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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조시 원문보기 글쓴이: 김덕남
시조의 보배로움을 알자.
임종찬(부산대 명예교수 . 시조시인)
Ⅰ
로마숫자는 간단하지 않았다. 10은 X, 12는 XII, 112는 CXII, 1112는 MCXII로 표기하였던 것이다. 로마숫자로 곱셈 나눗셈을 하자면 얼마나 불편하였겠는가. 그러나 현재 전 세계인들이 쓰고 있는 아라비아숫자는 이런 고통이 없으니 얼마나 편한가. 문자도 마찬가지다. 쓰기에 편하고 발음하기 편해야 한다.
영어는 세계 공용어처럼 사용되긴 하지만 영어는 쓰기에도 발음하기에도 불편한 언어다. 영어 알파벹은 페니키아 문자에서 유래하였다. 페니키아인들은 소리 나는 대로 적는 그들의 알파벹을 만들어 썼고, 이것이 그리스어 로마어 영어를 비롯한 유럽어 문자의 원천이 된 것은 다 아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외국어들은 단어의 발음상 문제가 많아 발음기호를 붙여놓아야 한다. 영어 모음 a는 10 가지, e는 13 가지, o도 13 가지, u는 9 가지로 발음 된다고 한다. 자음은 어떠한가. 몇 개 예를 들어 보자.
c=k, c=s, c=ʃ
g=g, g=ʒ, g=́dʒ
s=s, s=z, s=ʃ
여기다 영어 ch, sh, th, ph라든가 불어 ch, 독어 sch, tsch 등은 소리 하나를 표하기 위해 여러 개 자음을 동원하고 있다. 이렇게 자음이든 모음이든 여러 가지로 발음되므로 단어에 발음기호까지 붙여 적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글은 소리 나는 대로 적을 수 있으니 얼마나 편한가. 이래서 한글이 세계 제일이라는 것이다.
문명 문화국임을 자랑하는 나라들은 그 나라 말에 맞는 글을 만든 것은 물론이고, 그 말에 맞는 정형시를 만들어 세계에 자랑하여 왔다. 정형시는 그 나라 말의 사정(구조)과 정서에 알맞게 만들어진 시다. 어느 누구 한 사람 인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공동의 창작품이고 문화유산이다. 그래서 오랜 전통을 유지해 오고 있는 것이다.
옛날 중국을 주인으로 섬기려는 우매한 선비들은 시라고 하면 시의 형식은 중국 한시형태에 어긋남이 없어야 하고, 시의 문자는 한자여야 시라고 고집하였다. 그래서 우리가 만든 시조는 시(詩)라 할 수 없어서 시조(時調)라 이름 붙였다. 시조라는 말 안에는 중국 시에 비하면 그렇고 그런 한갓 노래에 불과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셈이다.
설총이 이두문자를 정리한 끝에 향찰문자로서 향가를 적을 수 있게 함은 한자로서 우리 정서를 나타내기에는 부족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신라 사람들은 표의문자인 한자를 차용해서 이걸 표음문자로 만들어 썼으니 이것만 하여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향찰문자는 일단 한자에 능한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었고 그것마저도 표현이 부자연스러웠다. 아예 한자 아닌 우리 문자로서 우리말을 표현해야 표현이 자유롭겠기에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의 창제를 서둘렀던 것이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반포하려 하자 최만리는 훈민정음 창제 반대 상소를 이렇게 하였다고 세종실록에 적혀 있다.
우리나라는 조종조 이래로 지성으로 사대(事大)하고, 한결같이 중화의 제도를 준수하여 지금 동문동궤(同文同軌)의 때를 당하는데 언문을 창작하신 것을 듣고 봄에 이상히 여길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 혹시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글자를 근본으로 삼은 것으로 새로운 자가 아니라고 하신다면 곧 자형(字形)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더라도 용음(用音)과 합자(合字)가 옛것과 반대되는 일이며, 실로 근거할 바가 없는 바입니다. 만약 중국에 흘러가서 혹시 옳지 못함을 의논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어찌 사대모화(事大慕華)에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최만리 식으로 말하면 한시(漢詩)가 시이므로 뭐 우리말로 흥얼거리는 시조 같은 것은 아랫것들이나 하는 노래라는 투로 시조를 깔보았을 것이다. 실지로 그는 시조 한 수를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많은 문사들은 우리말로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이것이 시조다. 이들은 시심을 시조로 읊어보니 중국 한시 읊는 것보다 수월하고 좋다는 의미에서 시조 4천 여수나 남기고 갔다.
한 편의 시조도 남기지 않고 한시만 잔뜩 남긴 문사들도 있긴 있다. 아마 이런 부류의 문사들은 중국을 주인으로 섬기는 확실한 사대주의자들이었을 것이다.
어느 나라 경우든 정형시는 오랜 기간을 거치면서 수정 보완을 하여 정제된 형식을 갖추었다. 여기에 적당한 예로서 중국 한시를 두고 설명할 수 있다. 중국 한시의 역사는 2,000년이 넘는다. 시경 시대를 지나 한(漢)에 와서 오언체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평측과 압운을 중시하는 풍조가 생겼고, 당대(唐代)에 와서야 근체시(近體詩)인 율시(律詩)와 절구(絶句)로 발전하여 한시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고체시(古體詩)에서도 오언고시(五言古詩)와 칠언고시(七言古詩)가 있었다. 시구 수의 제한을 받지 않았지만 운은 맞춰야 했다. 매 글자마다의 평측(平仄)도 따지지 않다가 근체시에 와서는 율시는 8구, 절구는 4구로, 이것도 오언율시와 칠언율시, 오언절구와 칠언절구로 구분하게 되고, 글자마다 평측 등 여러 가지 격식에 맞추어 짓도록 하였다. 시문의 의미형태도 근체시 율시의 경우는 첫째와 둘째 구를 수련(首聯), 셋째와 넷째 구를 함련(頷聯), 다섯째와 여섯째 구를 경련(頸聯), 일곱째 와 여덟째 구를 미련(尾聯) 또는 말련(末聯)이라 한다. 절구의 경우도 첫 구를 기(起), 둘째 구를 승(承), 셋째 구를 전(轉), 넷째 구를 결(結)이라 하고 시어의 의미가 이렇게 전개되도록 하고 있다.
영시의 경우 역시 이와 비슷한 역사를 통해 정형시로서의 영시가 만들어졌다. 중국어는 평측(平仄)으로서 의미 분화를 하기 때문에 평측을 리듬으로 하는 한시를 만든 것이라면 영어는 강약을 기반으로 하는 언어이므로 강약을 규칙화하여 정형시를 만들었다.
영시를 예로 들어보자.
My soul /is dark/--Oh! quick/ly string/
The harp/ I yet /can brook/ to hear;/
And let /the gen/tle fin/gers fling/
Its mel/ting mur/murs o'er/(=over의 줄임말) mine ear./
Byron, My Soul Is Dark (바이런, 애 영혼은 어둡다)
내 영혼의 어두워 --오! 아직도
들을 수 있는 동안 그 하프를 퉁겨다오.
너의 부드러운 손가락 날려
애절한 노래 들려주려므나.
이것은 약강 4음보의 시다. 우리말은 고저 장단 강약을 규칙화할 수 없는 언어이기 때문에 성조(聲調 pitch)로 시를 만들 수 없다. 그래서 우리식의 음수율을 개발하여 이것의 규칙화로 정형시인 시조를 만들었다.
Ⅱ
시조의 역사를 줄잡아 700여 년 된다고 불 수 있겠는데, 그 동안 시조의 창작원리에 대한 이론이 잘 개발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유는 시조가 노래의 가사로 이용되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지 시로서의 시조를 생각하여 시조형식을 다듬는 일은 할 필요가 없다 생각했던 것이었을지 모른다.
노래가사는 노래가 중심이고 시는 노래보다 사의(詩意)와 시흥(詩興)에 치중한다. 어쨌든 우리 선조들은 시조를 즐겨 불렀고, 이것을 노래책에 적어 오늘까지 전해주었으니 고마운 일이다. 시조를 노래 부르기에 그치지 않고 시의 형태로 잘 보존할 의사가 충분하였다고 한다면 시조 짓는 법을 정리하고 시조형식을 가다듬는 일을 서둘렀을 것이지만 한시를 시라고 우기는 병폐 때문에 시조 연구는 물론이고 시조를 다듬는 일이 소흘하게 된 것이다. 이러다 보니 시조 발생기로부터 근 600여년 뒤 일제 강점기에 와서야 시조를 정형시라 하고 이것의 형식을 다듬는 일을 서두르게 되었다.
이런 주장이 있자 새로운 최만리가 등장하여 시조는 부르주아 계층에서 부르주아 사상 고취를 위해 만든 것이니 폐기처분해야 하지 시조부흥운동은 말이 안 된다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다. 이 사람들(KAPF파)의 극성이 심하자, 여기에 대응하여 시조는 민족정서 함양에 유효하다는 논리가 본격화되었다.
한시나 영시(소네트 포함)는 부르주아 계급이 만든 것임에도 그들의 좌파들은 폐기처분 운운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 계급 사상이 그렇게 좋은 것이라면 시조 속에 그런 내용을 담으면 되는 것인데, 애매한 시조를 두고 왜 폐기처분 운운 그런 말들을 해야 했는지 참 이상한 일이라 생각 든다. 거기다 북한에서는 남쪽에서 출장 간 KAPF파들의 의견을 따라서 그러하였는지, 시조를 짓는 사람이 없다니 신통한 일이다.
시조형식을 선두에서 제창한 이는 조윤제 선생이다. 선생은 시조를 초장과 중장은 3, 4, 3(4), 4, 종장은 3, 5, 4, 3 이렇게 고정된 음절수로 이룩된 음수율의 시라고 정의하였다.
그 이유는 고시조 중 평시조는 각 장이 네 토막의 의미 분절이 됨을 알고 의미 분절의 빈도수를 따져보니 이 같은 표를 얻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시조 형식으로 인정하자는 것이었다. 이 이론에 따라 엄격히 이 시조 형식을 지킨 육당의 ‘백팔번뇌’ 노산의 ‘노산시조집’이 나왔고 그 뒤를 이어 이호우, 김상옥, 장하보 같은 대가가 정형의 형식에 따라 시조를 지었다.
고향생각
이은상
어제 온 고깃배가 고향으로 간다하기
소식을 전차하고 갯가으로 나갔더니
그 배는 멀리 떠나고 물만 출렁거리오.
고개를 수그리니 모래 씻는 물결이요
배 뜬 곳 바라보니 구름만 뭉게뭉게
때 묻은 소매를 보니 고향 더욱 그립소.
육당의 ‘백팔번뇌’나 노산의 ‘노산시조집’에는 조윤제 선생이 제창한 시조 형식을 엄격하게 지켰다. 앞에 예로 든 노산 작품에서 ‘소식을 전하자 하고’를 ‘소식을 전차하고’라 하여 3.4를 지키고 있음을 볼 수 있지 않는가. 이호우나 김상옥 같은 분 역시 초기의 작품들은 시조 형식을 엄격히 지키고 있다.
달밤
이호우
낙동강 빈 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
무엔지 그리운 밤 지향 없이 가고파서
흐르는 금빛 노을에 배를 맡겨 봅니다.
낯익은 풍경이되 달 아래 고쳐 보니
돌아올 기약 없는 먼 길이나 떠나온 듯,
뒤지는 들과 산들이 돌아 돌아 뵙니다.
아득히 그림 속에 정화된 초가집들,
할머니 조웅전에 잠들던 그날 밤도
할버진 율律 지으시고 달이 밝았더이다.
미움도 더러움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온 세상 쉬는 숨결 한 갈래로 맑습니다.
차라리 외로울망정 이 밤 더디 새소서.
봉선화
김상옥
비 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날 생각하시리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 주던
하얀 손 가락 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 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노나
가람의 ‘가람시조집’에 나타난 작품들은 어떤가. 다음 작품을 읽어보기로 한다.
별
이병기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한 어느 게오
잠자코 홀로서서 별을 헤어보노라.
확실히 가람은 조윤제 설을 따르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애초 노래 가사로 불리던 고시조의 들쭉날쭉한 그 형태로의 고수를 의미한다. 현대시조라고 쓰는 많은 사람들은 가람의 이 같은 태도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렵게 정리 안착된 정격 시조를 시조의 현대화 운운하는 사람들이 가세하여 시조 형식을 예전대로의 고시조 형태로 회귀시켜버렸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시조의 현대화 이 말 자체로 봐서는 나무랄 데가 없다. 표현이 주제가 소재가 비유가 모티프가 현대화되어야 한다면 언제나 이 말은 유용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람의 공적이 크다. 그러나 시조 시인들이 시조 형식을 현대화하자는 투로 정격 시조가 아닌 걸 시조라 발표하면 정형시로서의 시조가 아니게 된다.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중에는 대부분이 시조 형식을 깨뜨린 기형의 시조를 당선작으로 뽑는 경우가 흔하다. 이것만이 아니고, 시조잡지에도 예사로이 파격의 시조를 싣고 있다. 큰 상 작은 상의 수상작품 역시 그러하다. 파격의 시조도 정형시인가. 그렇다면 대체 정형시라 할 때 그 정형(定型)은 뭘 의미하는가. 들쭉날쭉한 걸 인정하자는 건가.
Ⅲ
일본의 하이쿠는 5 7 5 이라는 음절수를 엄격히 지키고 있다.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글자 수를 늘이자 혹은 줄이자는 의견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중국 한시가 세계의 시 형태로 나아가기엔 언어 자체의 한계 때문일 수 있다. 그런데 일본은 어떤가. 하이쿠란 옹졸하고 옹색한 시 형식을 세계시장에 내놓고 어찌 홍보되었든지 영국 미국의 어린이 교과서에 실리고 하이쿠가 영국 시 미국 시의 한 형태로까지 자리 잡아 많은 사람들이 하이쿠를 짓는다고 한다. 우리는 어떤가. 시조에 비하면 엉성한 시 형식을 갖고 일본은 세계문학 시장에 수출하여 국위를 선양하고 있다. 우리는 선조들이 애써 만든 시조를 발전시키려 하지 않고 오히려 형식을 파괴하여 후퇴시키는 일들을 하니 어찌 된 일인가. 시조의 형식을 고수하면 시답지 않다고 생각해서인가 아니면 우리 시조가 우리 언어구조에 부적합하니 새로 틀을 만들어보겠다는 것인가.
다시 말하지만 우리 선조들이 시조를 짓고 부른 데는 시조가 우리말의 구조와 맞고 우리 정서를 담기에 적당하였기 때문이다. 시조 형식을 가다듬는 데에도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노력 끝에 완성을 본 것이 시조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조 형식은 우리 문화 정신에 기반을 둔 자족적인 정형시라 해야 옳다.
최만리는 다시 훈민정음의 반포의 부당함을 이렇게 지적하였다.
예로부터 구주(九州)의 안에 풍토가 비록 다르나, 방언으로 말미암아 따로 문자를 만든 일은 없었습니다. 다만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의 무리들이 각각 문자를 가지고 있으나, 이는 모두 이적의 일일 뿐 족이 말할 것이 못됩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오랑캐를 중화(中華)로 변(變)케 한다고는 하였으되, 중화로 하여금 오랑캐로 변케 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역대(歷代)로 중국에서는 우리나라를 기자(箕子)의 유풍(遺風)이 있다고 하였고, 예악(禮樂)과 문물이 중화에 견줄만하다고 하였는데, 이제 따로 언문을 지어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夷狄)과 함께 하니 이야말로 소합(蘇合)의 향(香)을 버리고 당랑(螂)의 환(丸)을 취하는 것이라, 어찌 문명의 큰 누(累)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사대모화에 빠져 우리 것에 대한 소중함과 가치를 망각하였던 최만리 같은 무리들이 비판을 받듯이 선조들이 애써 만든 시조 형식을 무너뜨리는 행위 또한 비판 받아야 한다. 하이쿠처럼 세계인들에게 시조를 짓도록 노력하는 사람들 또한 적잖게 있는 것으로 알지만 정격시조로서 시조를 보급해야 옳은 일이다. 시조 번역 역시 정격으로 번역해야 정형시로서의 시조가 된다.
시조가 이렇게 어려움을 겪게 된 데에는 시조 이론가(시조학자와 시조비평가)들이 시조 진로에 대한 이론 전개를 활발히 하지 않은 책임이 무엇보다 크다. 우리의 정형시를 갈고 닦기 위해서는 이론적 바탕을 제공하고 어긋난 길을 걸을 땐 꾸짖어주어야 함에도 이런 이론가들이 적은 것 또한 안타까운 일이다.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시조에 대한 자각이 부족하여 정격에서 벗어난 시조를 시조라고 써왔다. 그러나 시조 공부를 더 하면서부터는 이래서는 정형시로서의 시조가 아니라는 점을 자각하면서부터는 형식을 엄격히 지키는 시조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당장 시조시인들이 시조 형식을 깨뜨리는 무작한 행동을 준열히 꾸짖을 이론가들이 나서야 할 때는 지금이다. 시조 잡지 편집자들 역시 파격시조를 책에 싣지 않는 운동을 해야 할 때는 지금이다. 다행히 정격 시조만을 고집하는 시조시인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가령, ‘청풍명월정격시조문학회’ ‘한국시조회’ 같은 시조단체는 이 같은 점을 철저히 고수하고 있다. 박수를 보낸다.
-《볍씨》 2026. 제48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