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 게송으로 푸는 불교 (36)
중생심衆生心, 환화幻化
법혜 보살의 게송
중생의 모든 경계 제각기 달라
이러한 모든 세간 한량없거든
그 자체와 성품을 모두 알고자
보살이 이를 위해 처음으로 발심하였네.
< 중생심衆生心, 환화幻化>
춘성春城스님(1891-1977)은 만해萬海스님의 유일한 상좌(제자) 이셨습니다. 스님은 언행에
승속僧俗을 초탈한 모습을 보여주셨는데, 걸죽한 입담은 수많은 일화를 남겨 놓으셨습니다.
스님은 화엄경을 거꾸로 외울 정도로 경학經學에 밝으셨고, 유언을 ‘다비한 재와 사리를 서해바다에
버려라’고 하실 정도로 걸림없는 삶을 실천하신 분이기도 하셨습니다.
스님 곁에서 수 십년을 공부한 보살님이 계셨는데 늙어 손녀딸이 17~8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정도 나이면 스님의 ‘말 귀’를 이해할 것 같아 노보살님은 손녀딸에게 ‘너 춘성스님께 가서 법문 좀 청해 듣고 오너라 ’고
하였습니다.
손녀딸은 춘성스님께 정중히 삼배를 올리고 ‘할머님이
스님 법문을 듣고 오라 하셨습니다’ 하며 다소곳이 앉아 법문을 기다렸습니다.
노보살의 의도를 잘 알고 있는 스님은 그 말이 끝나자 바로 ‘내 물건이 너무 커서 작은 네 것에
들어갈지 모르겠다’고 하셨습니다.
손녀딸은 그 말씀에 질겁을 하여
얼굴은 홍당무가 되어 할머니에게 달려와 울며 스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노보살님은 ‘이 년아, 내가 염려했던 대로구나, 네 소갈머리가 그렇게 작으니 스님의 큰
말씀이 어디 들어가겠느냐’하며 스님이 역시 안목이 높으시다며 한탄을 하셨다 합니다. 이렇듯 ‘말 귀’를 알아 듣는 것은
중요합니다.
게송에 ‘중생의 모든 경계 제각기 달라’가 바로
이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저는 경계境界란 말을 즐겨씁니다.
세속에서는 어떤 지역이나 영역을 구분하는 의미로 쓰지만 불교에서는 과보에 의하여 각자에게 주어진
지위나 처지 혹은 수행에서 얻어지는 마음의 단계나 그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말 그대로 중생의 경계는 그 차별이 한량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알아듣는 ‘말
귀’의 수준도 모두 그 경계가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중생심은 그 경계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그 각각의 다름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명백한 착각이나 오류라 하더라도 본인은 그 당시에는 전혀 그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각경圓覺經의 환화幻化의 비유가 적절한데, 우리
눈에 티가 들어가 공중에 헛것[환화幻化]이 보여도 중생심은 그것을 실제 존재하는 것으로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아주 중요합니다.
원각경 보현보살장普賢菩薩章의 대목을 옮기면,
「그때 보현보살普賢菩薩이 대중 가운데 있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발에 정례하며 오른 쪽으로 세
번 돌고 두 무릎을 꿇고 합장하고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대비하신 세존이시여, 원하옵니다. 이 모임의 여러 보살들을 위하시며, 또 말세의 모든 중생들로서
대승을 닦는 이들을 위하소서. 이 원각의 청정한 경계를 듣고 어떻게 수행하여야 합니까.
세존이시여, 만일 저 중생이 환幻과 같은 줄 아는 자이면 몸과 마음도 또한 환이거늘 어떻게 환으로서
환을 닦습니까. 만일 모든 환성幻性이 일체가 다 멸했다면 곧 마음이 없으니 누가 수행함이 되며, 어찌하여 또 수행함이 환과 같다고 하겠습니까.
만일 중생들이 본래 수행하지 않는다면 생사 가운데 항상 환화幻化에 머물러 있어 일찍이 환같은 경계를 요지了知하지 못하리니, 망상심으로 하여금
어떻게 해탈케 하겠습니까.
원하오니, 말세의 일체 중생들을
위하소서. 무슨 방편을 지어서 점차 닦아 익혀야 중생들로 하여금 온갖 환을 영원히 여의게 하겠습니까."」
여기에 대해 부처님은 구체적인 답변을 하십니다.
하지만 그 어려운 답변보다 이번 게송의 ‘그 자체와 성품을 모두 알고자’라는 보살들의 발심發心의
연유를 밝힌 이 한 줄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환화에 대한 개념이
잘 인식되지 않으신다면 저의 경험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도
원각경을 볼 때 이 개념이 확연히 공감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저녁 화장실에 쭈구리고 앉아서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화장실 한쪽 벽면에 엄청 큰 벌레 그림자가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반사적으로 ‘아이쿠, 저것에 물리면 큰일 나겠구나’하고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놀라서 나오려고
하던 ‘그것’은 쏙 들어간 것은 물론입니다.
한데 그 엄청 큰 그림자는
백열전구에 달라붙은 조그만 날벌레 였습니다.
저는 어이가 없다는
생각보다는 환화를 체득했다는 기쁨에 그대로 앉은채로 아랫도리에 힘은 주지 않고 실컷 웃다가 나왔습니다.
여러분들은 ‘우물안 개구리’라는 말을 우습게 여기지 말고 정말 겸손해 지도록 노력하고 자신의 신념의
경계가 어디까지인가를 늘상 고민해야합니다.
제가 즐겨드는 예를 하나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친구를 만나서 저녁을 먹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식성이 다르니 어디서 무엇을 먹을지 갑론을박하며 겨우
결정을 했습니다. 이제 그곳에 가서 식사를 즐기는 일만 남았습니다.
일어서려는데 한 친구가 늦어서 미안하다며 하는 말 ‘그 집 문 닫었어’
해버립니다.
이 한마디로 앞의 모든 자기 주장들은 전혀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사는 이와 같습니다.
아니 불교의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속된 말로 ‘임자를 못 만나’ 자기 잘났다고 설치는 것입니다.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지는 몰라도 인물 잘 낫나 못 낫나는 단체사진 찍어보아야 안다고 하는 말도 뼈있는
말입니다.
다시 게송으로 돌아오면 이러한 모든 다른 경계와 성품을
아는 것이 보살의 발심의 연유라 했으니 이것은 보살의 수행의 목표이기도 하고 중생심을 알아야 중생을 구제할 수 있다고 역으로 풀이할 수도
있겠습니다.
춘성스님에 대한 말이 나온 김에 놓치기 아까운 일화를
덤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어느 날 춘성스님이 열차여행을 하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기독교 전도자들이 열차객실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 이란 피켓을 들고 큰소리로 외치며 지나가다가 마침 삭발염의한 춘성 스님이
앉아 있으니 그 부근을 왔다 갔다 하며 더욱 큰소리로 외쳐댔다.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혔다 3일 만에 부활했나니…”
이때 춘성 스님이 좌석에서 벌떡 일어나서 말했다.
“뭐! 누가 죽었다 살아났다고? 이놈들아, 내 평생에 죽었다 살아난 것은 내 좆 밖에 못 봤다!”
이 일갈에 승객들은 폭소를 터트리며 깔깔대고 웃어대니 그 전도자들은
혼비백산 사라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