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글씨를 존나 못 씀에도, 심지어 펜을 쥐고 글씨를 쓰기 시작하면 삼십 년 이상을 쪼물딱거려온 손가락인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컨트롤을 못할 수가 있나 답답해서 속에서 천불이 날 때가 대부분이지만(아니, 거의 항상 그렇지만), 그래도 난 핸드폰 메모장보다 이렇게 종이 위에다 눌러 쓰는 게 좋다. 아마도 내가 물건에 대해서만큼은 수구에 가까울 만큼 보수적인 사람이어서 그런 것 같다. 예를 들자면, 아니, 이북 리더기를 샀으면 전보다 더 이북을 많이 사서 봐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예스24 도서 주문 목록을 보면 아직도 내가 산 책은 거진 다 종이책이다. 종이책의 무게와 재질감, 색깔과 소리, 촤르륵 거리며 앞뒤 책장을 빠르게 옮겨다닐 수 있는 것 등 설명할 수 있거나 없는 여러가지 이유로 종이책을 포기하지 못하겠다. 너무 오랫동안 밧데리가 닳은 채로 있는 내 이북 리더기가 저러다 방전이라도 될까봐 걱정이다. 메모도 마찬가지이다. 폰 메모가 빠르고 편리하긴 해도, 손으로 쓸 때만큼 '글을 짓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빠르고 편리한 만큼 애착이 생기지 않아서일까. 아주 어릴 적에 형성되고 굳어진 '글짓기는 역시 손글씨지'라는 고정관념이 너무 무적이라서 그런 걸까.
이경미의 '잘돼가, 무엇이든?'을 읽으면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부분은 이 사람이 늦은 나이에 입학한 한예종 시절을 이야기할 때였다. 과제로 단편영화를 매주 하나씩 만들어 내야 했다고 한다. 학교 지하 시멘트 바닥에서 끼니를 해결하며 진빠지게 영화를 만들면서도 '예술에 대한 열망은 없었다', '그땐 그냥 모든 게 성에 안 찼고 내가 사는 이유를 찾고 싶었다'고 말하는 부분이 있었다. 읽던 당시에는 '아니 영화에 대한 열망 없이 그저 사는 이유를 찾고 싶어서, 라는 이유로, 말하자면, 그냥 한번 찔러 보자는 심정으로 어떻게 한예종에 붙을 수가 있었던 거지? 그것도 이십 대 후반이라는 나이에??'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는 게 마음먹은대로 흘러가지 않은...정도가 아니라 마음과는 정반대로 흘러갔던 이십 대를 보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내맘대로 생각해 본다. 사는 게 이렇게까지 꼬여버리면 열망같은 건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가 되어 버리고, 그냥 매일 아침 일어나야 하는 이유만이라도 있으면 바랄 게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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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라는 프로를 최근 들어 보기 시작했다. 예전에 봤던 영드 '이어스 앤 이어스'에서 영국의 한 난민캠프 사람들이 모닥불을 둘러싸고
[여기는 카페 안] 아, 내가 좋아하는 노래 나온다. Home. 마이클 부블레도 좋지만 거친 목소리의 이 여자 가수도 좋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코코아 한 잔이 생각나는 따뜻한 음색이다. 그걸 마실 때처럼 몸이 이완되는 느낌이다.
난민캠프 사람들이 모닥불을 둘러싸고 모여 누군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장면이 생각났다. 어떤 이야기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사람들은 자기 자신도 잊을 만큼 그녀의 이야기에 몰입해 있었다. 그 모습이 난 좀 충격적이었다. 그건 그 드라마가 미래 사회를 소재로 한 SF드라마였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배경이 난민캠프였어도 근미래를 다루고 있는 SF드라마에서 가장 원초적 형태의 스토리텔링이 사람들을 사로잡는 모습은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크리스마스 분위기의 노래와, 드립커피를 시켰더니 바리스타가 내어 준 잔이 붉은색, 그것도 금빛 레터링 무늬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붉은색이다. 나는 이미 조금 두께가 있는 긴팔 티를 꺼내 입었다. 곧 있으면 니트를 꺼내 입어야 하는 계절인가 생각하니 너무 짜증난다. 아니 속이 탄다. 꽉 막힌 도로 위에 택시 뒷자리에 갇혀서 내리지도 못하고 돈 걱정에 마음은 초조한데, 할 수 있는 거라곤 미터기 속에서 달리는 말을 쳐다보고 있는 것밖에 없을 때의, 딱 그 기분 같다.
어떤 깨달음까지 안겨 주었다. 시간이 흘러도, 우리가 나이를 먹어도, 그래서 세상이 어떻게 된다 해도 원초적 이야기는 절대 죽지 않을 거란 걸 보여주는 것 같았다. 심지어 가까운 미래에 사람들은 오디오-영상 매체의 다음 타자로 입말로 된 이야기를 (다시) 찾게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게 불과 몇 개월 전이었다. 오 마이 갓. 근데 '꼬꼬무'라고 줄여 부르기도 하는 이 프로그램이 딱 그 모닥불가를 연상시키는 프로그램인 것이다. '가까운 미래'가 이렇게 금방 올 줄은 몰랐다.
이야기 소재는 주로 우리나라 현대사에 있었던 굵직한 사건들이었고 세 명의 이야기꾼들이 (카메라가 아닌) 각자 자기 앞에 앉은 친구를 보며 준비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의 구성이었다. '이어스 앤 이어스'를 떠올리면서 보고 있으면 텔레비전 앞의 나는 꼭 모닥불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 소리를 듣고 하나둘씩 모여든 사람들 중에 하나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보면 볼수록 감탄하게 된다. 하나의 사건이 그 꾼들의 각색을 거치면서 한 편의 시나리오같은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 나는 사실 2분짜리 유투브 영상 하나도 끝까지 보는 일이 잘 없을 정도로 싫증을 잘 내기도 하고 집중력이 짧다. 그런 내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빠져들었다. 몇 분 동안이나 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게서 어나더 레벨의 몰입도를 끌어낸 것이 다른 것도 아니고, 그저 이야기하는 사람과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었다니. 그냥 그것 뿐이었다니.
나는 정말이지 재주있는 이야기꾼이고 싶다. 듣고 나면 별거 아닌데, 들을 때엔 뒷 얘기가 궁금해서 안달이 나게 되는 그런 이야기꾼이 된다는 건 상상만 해도 입가가 당겨질 만큼 설렌다. '꿈에 배가 나왔다'는 단순한 이야기도 나를 거치면 '얘들아, 선생님이 어젯밤에 꿈을 꿨는데, 거긴 칠흑같이 캄카함-한 밤 바다였어. 그런데 가만 보니까 저어- 멀리에 배 한 척이 보이는 거야...'로 시작하는 장르물이 되어 버리는 그런 꾼.
나는 그 프로그램에서 장항준이 들려준 이야기를 그가 들려주던 방식을 고대로 베껴서 엄마에게 들려주었다. 이야기에 사로잡혀 굳어버린 얼굴과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는 건 또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첫댓글 세상이 어떻게 된다고 해서 이야기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 본성에 표현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원초적 욕망이 있기 때문 아닐까. 나는 모두가 예술가라고, 그니까 예술이 일상과 분리된 채 일부만 향유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고상한 무엇이 아닌, 일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이 예술가라고 믿고 싶은 쪽인데, 아니 정말 모두가 예술가란 걸 잊은 것 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는 사라질 수가 없을 것 같아. 이야기도 예술이니까. 이야기꾼.. 언니가 소설을 써보는 건 어떄????? 소설가가 이야기꾼이잖아. 김초엽이 그러더라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자기가 쓴 소설보고 잘 썼다는 말을 해주지를 않아서 소설 쓰는 방법과 관련된 책을 다 사서 읽었대. 책들을 읽고 알게 된 사실은, 아, 소설을 쓰는데도 일정한 형식이 있구나, 지켜야할 규칙 같은 것이 있구나. 2) 내가 대단한 소설을 못 쓴다면 그 규칙을 따라서 그래도 '괜찮은' 소설은 쓸 수 있겠다. 였대. 너무 인상적이였어. 나도 그래서 그 책들을 찾아서 읽어보려고. 소설 쓰는 방법. 대단한 걸 못 써도, 괜찮은 건 쓸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스티븐 킹도 한 말이거든. 위대한 작가? 이 책을 읽는 너는 아냐,
근데, 니가 아주 열심히 존나 노력해서 읽고 쓰면 괜찮은 작가는 될 수 있어. 라고
우와.
근데 영학이한테서 뭘 칭찬받고 싶어 하는 거야?ㅋ
@윤주 어디에서 '우와' 였던 거야?
영학이한테 칭찬? 요리했을 때, 운동 같이 했는데 내가 뭔가 쫌 잘한 것 같을 때, 청소했을 때, 빨래 했을 때, 화장실을 빛나게 만들었을 때, 달리기 10k 뛰었을 때.... 모든 순간에 칭찬이 필요하다는 말이야.ㅋㅋㅋㅋㅋ 김영학 피곤하겠지? 근데 걔가 진짜 바보같은 건 칭찬만 잘 던져주면 난 아주 부드러워지는데, 그걸 못해서 나랑 맨날 싸우는 것 같아. 오 더있다. 예쁘다는 칭찬도 필요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