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 게송으로 푸는 불교 (37) 과학불교
법혜보살의 게송
어떤 세계엔 잦혀 있고 혹은 엎쳤고
크고 작고 묘하여 한량 없거늘
보살이 가장 좋은 마음을 내고
곳곳마다 나아가 걸림이 없네
<과학불교>
말씀드렸는지 모르지만 저는 7~8년 전쯤에 화엄경만을 꼬박 3년 독경한 경험이 있습니다.
특별한 동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간의 제 수행법은 독경讀經과 사경寫經 이었습니다.
원래 병약한 약골인지라 참선이나 장기간의 기도등은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 병약함은 지금도 마찬가지이기는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생각한 수행 방법이 독경과 사경인데, 이 방법은 건강이 허락하는데로 틈틈이 또 법당이 아닌 방이나 책상에서도 할 수 있는 수행법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20년을 하다 보니 남은 경전이라고는 화엄경 밖에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마침 그때 오른쪽 눈을 백내장 수술을 하였는데, 늙어 눈이 나빠지면 염불이나 참선은 할 수 있어도 경전은 볼 수 없다는 걱정이 더 신심을 내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화엄경을 손에 잡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화엄경이라는 이름에 압도당하여 기도로써 독경만 할 뿐이지 그 뜻을 이해하려는 마음은 꿈도 꾸지 못 했습니다.
더군다나 다른 경전을 해왔듯이 목탁을 치며 독경한다면 아무리 빨리 한다 하더라도 진도가 나가지질 않고 더욱 손목이 아파 한번도 완독完讀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내려졌습니다.
당장 목탁을 버리고 법당에서 소리내어 아주 빠르게 읽기를 하였습니다.
조석 예불시간에도 ‘계향 , 정향…..’ 예불문은 커녕 신중단에 반야심경 독송도 생략해 버렸습니다.
저의 생각은 내가 부처님의 깨달음 그 자체인 화엄경을 독경하는데, 예불문과 반야심경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당돌함에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 완독을 해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세번째 그것도 거의 마지막 부분인 이세간품離世間品에 이르자 갑자기 ‘아깝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이 아까웠는가 하면 화엄경 자체가 불교 백과사전이란 생각이 들어서인데 불교의 거의 모든 교리와 사상, 용어들이 이처럼 구체적이고 반복적으로 친절하게 설명된 경전이 없다는는 사실이었고, 그래서 곧 바로 노트에 아주 구체적으로 몇 페이지, 몇 품에 어떤 내용이 설해져 있다고 메모를 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제 노트에는 손으로 직접 써둔 ‘보배’들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 작업은 몇 달이나 해야했습니다. 그 후의 나머지 1년 여는 말 그대로 독경 삼매에 빠져 아니 화엄경 그 자체에 빠져 숱한 환희심과 다시 태어남을 거듭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 경험으로 말씀 드리건데 화엄학은 어렵지만 화엄경은 쉽습니다. 여러분들도 한번쯤은 화엄경에 도전해 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난데없이 제 경험을 이야기를 한 것은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그 이유란 것은 그처럼 독경을 하면서도 끝까지 이해하기 쉽지 않았던 부분이 바로 화엄경 곳곳에 등장하는 이번 게송 같은 표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화엄경이나 다른 경전등의 ‘신기한’ 표현들은, 예를들어 법화경의 땅에서 보탑이 솟아 오른다든가 하는 부분은 비유나 은유, 아니면 깊은 상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데 지금 거론하는 표현들은 마치 ‘본 듯’ 말씀하시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앞서 소제목 <세계의 형상>에서 우주망원경 허블의 사진까지 들이댔었지만 같은 세계성취품의 보현보살의 게송 중 하나를 새삼 소개하면,
한 티끌 속에 크고 작은 세계가
갖가지로 차별함이 티끌수와 같고
평탄하고 높고 낮음이 각각 다른데
부처님이 모두 가서 법륜을 굴리시네
이 게송이나 이번 게송이나 단순히 화엄사상 즉 법성게의 ‘一中一切 一切中一 一卽一切 一切卽一’을 말하고 법계연기法界緣起와 사종법계四種法界로 설명하기에는(물론 맞지만) 적어도 저에게는 만족스럽지가 않았습니다.
지구가 천체의 중심이고 그 모습은 평편해 바다 멀리 나가면 낭떠러지로 떨어진다고 생각한 것이 불과 1,500년 중세 때의 인간의 사고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화성에 ‘스피릿’과 ‘오퍼튜니티’가 돌아다니며 화성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는 물론 땅에서 점토질과 물 흔적, 염분까지 발견하여 과거에 생명체가 존재 했었다는 결정적 증거들을 속속 보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불교의 해석도 중세의 사고 수준을 계속 유지해야만 하는가 하는 것이 저의 문제 제기이고, 두 게송의 이해에도 새롭게 확인된 부정할 수 없는 과학적 실상實相(제상비상과 공이 곧 실상이라고 한 제 말씀을 상기하십시요)이 그 관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스트븐 호킹은 ‘호두껍질 속의 우주’(2001년, 까치 간)에서 제가 볼 때는 불교적 해석으로는 아주 그렇듯한 새로운 ‘초끈 이론’으로 우주를 설명하는데 빅뱅의 이론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다행히 불교계 신문인 ‘현대불교’에서 이와 관련된 교수의 해설기사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소개하면,
「‘브레인 이론’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아인슈타인이 제시한 4차원(시간, 상하, 전후, 좌우)이 아닌 11차원(10차원+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아인슈타인의 상대론과 양자역학을 결합하는 많은 이론적 모델 가운데 현재 가장 각광받고 있는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에 따른 것이다.
‘초끈이론’이란 자연계를 구성하는 기본입자들이 사실은 미세한 끈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론이다. ‘초끈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11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중 4차원만 우리 눈에 보이고 나머지 7차원은 아주 작게 접혀 있어(작게 접혀 있다는 표현에 주목하십시요, 게송의 그것과 흡사합니다) 관측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김용정 박사는 “초끈이론에서 말하는 ‘입자’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알갱이가 아닌 초속 30만Km 이상으로 달리는 것들’, 즉 우주선線이며, 이렇게 볼 때 초끈이론은 <화엄경>에서 말하는 ‘인드라망’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인드라망’이란 ‘제석천의 궁전을 장엄하는 그물망’을 뜻하는 말로 만물이 모두 상관관계를 갖고 연결돼 있다는 연기적 세계관을 의미한다.
또한 ‘입자’가 매우 짧은 순간적인 상호작용으로 ‘입자’의 성격을 띠는 것을 물적인 대상이 아니더라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연속적인 현상으로 보는 화엄의 사사무애事事無碍의 세계관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세계적 물리학자 프리초프 카프라의 이론으로 볼 때도 ‘초끈이론’은 천체물리학의 기본바탕이 불교사상에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호킹박사는 애초에 끈을 가지고 시작한 ‘초끈이론’을 연구하다 보면 2차원뿐만 아니라 더 큰 차원을 가진 다양한 물체들이 존재함을 증명할 수 있는데, 이러한 물체들을 통틀어 브레인이라 부르며, 브레인에 관한 연구가 초끈이론에서 얻어낼 수 있는 우주론의 가능성을 한층 넓힐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불교적으로 해석하자면 브레인 역시 사사무애事事無碍의 세계관에서 기능하는 ‘입자’로 볼 수 있다.
한편 호킹 박사는 방한 중 “우주는 영원히 팽창을 지속할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는 ‘사트바(존재)-카르만(업)’이 원인이 되어 우주가 생성되고 그 위에 생명체가 다시 산다는 고대 인도불교의 우주관으로 설명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우주가 성주괴공成住壞空, 즉 완성-유지-파괴-소멸의 과정을 반복한다고 보았는데, 이는 곧 우주의 존재근거가 생명체들이 작용하는 힘(사트바-카르만)에서 비롯됨을 의미한다. 이렇게 본다면 호킹 박사가 말한 ‘팽창’은 ‘사트바-카르만’의 작용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도 역시 사사무애事事無碍를 거론하고 있지만 저의 관심은 단순한 형이상학적 논리의 이해가 아닌 우주 실상세계의 모습 그 자체가 화엄경에 그림을 그려놓은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곧 화엄의 ‘사상’이 아니라 화엄의 ‘실재’를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화엄의 경우를 예로 들었지만 이제부터라도 불교의 모든 사상과 경전의 이해가 과학적이고 전문적인 각 분야의 연구 성과를 참고해야 된다는 것이 저의 미래불교를 위한 견해입니다.
< 호두껍질 속의 우주 중 '참고'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