처럼 미쳐라!”
도살장의 개도 미쳐있었다.
“동물원의 하마처럼 미쳐라!”
심지어 하마도 미쳐있었다.
“미쳐야 통한다!”
계속 미치라는 명령을 듣고 있으니 정말 미칠 것 같았다.
“하루에 십분, 명상에 미쳐라!”
그건 내가 정상이라는 증거였다.
“재테크에 미쳐라!”
하지만, 어쩌면 이 상품이야말로 정상인지 모른다.
“미쳐라!”
이모양 이꼴로 사는 이유는 모든 게 다 내가 정상이기 때문이 아닐까.
반 고흐도 미치고, 하마도 미치고, 도살장의 개도 미치고, 딱따구리도 나무를 쪼는데 미치고, 비둘기도 아스팔트를 쪼는데 미치고, 직원은 손가락을 딱딱거리는데 미치고, 하다못해 이 상품도 자신을 팔아달라고 미치게 부르짖는데, 왜 난 여태 미칠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주의사항이 있습니다. 컨디션이 저조한 날에는 억지로 읽으라 강요하지 마세요. 스트레스를 받거든요. 개나 고양이처럼요.”
직원이 속삭였다.
나는 불 꺼진 아파트 거실에서 소파에 기대앉아 소리치는 상품을 상상했다. 새벽에 오줌을 누려고 방을 나왔다가 그 꼴을 보면 소름이 돋을 거였다.
“아무래도 곤란하겠어요.”
나는 자기계발서 읽어주는 남자를 차마 바라보지 못했다.
“왜요?”
딱히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은 잇지 못했다. 직원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끼어들었다.
“자기계발서가 싫으시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직원은 다른 상품을 추천하기 시작했다. ‘소설 읽어주는 여자’. 그것보다 좀 더 저렴한 ‘소설 읽어주는 습작생’. 물론 작품의 질은 떨어진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소설이 있으니 당연히 ‘시 읽어주는 꼬마’도 있었다. ‘공자 읽어주는 소녀’나 ‘니체를 탐독하는 16세의 소년’. 철학뿐 아니라 물리, 미술 등 다방면의 상품이 그의 입술을 통해 소개됐다. 그중에 심지어 ‘야설 읽어주는 노처녀’도 있었다.
제안을 거절한 뒤 서둘러 매장을 빠져나가려는 나를 직원이 붙잡았다.
“이대로 가는 겁니까.”
내 팔을 붙잡은 직원의 손엔 힘이 잔뜩 들어 있었다.
“네.”
“다음 층을 둘러보시죠. 더 흥미로운 상품이 많습니다.”
나는 못 이기는 척 직원의 뒤를 따랐다.
에스컬레이터는 수리가 끝난 상태였다.
나는 문득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한번도 에스컬레이터의 수리가 끝났는지 궁금하지 않았던 것이다.
#4
우리는 9층에 내렸다.
두 번째 방문이라 마음은 전보다 더 느긋했다.
14호점에는 여덟 개의 상품이 입구를 제외한 벽면을 따라 ㄷ자 형태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남자 셋, 여자 다섯……
여자가 다섯……
여자가 다섯……
그녀들의 나이를 짐작하기란 어려웠다. 사실 나란 인간은 여자들의 얼굴만 보고 나이를 알아맞히는데 서툴렀다. 학창시절 짝꿍이라는 것의 존재를 제외하면, 이렇게 가까이서 여자들을 본 적도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모두 애완이 되길 바라는 여자였다!
나는 직원에게 이왕이면 여성 상품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일종의 동거인이 생기는 셈인데 우중충한 남자 쪽보다는 여자가 더 적합할 거라고 진작에 마음을 둔 터였다.
내 요구를 들은 직원은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골방에 틀어박혀 나초와 치즈로 입가를 더럽히며 일본 애니메이션을 볼 때나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나는 즉시 내 말에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깨달았다.
“저, 그런 의미는 아니고……”
“알고 있습니다. 고객님. 그런 식의 상품은 취급하지 않아요. 여긴 동네 구멍가게가 아닙니다.”
직원은 한 여성을 보여주었다.
“흥미로운 상품입니다.”
상품은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전직 오디션 심사위원인 K씨입니다.”
그녀의 독설에 눈물을 흘리며 돌아선 가수 지망생들의 얼굴이 하나둘 떠올랐다. K씨의 눈빛은 브라운관을 통해 볼 때보다 더 날카롭게 빛났다.
“심사위원 특유의 냉철함으로 고객의 현재 모든 것들을 파악해줍니다.”
“하지만 나는 가수가 되기를 원하지 않아요. 내 인생과 이 상품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같은데요.”
그러자 K씨는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그래도 저는 평가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평가한다는 말입니까.”
“무엇이든.”
“허허 참.”
“당신과 얘기하는 동안 생에 처음으로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겨우 3초 얘기해놓고 무슨!”
“그것도 길어요. 난 세상에서 제일 지루한 3초를 경험한 셈이네요. 당신에겐 타인을 집중시키는 힘이 부족합니다.”
전직 오디션 심사위원은 막무가내였다. 브라운관에서 보았던 독설을 나는 지금 시청자의 입장이 아닌 참가자의 입장에서 듣고 있었다.
“조금 더 성장하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지금 당신의 상태는 삼류입니다. 삼류에요.”
이런 것에 돈을 지불하는 사람이 있을까. 매일 자신에게 독설을 내뱉는 기계를 옆에 두고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할까. 화가 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전직 오디션 심사위원의 말에 나는 점점 더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욕과 비웃음을 던지면서도 텔레비전 앞을 떠나지 못했을 때처럼. 그뿐 아니라, 내 모습은 양손을 포개고 고개를 반쯤 숙인 오디션 참가자의 자세, 그거였다.
“인생 자체가 오디션입니다. 그걸 모르기 때문에 당신은 언제나 오디션에서, 아니 인생에서 탈락하는 겁니다.”
이 상품이 더 이상 지껄이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나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떠드는 건가. 그러나 내 몸은 반대로 반응하고 있었다. 독설에 중독되어갔다고나 할까. 내부에서 싹튼 희미한 반발심은 그녀의 말을 경청하는 동안 깡그리 사라졌다. 오히려 기대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분석했고, 해체했다. 나는 내 자신이 과연 몇 점이나 받을 수 있을까 궁금했다.
그녀는 채점을 마치고, 점수를 공개했다.
썩 높은 숫자는 아니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인생을 아마추어로 산 대가치고는 그래도 후한 점수였다.
#5
“현기증이 나.”
나는 중얼거렸다.
폐점이 가까워지자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는 사람보다 내려가는 사람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9층 난간에 기대어 바글거리는 사람들의 이동을 보고 있으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불안한 마음이 드는 날이면 나는 이제껏 가보지 않은 도시의 에스컬레이터를 찾곤 했다. 누구나 저마다의 안식처가 있겠지만 나는 이곳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꼈다.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움직이는 검은 계단에 몸을 싣고 있으면 마틴 루터 킹과 함께 있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가슴을 뛰게 만드는 풍경도 모두 이 계단 위에서 보았다. 도시 곳곳에 숨은 낙서들. 그것을 하나씩 찾아내는 재미. 단순한 고장이지만 사실은 그 속에 숨은 이유들. 기계는 괜히 멈추지 않는다. 하다못해 꼬마가 흘린 레고 한조각이 기계를 멈추게 하고 혼란을 일으킨다.(?)
한때 이곳에는 은하수의 별처럼 지상의 양식이 흩뿌려져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언제나 마음의 휴식처가 되어주었던 검은 계단을 나는 아무런 감정 없이 바라보고 있다.
직원은 마지막으로 꼭 추천하고 싶은 상품이 있다고 속삭였다. 차라리 강력하게 권유했다면 거절했을지도 몰랐다. 세상에 속삭임보다 마음을 흔들리게 만드는 건 없었다.
다음 층으로 가기 전에, 먼저 화장실에 들렀다. 직원은 친절하게도 내가 볼일을 마치는 동안 로비에서 기다려주겠다고 했다. 예측했던 결과였다.
화장실 구석 칸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옆 칸 아래에서 구둣발이 슥 밀고 나왔다. 그러더니 구둣발이 톡톡 톡톡톡 톡톡, 정확하게 2-3-2 박자로 바닥을 쳤다.
“뭐하시는 겁니까.”
내가 물었다.
“아 죄송합니다.”
라는 말과 함께 구둣발이 슥 사라졌다.
변기의 물을 내리고 세면대로 가서 물을 틀었다. 옆칸의 문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초췌한 인상의 남자였다.
“실례했습니다.”
“괜찮습니다. 근데 그건 뭡니까.”
나는 발로 바닥을 차는 시늉을 보였다.
“아. 그거요.”
“네.”
“암호입니다.”
“암호요?”
남자는 구둣발로 아까 보여주었던 박자를 보여주었다. 톡톡 톡톡톡 톡톡. 휘파람 한번. 다시 톡톡 톡톡톡 톡톡. 휘파람 한번.
“저와 같은 부류인 줄 착각하고 실례를 했습니다.”
중년의 남자는 자신을 애완 문화의 1세대라고 소개했다. 거대 시장이 형성되기 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박한 펫 문화가 생겨났을 때부터 그는 주인을 옮겨다니며 생활했다고 했다. 백화점에 입고되지 않은 사람들은 때때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자신을 데려갈 사람을 물색했다. 일종의 암표 거래처럼 백화점 루트를 통하지 않은 매매가 이뤄지는 거였다.
“하루종일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돌다가 누군가 화장실로 가면 따라 들어가 이렇게 메시지를 전하는 거죠.”
“그럴 바에야 백화점에 상품으로 들어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런 방법도 있지요. 하지만 취향의 문제랄까요. 저는 이편이 더 마음에 듭니다. 자그마치 삼십 년이나 했던 방식을 어느 날 깡그리 바꿀 수는 없더라고요.”
“백화점 지하에 상품들이 있습니까?”
“거기가 일종의 창고입니다. 애완을 원하는 사람은 그곳으로 들어가지요.”
“그렇군요.”
나는 거울을 통해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당신은 왜 애완이 되길 선택한 겁니까?”
“글쎄요.”
그의 눈이 내 눈과 마주쳤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우린 결국 무언가의 애완이 아닌가요.”
생각해보니 그는 한 번도 내게 말을 낮춘 적이 없었다. 직원이 줄곧 내게 공손했던 것처럼 예의가 몸에 새겨져 있었다. 평생 그렇게 살아왔다고 해도 나는 충분히 믿었을 것이다.
“혹시 9층 로비에 있는 노인을 본 적이 있는지요. 그는 삼 년째 소파에 앉아 있습니다. 신기하고 재밌는 노인이죠.”
중년의 남성은 손목의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곧 문을 닫을 시간이군요. 마지막으로 한번 더 돌고 오늘은 이만 집으로 가야겠네요.”
우리는 거울을 통해 서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행운을 빕니다.”
“행운을 빕니다.”
#6
직원은 로비 소파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중절모를 쓴 노인이 팔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직원의 어깨를 흔들어 깨우며 노인의 얼굴을 슬쩍 건너다보았다. 모자 그늘에 가려 노인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입은 뭔가를 오물거렸다. 노인의 몸에서 유일하게 주름지지 않은 것은 적갈색의 중절모 같았다.
“오래 걸렸습니다.”
“다음 층으로 가시지요.”
잠에서 깬 직원은 예의 쾌활하고 공손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우리는 다음 층으로 가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저 노인을 아십니까?”
내가 물었다.
“유명합니다. 저 노인은 벌써 몇 년째 저 소파에 앉아 있었거든요.”
“이유가 뭡니까?”
“맞춰 보세요.”
“가족 중 누군가가 쇼핑광인가 보군요.”
“그 반대입니다. 그가 쇼핑하기를 벌써 3년째입니다. 아침 일찍 이곳으로 와서 저 소파에 앉습니다. 그리고 고민을 하는 거죠. 무엇을 살까.”
나는 점점 작아지는 노인의 검은 중절모를 바라봤다. 백화점과 하루를 시작하고 마감하는 고단한 시간의 흔적이 중절모에 씌어 있는 것 같았다.
선택받기를 원하는 입장과 더불어 선택하는 쪽도 난처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노인은 그런 삶의 반복이 익숙해 보였다. 이 백화점이 노인에겐 집이나 다름없을지도 몰랐다. 백화점이 노인을 길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이 백화점의 충실한 애완동물처럼 어제도 그 자리에 있었고, 내일도 그 자리에 있을 거였다.
그런데 그게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마틴 루터 킹이라면 입을 뻥긋거리며 열심히 뭐라고 연설했을 것이다.
나는 마틴 루터 킹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그게 진실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의미를 모르기에 뭐가 진실인지 알 순 없을 테지만, 적어도 진실이 저기에 있다는 건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7
우리는 10층에 내렸다.
직원은 에스컬레이터 맞은편의 2호점으로 날 데리고 갔다. 다행이었다.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피곤함에 온몸이 무거워져 한걸음 떼기도 쉽지 않은 상태(?)였다.
2호점에 들어서자 마찬가지로 의자들이 보였다. 그 위에 애완 인간들이 하나씩 자리를 잡고 있었다. 구석에 빈 의자가 보였다. 의자의 주인은 자신을 판매하는 데 성공한 듯싶었다.
옆자리에는 속눈썹이 긴 20대 여자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당장에라도 속눈썹이 뚝, 떨어져 내릴 것처럼 슬픈 얼굴이었다.
더 슬퍼 보이는 쪽은 상품을 구입하러 들어온 손님들이었다. 8층과 9층에서 볼 수 없었던 이상한 기운이 매장 전체에 퍼져 있었다. 상품을 소개하는 활기에 찬 멘트들은 들리지 않았다. 매장에는 손님들의 훌쩍거리는 소리가 우울한 활기를 조장했다.
직원은 나를 속눈썹이 긴 여자에게로 데려갔다.
여자는 내가 다가가자 좀전의 슬픈 얼굴을 지우고 미소를 지으며 반겼다.
“이번 상품은, 고개 끄덕여주는 사람입니다.”
나는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직원을 바라봤다.
“다시 말해 힐링해주는 상품입니다.”
태어나서 이토록 완벽하게 온화한 미소는 본 적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건 오롯이 내 편에서 공감해줄 것 같았다.
“잘 오셨어요.”
미소가 환영했다.
“나는 내가 어디에 왔는지 모르겠어.”
“좀더 말해주세요. 당신의 혼란스러움을.”
“혼란스러운 게 아니야.”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사이에 흐르는 시간이 그녀의 속도에 맞춰진 느낌이었다.
“조금 어리둥절할 뿐이야.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 모르겠어.”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계에 몸을 싣고 있으면 불안함이 사라져. 내가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돼.”
여자가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다시 한 번 끄덕였다.
“그런데 지금 난 어디에 있는 거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내 안의 똘똘 뭉쳐진 불안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작은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차라리 노래일지도 몰랐다.
힐링은 내가 방어를 할 틈도 주지 않고, 서서히 내 속을 휘저었다.
눈물이 흘러도 부끄러울 것 같지 않았다.
그때 어디선가 카드 결제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어떠십니까. 마음에 드시나요?”
어느새 다가온 직원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참, 고객님 이 상품은 채식주의자입니다. 고기를 먹으면 죄의식으로 자살하니 주의해주세요.”
나는 카운터에 서 있었다.
직원이 사용설명서를 읽어주듯 몇 가지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폐점을 알리는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나는 싼값에 무언가를 팔아넘긴, 혹은 아주 저렴한 농담에 속은 기분이었다.
나는 힘겨운 한 마디를 꺼냈다.
“사양하겠습니다.”
그토록 힘겨울 줄 몰랐다.(??)
#8
나는 자장가를 불러준다는 노인들로 가득한 15호점을 지났다.
‘원 플러스 원’이라는 팻말이 붙은 16호점을 지났다.
부부가 유모차를 끌고 나오는 17호점을 지났다.
남편, 아내, 그리고 아이. 셋 중에서 누가 상품일까를 생각하며 18호점을 지났다.
쇼핑을 즐기던 손님들은 거의 사라졌다. 매장들도 하나둘씩 불을 끄고 문을 걸어잠그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백화점에 남은 이는, 아직 무언가를 선택하지 못했거나,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로비는 한산했다. 백화점의 마감과 함께 중절모를 쓴 노인도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점퍼를 벗고 남방의 단추를 풀렀다. 백화점 내부가 갑자기 덥게 느껴져서 숨이 막히는 듯했다. 폐점을 알리는 음악이 그쳤다. 천정에 달린 온도조절기에서 뜨거운 바람이 아래로 밀려 내려왔다. 거대한 짐승의 뱃속이 이런 느낌일까. 적당한 열기와 안락함은 나를 단잠으로 이끌었다. 쉬고 싶었다. 내 머릿속은 줄곧 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사람이 거의 빠져나간 에스컬레이터는 더 이상 위험하지 않았다. 나를 밀치는 이도, 내가 누군가의 앞을 가로막는 일도 없었다.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었다. 늘 그랬듯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이제껏 그래 왔던 것처럼 들어왔던 길로 조용히 사라지고 싶었다. 그러나 발길은 1층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지하에 도착했다. 나는 불빛 한점 없는 어두운 통로를 걸어들어갔다. 모퉁이를 돌 때 한번 뒤돌아보았지만 방향을 바꾸고 싶진 않았다.
왜 그 생각은 하지 못했을까. 어째서 스스로 애완이 될 생각은 하지 못한 거지? 썩 나쁜 선택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어리둥절한 자신의 영혼에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작은 위안을 주는 일에 가까웠다. 나는 반항하지 않았다.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나는 어떤 힘에 이끌려 순종적인 개처럼 끌려가는 자신을 내버려두었다. 길이 끊긴 곳에서 가느다란 빛줄기가 새어나왔다. 그 빛은 현재 내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온기의 전부였고, 새로운 세상이 부르는 환영의 목소리였다.(?) ■
1, 인상
반갑다.
오랜만의 작품이다.
나름 재미있게 읽었다.
활달한 감각적 재미 같은 것이 느껴진다.
다만 ‘문장표현’은 약간 아쉽고 ‘단락만들기’는 많이 아쉽다.
2, 줄거리
84매
8단락장
백화점 이야기다.
가상의 공간, 환상 리얼리즘 계열의 소설로,
“에스컬레이터 향유자”인 나가 인간을 판매하는 백화점에 들러
상품들을 구경하는 이야기다.
3, 줄거리 2
모두
8단락장으로 되어 있다.
1, 도입부 - 낙서이야기 - 에스컬레이터 낙서
2, 직원과 주인공의 대화
3, 6호점 안내 - 자기계발서 읽어주는 남자
4, 9층 - 전직 오디션 심사위원 K씨
5, 화장실 - 중년의 남자(애완문화 1세대)
6, 소파아 앉아 있는, 쇼핑 3년째인 노인
7, 10층- 힐링해주는 여자
8, 지하창고로 스스로 상품이 되어 들어간다.
이렇게
줄거리를 놓고 보면
한 남자가, 상품이 되어 있는 인간들을 보고
자신도 상품이 되려고 창고로
들어간다는 내용으로
요약된다.
마지막 반전이
다소 수긍하기 어렵고
너무 어둡지만,
아마도
무엇이든 상품으로 만드는
첨단 소비 자본주의의 시스템을 희화화한 소설 같다.
그런 점에서 구성이나 주제나
나쁘지 않다.
특히
곳곳에서 튀는
파란 문장의 감각적 대사나 지문은
읽는 재미를 준다.
4, 단락장과 단락과 문장 표현
그런데
제목에서부터 그렇듯
독자는 다소 어리둥절한 상태로
소설을 읽어나가게 된다.
그 이유는
독자를 충분히 공감시키지 못한 채
이야기가 그대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첫단락장을 보자.
#1
P시의 심장부에는 이런 낙서가 흐른다.
질주하다 괴물쇼!
S시의 변두리에는 또 이런 낙서.
나의 흐르는 강은 현기증.
누군가 매직으로 휘갈긴 그 낙서는 사람들의 발길 속에서 수련처럼 고요히 피어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낙서는 Y시에서 보았다. 어느 대기업의 고층빌딩 마지막 층이었다.
농담이 아냐. 2천이라는 빚이 어느새 2억으로. 별수 있나. 오늘도 넥타이를 매고 30년간 출근한 건물로 나를 밀어 넣지. 삶이 권태롭냐고? 그럴 리가 있나. 다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 계단이 멈추지 않기를.(?)
글자는 에스컬레이터 벽면을 따라 잠자리 날갯짓처럼 섬세하게(?) 쓰여 있었다. 끝까지 읽어내려면 적잖은 집중력이 필요했다. 허리를 굽혀 상체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모든 정신을 집중한 뒤에야 겨우 마침표를 만날 수 있었다.
이따금 슬픈 농담을 떠올리고 싶은 저녁이면, 나는 어느 중년의 셀러리맨을 상상한다.
그는 이 계단이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그는 이 계단이 영원히 이어져 있기를 바란다.
그는 이 계단 밖으로 추방당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는 양복 주머니에서 펜을 꺼낸다. 잉크가 거의 남지 않은 펜이다.
그는 펜을 꾹꾹 눌러 문장을 만든다. 세상에 사직서를 던지는 심정이다. 다 썼을 때 그는 에스컬레이터 끝에 다다른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니 조금 전에 쓴 문장이 너무도 궁금하다. 그러나 그는 다시 내려가지 않는다. 삼십 년이나 지겹도록 타온 계단이었다. 더 이상은 못 해먹겠어. 그는 옥상으로 통하는 문을 연다.
그리고 다음 날.
그의 낙서는 세 명의 자식을 먹여 살리는 늙은 청소부의 손에 흔적도 없이 지워진다. 청소부는 수세미를 박박 문지르며 신경질스럽게 투덜거린다. 누가 여기에 이따위 낙서를. 못 해먹겠군!
그런 식이다.
한 시간에 육천에서 구천 명을 실어나르는 이 거대한 기계는 규정에 의하면 분당 삼십 미터로 속도가 제한되어 있다.
백화점의 특별 할인 행사를 향해 돌진하는 무리에게는 턱없이 느린 속도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유서를 적을 만큼 충분한 시간을 보장하기도 한다.
그래. 그런 것이다.
속도감은 있다.
하지만 독자가 공감하기 전에 문장이 바뀌어 버린다.
P시의 낙서, S시의 낙서에 대해 별다른 공감 없이 Y시의 낙서를 맞아야 하는데,
Y시 낙서 중에 다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 계단이 멈추지 않기를.
그는 이 계단이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같은 부분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미처 공감을 충분히 못하는 상태로
그의 낙서와 청소부 얘기로
넘어가야 한다.
여기에 노랑형관펜 부분 같은
아쉬운 문장까지 나오면서,
속도감도 있고 파란 문장도 있지만,
아무래도 아쉬운/어설픈
첫 단락장이
된다.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두 번째 단락장을 보자.
“직원”이 나타난 다음
“수리복을 입은 두 남자”가 온다.
그런데 다시 “직원”으로 되어 있다. 그 다음엔 다시 “두 기사”로 표기되었다.
그런가 하면
주인공 자신이 소개되는데,
그는 타인과 대화한지 2년이나 되었다.
그리고 비단뱀을 키워본 적이 있다. 그리고 마틴 루터 킹을 연상하기를 즐긴다.
그런데 이러한 정보들 2년, 비단뱀, 마틴 루터 킹 등의 정보들이
그냥 제시되고 아무것도 더는 설명되지 않는다. 더불어
비단뱀이 쥐를 졸라 죽였다는 대목에서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싶다.
아무튼
대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갑자기 두 기사가 동시에 하품을 한다. 코를 후빈다.
이런 설정은 몰입을 방해하면서 정말
웃어야 하나 울어여 하나
싶다.
두 기사가 동시에 하품을 했다(??). 각각 에스컬레이터 양쪽 벽에 기대어 입이 찢어져라 벌렸다. 데칼코마니처럼 멋진 앙상블이었다.(??)
직원은 몸을 돌려 등 뒤의 기사를 바라봤다. 그들은 하품을 멈추고 서로를 향해 코딱지를 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침묵.(??)
그런가 하면
다음과 같은 표현은
또한 아무래도 거슬린다.
직원의 웃음소리가 불쾌한 G플랫 음처럼 뻗어나와 8층의 소음을 덮었다. 교향곡의 1악장이 끝난 뒤 박수가 터져 나오기 직전의 고요처럼(표현이 과하다) 주변에 정적이 흘렀다.
직원은 옛 친구에게 진심 어린 조언이라도 던지듯 (+?+) 자신의 역할에 깊이 몰입했다.
그럼에도
일정 부분 속도감 있고,
재미있는 표현도 없지 않다.
이번엔
세 번째 단락을 보자.
다음과 같은 어색한 표현이 나타나는가 하면
상품들은, 그러니까 애완 인간들은 한마디로 백화점과 상품으로서의 일체감이 존재했다.(?) 세탁기, 에어컨, 냉장고, 침대, 소파, 나무젓가락,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적응해야 했던 쪽은 나였다.
“이리로 오시지요.”
직원이 구석에 있는 30대 중반의 남자에게로 나를 이끌었다.
“아마도 이 상품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대화도 없이??)
상품은 나를 보며 소리쳤다. 나는 머릿속에 백 개의 전구가 켜진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또
남자의 미치라는 말은
다소 느닷없다. 그런가 하면
그에 대한 지문 몇 곳은 위트가 느껴지기도 한다.
“30대! 이제 다시 공부에 미쳐라!”
상품은 나를 보며 소리쳤다. 나는 머릿속에 백 개의 전구가 켜진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한민국 2030, 경력테크에 미쳐라!”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우리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비스에 미쳐라!”
이런 오류가 있나.
미치라고 권유하면서 실제로 미친놈을 데려다 놓다니.
“좋아하는 일에 미쳐라!”
어느 순간 그를 따라 힘껏 두 주먹을 움켜쥔 나를 발견했다.
“‘반 고흐’처럼 너도 미쳐라!”
이런.
정말 미쳐야 하는 걸까.
“도살장의 개처럼 미쳐라!”
도살장의 개도 미쳐있었다.
“동물원의 하마처럼 미쳐라!”
심지어 하마도 미쳐있었다.
“미쳐야 통한다!”
계속 미치라는 명령을 듣고 있으니 정말 미칠 것 같았다.
“하루에 십분, 명상에 미쳐라!”
그건 내가 정상이라는 증거였다.
“재테크에 미쳐라!”
하지만, 어쩌면 이 상품이야말로 정상인지 모른다.
“미쳐라!”
이모양 이꼴로 사는 이유는 모든 게 다 내가 정상이기 때문이 아닐까.
이렇듯
첫째 둘째 셋째 단락장만 살펴봐도
재미있는 표현, 위트가 느껴지는 지문이나 대사
그리고 속도감, 그리고 황당하지만 궁금한 상상력 전개가 이어진다. 하지만,
동시에 애매한 표현, 개연성이 다소 부족한 부분들도
뒤섞여 있다.
5, 단락
무엇보다
각 인물에 대해
혹은 상황에 대해 설정에 대해
나름 단락만들기가 이루어져서, 구체적인 공감을 이끌어내야 하는데,
이 부분이 다소 아쉽다. 각 단락 분량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다만 몇 문장으로 처리하고
다음 단락으로 넘어간다.
일테면
이제 5단락장에서
주인공 자신의 이야기가 나온다.
“현기증이 나.”
나는 중얼거렸다.
폐점이 가까워지자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는 사람보다 내려가는 사람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9층 난간에 기대어 바글거리는 사람들의 이동을 보고 있으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❶불안한 마음이 드는 날이면 나는 이제껏 가보지 않은 도시의 에스컬레이터를 찾곤 했다. 누구나 저마다의 안식처가 있겠지만 나는 이곳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꼈다.
❷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움직이는 검은 계단에 몸을 싣고 있으면 마틴 루터 킹과 함께 있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가슴을 뛰게 만드는 풍경도 모두 이 계단 위에서 보았다. 도시 곳곳에 숨은 낙서들. 그것을 하나씩 찾아내는 재미. 단순한 고장이지만 사실은 그 속에 숨은 이유들. 기계는 괜히 멈추지 않는다. 하다못해 꼬마가 흘린 레고 한조각이 기계를 멈추게 하고 혼란을 일으킨다.(?)
❸한때 이곳에는 은하수의 별처럼 지상의 양식이 흩뿌려져 있었다.(?)
❹집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언제나 마음의 휴식처가 되어주었던 검은 계단을 나는 아무런 감정 없이 바라보고 있다.
❶❷❸❹
각 단락이 모두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 채 넘어가고 있다.
산문에서 하나의 단락은, 가장 기초적인 의미군이다.
의미군으로서의 단락이 여럿 모여서 하나의 단락장을 이루는데,
단락이 취약하니까 독자 공감이 충분하지 못한 채로 넘어가고 단락장이 취약하게 만들어지는 형국이다.
6단락장의
노인 부분도 마찬가지다.
노인의 상징이 선명하지가 않은 채
그냥 넘어가 버린다.
“그 반대입니다. 그가 쇼핑하기를 벌써 3년째입니다. 아침 일찍 이곳으로 와서 저 소파에 앉습니다. 그리고 고민을 하는 거죠. 무엇을 살까.”
나는 점점 작아지는 노인의 검은 중절모를 바라봤다. 백화점과 하루를 시작하고 마감하는 고단한 시간의 흔적이 중절모에 씌어 있는 것 같았다.
선택받기를 원하는 입장과 더불어 선택하는 쪽도 난처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노인은 그런 삶의 반복이 익숙해 보였다. 이 백화점이 노인에겐 집이나 다름없을지도 몰랐다. 백화점이 노인을 길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이 백화점의 충실한 애완동물처럼 어제도 그 자리에 있었고, 내일도 그 자리에 있을 거였다.
그런데 그게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마틴 루터 킹이라면 입을 뻥긋거리며 열심히 뭐라고 연설했을 것이다.
나는 마틴 루터 킹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그게 진실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의미를 모르기에 뭐가 진실인지 알 순 없을 테지만, 적어도 진실이 저기에 있다는 건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7단락장에서
가장 의아한 부분은
주인공이 갑자기 사양하겠다는 말을 할 때이다.
이 말을 하게 되는 이유를 독자는 충분히 공감하지 못한 채로 읽고 넘어가야 한다.
이렇다 보니
마지막 8단락장에서의
반전 부분도 충분히 공감하기는 어렵다
나는 점퍼를 벗고 남방의 단추를 풀렀다. 백화점 내부가 갑자기 덥게 느껴져서 숨이 막히는 듯했다. 폐점을 알리는 음악이 그쳤다. 천정에 달린 온도조절기에서 뜨거운 바람이 아래로 밀려 내려왔다. 거대한 짐승의 뱃속이 이런 느낌일까. 적당한 열기와 안락함은 나를 단잠으로 이끌었다. 쉬고 싶었다. 내 머릿속은 줄곧 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사람이 거의 빠져나간 에스컬레이터는 더 이상 위험하지 않았다. 나를 밀치는 이도, 내가 누군가의 앞을 가로막는 일도 없었다.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었다. 늘 그랬듯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이제껏 그래 왔던 것처럼 들어왔던 길로 조용히 사라지고 싶었다. 그러나 발길은 1층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지하에 도착했다. 나는 불빛 한점 없는 어두운 통로를 걸어들어갔다. 모퉁이를 돌 때 한번 뒤돌아보았지만 방향을 바꾸고 싶진 않았다.
왜 그 생각은 하지 못했을까. 어째서 스스로 애완이 될 생각은 하지 못한 거지? 썩 나쁜 선택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어리둥절한 자신의 영혼에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작은 위안을 주는 일에 가까웠다. 나는 반항하지 않았다.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나는 어떤 힘에 이끌려 순종적인 개처럼 끌려가는 자신을 내버려두었다. 길이 끊긴 곳에서 가느다란 빛줄기가 새어나왔다. 그 빛은 현재 내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온기의 전부였고, 새로운 세상이 부르는 환영의 목소리였다.(?)
6, 아쉬움
어느 정도
단편의 꼴은 갖춘 소설이다.
일정한 속도감, 황당하지만 재미있는 상상,
완결성 있는 서사 구조, 부분 부분 감각적인 표현들......
그러나 불안하게 전개되는 소설이기도 하다.
대충 넘어가는 빈약한 단락, 엉거주춤한 인물 성격, 미숙하거나 애매모호한 표현,
개연성이 부족한 상황 등
얼마간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나타나는 이러한 한계는,
보다 선명한 주제=화두=문제의식의 부족에서
오는 게 아닐까
싶다.
특히
마지막 반전 부분에서
주제=문제의식이 불분명한 채로
주인공도 상품 되기를 선택한다. 인간의 상품화가
분명 위 소설의 주제인데, 그렇다면 주인공은, 그러한 상품화에 일정 부분 공감하면서
일정 부분 경계하는 보다 리얼리티한 고민을
해야 하지 않았을까?
가령
마음에 드는데
주머니 사정 때문에 세일기간을 기약한다든가,
혹은 가격이 맞아서 구입하고 싶은데, 알고 보니 상품에 결정적 하자가 있다든가,
어떻게든 싸게 구입하려고 하자를 찾아낸다든가, 돈 없어 보이지 않으려고
애쓴다든가.... 하는 “리얼리티”가
구축되어야 했다.
또 가령, 계발하기 위한 상품인지, 돈을 벌려는 계발인지
힐링하는 상품인지, 돈 벌려는 힐링인지 수상쩍은
오늘날의 목사 심리상담가 자기계발서
등등을 연상시키게 만드는
장면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노인은 평생
구매 중독자로 살아온 사람으로 상징화하든가
주인공 역시 자신의 무엇을 상품화해야 하나 걱정해본다든가 하는
설정들을 했더라면....
아무튼
각 단락장마다
갈등이 선명하게 존재해야 했다.
그 갈등은, 우리가 뭔가를 구매할 때면 생기는 바로 그것,
그러니까 나--상품. 나--직원. 나--와 내 마음 속의 또 다른 나
사이의 갈등으로 구축되어야 했다. 그래서 나의 정체와 갈등이 살아나고
직원도 살아나고 상품 자체도
살아나야 하지
않았을까.
결코
어떤 장르의 소설도
문장>문장 표현>단락 만들기> 단락장 만들기의
노력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환상 소설일수록
리얼리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