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앙의 징검다리인 수요 말씀 ◈
핵심 주제: 아! 데살로니가(1월 18일)
본문: 사도행전 17:1-9 주관/기도- 남신도회/조경희님
‘데살로니가(데살로니카)’는 알렉산더대왕(BC 356-323)의 부하 장수였던 ‘카산더’가 자신의 아내이자 알렉산더대왕의 이복누이 데살로니가의 이름을 따 세운 도시입니다. 주요 국제무역로의 중심이었던 데살로니가는 북방의 상업 도로와 아드리아해-비잔티움의 교차점으로, 후에 에그나티아(로마에서 아시아로 통하는 길)로 불렸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도시였던 데살로니가가 바울의 일행에 의해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동서로 뻗은 이 도로를 따라 복음이 전해졌다는 건 온 인류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기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고 계획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생각 너머에 항상 존재합니다. 이걸 믿고 순종하는 것이 믿음의 핵심인 것이죠.
17장 1절의 말씀이 갖는 의미는 큽니다. 성경은 단 한 절로 선교 여정을 말하고 있지만, 바울 일행이 1절에서 보여준 동선은 매우 재미있습니다.
암비볼리는 빌립보에서 53km이고, 암비볼리에서 아볼로니아는 48km, 아볼로니아는 데살로니가에서 59km입니다. 그러니 이 한 절에서 무려 60km에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도시들을 다니며 복음을 전한 겁니다. 당시 교통수단으로 이만한 거리는 쉬운 길이 아니죠. 게다가 마땅한 숙소도, 먹을 것도 없이 오직 복음 전파를 일념으로 한 여정은 순탄하지 않았을 겁니다. 바울 일행은 언제나처럼 회당을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회당은 유대인들의 전유물이었기에 주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에 회당이 사용되는 걸 이들이 달가워할 리 없음은 물론 오히려 분노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은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한 교회의 교인이라고 해서 평등 인격체로 여기는 문제는 쉽게 용납되지 않았을 겁니다. 요즘도 말로는 같은 교회 교인이라면서 끼리끼리 움직이는 건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래도 바울 일행은 세 주에 걸쳐 안식일 회당에서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는 걸 증거했습니다. 4절에 의하면 “몇몇 사람이 승복하여 바울과 실라를 따르고...또 많은 경건한 그리스 사람들과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그렇게 하였다.”고 전합니다.
여기서 몇몇이란, 유대인들을 말하는 것이며, 그 외의 사람은 이방인과 여인들입니다. 이처럼 기득권을 버리고 기존의 생각을 바꾼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유대인은 불량배를 동원하거나 패거리를 이루어 바울 일행을 잡으려고 했죠. 하지만 야손과 신도 몇 사람만을 붙잡아 시청 관원들에게 데리고 가 처벌을 요구합니다. 이 장면은 위기의 순간이지만, 이런 일을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이 전파되는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야손’이라는 사람의 입에서 또 다른 왕이 예수라는 증언이 나올 정도로 말입니다.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행을 체포한 사람들은 난리를 치지만, 오히려 관원들은 보석금을 받고 이들을 풀어주죠. 성서에 별다른 증언은 없으나, 많은 사람이 야손의 말에 암묵적으로 동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황제의 명을 거슬러 행동을 한다는 이유로 잡아 왔다(7절)고 했는데, 또 다른 왕이라는 말을 들은 관원들이 돈만 받고 풀어주는 건 인정에 의한 묵과로 이해됩니다.
힘들지 않으면, 진실도 없고 감동도 없습니다. 믿음은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답게 살기 위한 자신 스스로의 처절함과 진실함 임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