뽕나무
문자로 기록된 우리 역사에 가장 빨리 나타난 나무는 무엇일까?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뽕나무나 소나무다. <삼국사기>에 박혁거세 17년(기원전 41년)에 왕이 알영 왕비와 함께 6부를 돌아다니며 농사와 양잠을 장려했다는 기록이 있다. 양잠에 쓰인 뽕나무가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소나무도 만만찮다.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이 나라를 세우기 전 부여에서 피신해 나올 때 부인에게 “당신이 만약 아들을 낳거든 내가 남긴 물건이 일곱 모가 난 돌 위의 소나무 밑에 감춰져 있다고 말해주시오. 그가 만약 이것을 찾게 되면, 그제서야 곧 나의 아들일 것이오”라고 했다(<삼국사기>, 이강래 옮김)는 것을 보면 소나무가 먼저일 수도 있다. 동명성왕이 고구려 왕위에 오른 것은 박혁거세 21년(기원전 37년)이니 떠난 시점에 따라 소나무가 먼저 등장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양잠에서 뽕나무를 생각했듯이 이름에서 나무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나온 나무는 버드나무다. 동명성왕의 어머니가 유화(柳花)부인이기 때문이다. 유화부인은 물을 뜻하는 하백(河伯)의 딸이니 물가에서 잘 자라는 버드나무를 생각해보면 신화와 생태가 잘 어울린다. 이렇듯 우리 역사에 빨리 출현한 뽕나무, 소나무, 버드나무는 이후 조선시대까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역사에 자주 등장한다.
뽕나무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공하기에 조선시대에 왕이 직접 챙기는 나무가 되었다. 쓰임새도 다양했다. 문무왕 9년에 당나라 황제가 신라 활의 성능이 좋은 것을 알고 기술자 구진천을 당나라로 불러들여 활을 만들게 했으나 화살이 겨우 30보밖에 나가지 않았다. 구진천이 당나라의 야욕을 알아채고 제대로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 당 황제가 “너희 나라에서는 활을 쏘면 1000보를 간다는데 겨우 30보를 가니 어찌된 일이냐”고 다그치자 신라의 나무가 아니어서 성능이 발휘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신라에서 활을 만들 나무를 바치게 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나무가 뽕나무로 보인다. 우리의 전통 활을 만들 때 중요하게 쓰이는 나무가 뽕나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라에서 가져온 나무로 만든 활도 화살이 60보밖에 나가지 않았다. 다시 다그침에 구진천은 “그 까닭을 알 수 없으나 아마 나무가 바다를 건너오면서 습기가 찼던 것 같습니다”라고 둘러댔다. 당 황제가 중죄로 위협했으나 구진천은 끝내 그 재능을 다 발휘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과 나무는 이렇게 미묘하고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
버드나무
버드나무는 아비 없는 자식을 슬기롭게 키워낸 유화부인으로 출현한 뒤 여인들의 지혜의 상징이 됐다. 고려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의 만남에도 버들잎이 등장한다. 왕건이 태봉국의 장수 시절 견훤과 전쟁을 치르면서 목이 말라 우물로 갔다. 그때 우물가에 있던 나주 오씨 집안 오다련의 딸이 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운 물을 주었다. 목이 말라 급하게 물을 먹다 체할까 봐 천천히 마시라는 뜻이다. 이런 슬기로 왕건을 감동시키고 결국 장화왕후가 됐다는 이야기다.
비슷한 이야기가 조선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의 만남에도 등장한다. 무대가 서울 정릉이고 전쟁이 아니라 호랑이 사냥 중에 일어난 것만 다르다. 이 설화는 지금의 ‘정릉버들잎축제’를 낳았다. 왕건이 장화왕후를 만났다고 전해지는 완사천은 전남 기념물 제93호로 지정돼 있다.
<고려사>에는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의 이야기가 소개되는데 신화 같은 전설이다. 작제건이 중국으로 가던 중 서해 용왕의 어려움을 해결해줘 금, 은 등 7가지 보물을 받고 그 딸인 용녀와 결혼하게 됐다. 그런데 7가지 보물 이야기를 들은 용녀는 그보다 버드나무 지팡이와 돼지가 더 귀하니 그것을 얻어가자고 했다. 그 시절에는 버드나무 가지가 금은보화보다 더 좋은 것이었나 보다. 이 전설을 읽으면 불교 색채가 진하게 느껴지는데, 고려 불화에서도 버들가지는 중요한 소재다. 수월관음도, 양류관음도를 보면 관세음보살이 버들가지를 들고 있거나 병에 꽂아 두고 있다. 산들바람에도 일렁이는 버들가지처럼 미천한 중생의 작은 소원이라도 들어주는 관세음보살의 큰 자비를 상징하는 것이다.
열대지방의 맹그로브 나무가 물을 정화시키고 새우나 물고기를 키운다고 많이 알려져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버드나무가 그런 역할을 한다. 버드나무가 살고 있는 물에는 다양한 어류가 서식한다. 최근에 조사된 과학적 사실이기도 하지만 원래 물고기 이름에는 버들가지, 버들개, 동버들개, 버들매치, 버들붕어, 버들치 등 ‘버들’이 많이 들어간다. 또 예전에는 버드나무의 성장을 관찰해 무성하게 자라면 벼농사가 잘될 것으로 예측했다. 기상측정 장비가 별로 없었던 시절 버드나무가 물과 친하기에 역시 물을 쓰는 벼농사에 생물기후의 지표로 적절하게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 장군은 훈련원에서 말을 타고 달리다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자 버들가지를 벗겨 묶고 다시 말을 탔다고 한다. 또 생물학적으로 같은 종을 두고도 고리를 만들었다고 고리버들, 키를 만들었다고 키버들이라고 다양하게 부르기도 했다. 이렇게 일상생활에 쓰이던 온갖 물건을 버들가지로 많이 만들었던 것을 보면 잊어버린 우리의 역사에는 버들의 쓰임새가 훨씬 다양했을 것이다.
서민 군주를 자처한 영조는 청계천을 준설하면서 좌우에 돌축대를 쌓으려고 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고생이 너무 심해 계획을 변경, 나무 말뚝을 먼저 박고 그 뒤에 자른 나무들을 놓아 서로 얽은 뒤 흙을 채워 버드나무를 심어 서로 받쳐주도록 했다(‘영조의 청계천 준설’, 신병주). 태종이나 세종, 성종 등 다른 많은 왕들도 도랑을 파고 버드나무를 심어 홍수를 방지하게 했다. 조선의 왕들은 백성들의 생활과 안전을 버드나무를 심어 받쳐준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버드나무를 우리 민족의 어머니 나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산불이나 산사태가 난 곳의 골짜기에는 버드나무가 먼저 들어와 흙을 보듬어 안고 땅을 지켜주는 장면을 많이 볼 수 있다.
소나무
소나무는 동명성왕이 신표를 감춰놓았다가 그것을 찾아온 아들에게 왕좌를 물려준 이야기에서 보듯이 왕실이나 권력과 친근성이 있다.
<삼국사기>는 진평왕 당시 백제와의 전장에서 눌최란 장수가 “따뜻한 봄의 맑은 기운에는 초목이 모두 꽃을 피우고, 추운 겨울이 되어서는 유독 소나무와 잣나무만이 맨 뒤에 시드는 것이다”라며 군사들을 독려하고 죽기로 싸웠다는 이야기를 전해준다.
또 진덕왕 원년에 김유신 장군이 백제와 싸울 때 “추운 겨울이 된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맨 나중에 시드는 것을 안다”며 비령자를 독려하자 비령자가 종에게 아들을 부탁하고 적진으로 달려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는 모두 <논어>에 나오는 “추운 겨울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드는 것을 알게 된다”는 구절을 생각하고 말한 것으로 보인다. 선비가 궁해져야 그 절의를 보게 되고, 세상이 어지러워야 충신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삼국시대에도 중국 문화가 깊숙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삼국사기>를 보면, 고운 최치원이 태조 왕건이 범상하지 않은 인물로 반드시 천명을 받아 나라를 열 것을 알았던 까닭에 “계림은 누런 잎이요, 곡령(鵠嶺)은 푸른 솔이로다”라는 글을 주었다고 한다. ‘계림’은 신라의 김씨 왕조 시조인 김알지의 탄생설화가 담긴 숲으로 신라를, ‘누런 잎’은 망해간다는 것을 뜻한다. ‘곡령’은 개경의 고개 이름이니 고려 왕조가 개창될 것을 비유적으로 예언한 말이라고 전한다.
<고려사>에도 여기에 대응하는 이야기가 있다. 왕건의 선조 강충이 원래 부소산 북쪽에 있는 부소군에 살았는데, 풍수를 잘 아는 신라 감관 팔원이 부소산이 형세는 좋으나 나무가 없는 것을 보고 강충에게 “만일 부소군을 산 남쪽으로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 암석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면 거기서 삼한을 통일하는 자가 출생할 것”이라고 했다. 강충은 사람들과 함께 산 남쪽으로 이사하고 온 산에 소나무를 심어 이름을 송악으로 고쳤다. 이렇게 푸른 소나무는 왕의 탄생을 상징하는 나무가 된 것이다.
<고려사>에는 이외에 나무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가 있다. 정종은 태조의 능을 참배하기 위해 정성을 들이던 날 저녁에 궁전 동쪽 산의 소나무 속에서 정종의 이름을 부르며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을 잘 돌봐주는 것이 임금의 가장 요긴한 일이니라”라는 소리를 듣고 사면령을 내렸다. 하지만 권력 지향의 소나무 사랑은 백성들에게 피해를 많이 입혔다. 고려의 권력자들이 좋은 소나무를 옮겨 심기 위해 백성들을 동원한 것이다.
조선 왕실과 소나무의 긴밀한 관계는 실록에서도, 현장에서도 많이 보인다. 실제 왕릉은 유독 소나무와 친하다. 이런 전통은 민간에도 영향을 미쳐 다른 나무는 햇빛을 가린다고 무덤 주변에서 자라지 못하게 하지만 소나무는 도래솔이라고 해 무덤을 꾸미게 한다.
소나무는 사실 활엽수가 무성하게 자라면 쇠퇴하는 생태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지층에 보존된 꽃가루를 분석해보면 우리나라에 소나무가 많은 것은 농경문화의 영향으로 보인다. 농경이 활발해진 시기와 소나무가 번창한 시기가 비슷하게 맞아떨어진다.
이렇게 우리 전통문화와 같이한 소나무는 참 좋은 나무라 할 수 있다. 나무를 다루는 기계가 없던 시절에도 연한 재질 덕에 사람들은 쉽게 소나무를 이용할 수 있었다. 춘궁기에 배를 곯을 때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으며 연명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소나무에 의지해 산다는 식으로 오로지 소나무만 치켜세우는 것은 문제가 있다. 원래 인류는 자신의 주변에 많이 자라는 나무를 이용하며 살아왔다. 같은 우리 민족이라도 자작나무가 많은 백두산 부근에서는 삶에 필요한 대부분을 자작나무에 의존했다. 이 땅에 다양한 나무가 많아야 우리의 생태계가 건강해진다.
역사는 이런 이치를 알려준다. 배가 고프다고 솔잎이나 소나무 껍질만 많이 먹으면 변비로 고생한다. 그래서 슬기로운 선조들은 느릅나무 껍질과 섞어 먹었다. 느릅나무 껍질은 한방에서 활제(대변이 굳어 잘 나오지 않는 것을 매끄럽게 만들어주는 것)로 쓰이기 때문에 변비 방지에 그만이다. 이런 역사는 기막히게 아름다운 장면도 연출했다. 평강공주가 온달을 찾아갔을 때 온달은 배가 고파 느릅나무 껍질을 벗겨서 지고 내려오는 중이었다. 지게를 지고 산에서 내려오는 온달과 궁궐에서 나온 공주. 지게에 얼기설기 묶인 느릅나무 껍질과 섬섬옥수를 두르고 있는 비단결의 만남은 극적이다.
선조들은 나무와 관련, 또 다른 꿈도 꿨다. 곳곳에 많은 삼괴정(三槐亭)이 이를 잘 말해준다. 삼괴정은 느티나무 세 그루를 심어놓고 삼정승을 꿈꾸며 붙인 이름이다. 사실 중국에서는 느티나무가 아니라 회화나무를 심었다. 주나라에서는 관직을 나무에 비유했는데, 태사(太師)·태부(太傅)·태보(太保)를 ‘삼공(三公)’이라 하고 삼공을 회화나무 세 그루를 뜻하는 ‘삼괴(三槐)’라 부르기도 했다. 또 조정 앞에 회화나무를 심었기에 조정을 괴정이라고도 불렀다. 주나라에선 우리의 선비격인 사(士)가 죽으면 무덤에 이 나무를 심어 학자수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의 회화나무를 구하기 어렵자 잘 자랄 수 있는 느티나무를 심고 괴목(槐木)이라 부르며 자손의 출세를 기원한 것이다. 우리 역사는 말한다. 주변에 잘 자라고 있는 나무를 귀하게 대하라고.
▶필자 신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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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공지보기▶전통생태 지식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산림생태, 생물다양성 보전 등을 연구하고 있다. <다시, 나무를 보다>, 어린이 그림책 <나무는 언제나 좋아> 등이 있다. 국립수목원장을 지냈다. 동양대학교 초빙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