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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지도> 泰□四年 五月 十六日 丙午正陽 造百練鋼七支刀 豈避百兵 宜供供侯王 □□□□作 先世以來未有此刀 百濨王世子奇生聖音 故僞倭王旨造 傳示後世 태□ 4년 5월 16일 병오날 12시에 백 번 제련한 쇠로 칠지도를 만들었으니 나아가 온갖 병사를 물리치리라. 후왕에게 적합하다. 예전에는 이런 칼이 없었으나, 백제 왕세자가 기이하게 태어나 성스러운 덕이 있기 때문에 왜 왕을 위해서 일부러 만들었다. 후세에 전하여 보여라.(김태식)
※쟁점이 되는 부분 ․泰□의 해석 - 이병도: 泰和. 백제의 연호. 372년 “설령 이를 和字로 보아 泰和라 할지라도 이것이 반드시 중국연호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 물건이 문헌상으로 보나 실물로 보나 어디로 보던지 백제의 것이 극명한 이상 紀年에 관한 삼국의 관례를 고려할 필요가 있지 아니 한가. 우리 삼국시대의 금석문에 있어서 중국의 연호를 사용한 예는 아직껏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대개 자국의 연호나, 그렇지 않으면 干支로 표시하는 것이 예로 되어 있다. 泰자 아래 글자가 무엇이던 간에 그것이 중국연호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 김석형: 泰和. 백제의 연호. 구체적인 연도는 알 수 없으나 5세기 어 느때 - 문정창: 泰和. 백제의 연호. 421년~451년. 백제국왕이 왜왕 찬 또는 진에게 하사한 것 - 손영종: 泰和. 백제의 연호. 전지왕 4년인 408년. 5월 13일 병오에 맞춰 계산 - 연민수: 奉□. 백제의 연호. 무령왕 4년인 504년 - 이진희: 泰和(=太和). 북위의 연호. 480년 - 김기섭: 泰□. 백제의 연호일 가능성이 크다. - 菅政友: 泰始. 서진의 연호. 일본서기의 기록과 일치시키려는 의도 - 宮岐市定: 泰始. 남송의 연호. 468년 - 福山敏男: 泰和(=太和). 동진의 연호. 369년 - 粟原朋信: 泰和(=太和). 동진의 연호 “백제의 종주국인 동진의 황제가 왜왕 旨를 위하여 만들어 백제왕을 통하여 왜왕에게 하사한 것이다.”
․百濨王世子奇生聖音 故僞倭王旨造 傳示後世의 해석 - 연민수: 백제의 왕세자는 신성한 계시를 받고 존귀하게 태어나 일부(故)왜왕을 위해(爲)정교하게(旨)만든 것이니 이를 후세에 전하여 보여라 - 이도학: 백제왕 치세에 기묘하게 얻은 성스러운 소식이 생긴 고로(故), 왜왕을 위하여(爲) 만든 뜻(旨)을 후세에 전하여 보여라 - 소진철: 백제왕과 세자는 같이 생(生)을 왜왕의 은혜(御恩)에 의지하여 기대고(依倚)있기 때문에, 왜왕의 상지(上旨)에 의해서 만드니, 길이 후게(後世)에 전할 것이다. - 임길채: 백제의 왕세자가 뜻밖에(奇)왕자(세시무)를 낳은(生)고로(故), 왜왕으로 삼고자 (이 칼을)만들도록 명한 것이니, 후세에 전하여 보여라 - 宮岐市定: 백제의 왕세자는 기이하게도 태어나면서 성덕(聖德)이 있으므로(故), 왜왕을 위해(爲)처음으로(旨)만든 것이니 이를 후세에 전하여 보여라 - 福山敏男: 백제왕과 세자가 생을 왜왕의 은혜(御恩)에 의지하고 있으므로(故), 왜왕의 상지(上旨=윗사람의 명령)가 있는 까닭에(爲)만든 것이니 이를 후세에 전하여 보여라
․百濨王世子 奇生聖音에 대한 해석 - 김석형: 삼국시대는 태자라고 하였지 세자라고 하지 않았다. 백제의 어떤 직위에 있는 사람 정도로 해석이 가능하다. - 천관우: 聖音은 일본서기에서 백제왕자를 가리키는 古訓인 ‘세시무(セシム)’일 것이다. - 임길채: 백제의 왕세자가 뜻밖에(奇)왕자(세시무)를 낳았다(生) “百濨王世子란 백자왕과 세자의 2인칭이 아닌 백제의 왕세자를 뜻하는 1인칭이다 奇生을 인명으로 보는 것은 당시 국제관계의 관습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奇生이 백제왕세자의 이름이라면 백제가 왜의 조공국이라는 의미가 되므로 칠지도의 명문이 하행문형식으로 작성되어 있다는 사실과도 부합되지 않는다.” - 宮岐市定: 聖音=聖德. 기이하게도 태어나면서 성덕이 있었다. - 福山敏男: 聖音=德音, 聖恩. 백제가 왜왕의 은택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왜왕의 旨에 의해서 칠지도가 만들어졌다. - 三品英彰: 奇生聖音은 백제왕세자의 이름이다. 奇生은 貴須의 通音이며, 聖音은 왕세자에 대한 敬稱이다. - 西田長男: 奇生은 일본음으로 비슷한 貴須를 나타내고 聖音이란 왕세자에 대한 존칭
․또 다른 견해 七支: 불교사상의 七覺支, 七覺分을 뜻하는 상징적인 물건이다.
※칠지도의 발견 경위 1873년 이소노카미 신궁의 다이쿠우시(大宮司)인 스가 마사토모(菅政友)가 신궁의 물품 중에 육차모(六叉鉾)적힌 것이 들어있는 상자를 뜯어 보았다. 그것이 칠지도의 최초 발견 경위다.
※의문점 菅政友는 처음 발견할때는 물품품목에 六叉鉾(여섯가지 갈래)라고 적혀있었으나 나중에 칠지도(七支刀: 일곱가지의 칼)란 이름으로 명명하였다. 어떻게 맨 가운데 중심부분까지 가지로 취급하여 칠지도가 되었는가…
문정창《한국사의 연장 일본고대사》P307~311 김정배《칠지도 연구의 새로운 방향》 손영종《광개토왕릉비문 연구》P221~248 천관우《가야사연구》 김기섭《백제와 근초고왕》P335~P340 조유전《한국사 미스테리》 임길채《일본 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P343~437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고대로부터의 통신》 아시오 나오히로《새로 쓴 일본사》 |
․후나야마 고분의 대도
[治][天][下]□□□□[齒]大王에서 [齒]대왕을 18대 천황인 반정천황(齒別天皇)으로 보기도 함
(가야모도 《고분시대 금석문》
대도의 해석: 천하를 다스리는 … 대왕대에 대왕의 명령을 받들은 관청사람 이름은 무리(无 利)가 만든 것이다. 8월 중에 큰 용해 가마를 썼다.
4척이나 되는 □도를 80번이나 단련해서 60진(振) 3재(才)를 만들었다.
이 좋은 칼을 차는 자는 오래 살고 자손도 많을 것이요, 세 가지 은혜를 다 받을 것이요, 그 통솔하는 바(나라)도 잃지 않을 것이다. 이 칼을 손수 만든자의 이름은 이태(어)요, 글자를 쓴 것은 장안이다.
․齒=鹵: 백제 개로왕
<후나야마 고분의 쇠칼> 일본 큐슈 구마모도 고을에 있는 후나야마 고분에서 서기 1873년에 발굴된 쇠칼에는 은으로 75자의 글자를 새기고 은으로 상감한 75자의 글자가 들어 있는 것이 찾아졌다. 글이 새겨진 쇠칼과 더불어 많은 유물이 후나야마 고분에서 나왔는데, 여럿이 백제 것과 닮은 데 주목을 하게 된다. 먼저 이 고분의 돌방 모양이 맞배 지붕꼴인데, 무령 대왕의 나무 관과 닮았다. 이 고분의 유물 가운데 왕관과 금동 신발이 또한 눈길을 끈다. 왕관의 관모 꼴이 꼬리 달린 것이 전라도 입정리 고분에서 나온 관모와 꼭같다. 금동 신발의 무늬새나 밑창의 못이 두령대왕의 금동신발과 비슷하다. 하남시 뒷산인 백제 이성산성에 있는 아홉모 기판의 천단과 여덟모 기단의 시직단의 기단이 곡 닮은 유적이 이 고분에 가까운 기꾸찌죠 산성 터에서 발굴되었다. 이뿐 아니라, 유물 가운데 금붙이나 토기도 백제 것과 많이 닮은 것이 눈에 띈다. 이런 여러 가지 고고학 배경을 감한할 때 후나야마 고분의 주인공은 백제의 후왕임이 짐작되며, 이 쇠칼의 글뜻도 이것을 여실히 뒷받침해 준다. 특히, 쇠칼의 글에 “가운데 중”자가 보이는데 이는 “에”를 나타내는 이두의 표기임이 우리나라 학자사이에는 잘 알려진 용법인 것이다. 김영덕《옛 일본의 두 자루 쇠칼에 새긴 글》 |
<마구>
1.고분에 마구가 부장되기 시작한 시기는 대체로 5세기부터 ⇒후기 고분시대를 특징짓는 유물
․마구의 종류: 등자, 안장, 재갈, 재갈 받치개 판, 행엽
․출토된 고분: 오사까 부 나가묘찌 산 고분, 응신 천황릉 배총 마루야마 고분
오까야와 현 오 다니 고분, 쯔끼야마 고분
구마모도 현 후나야마 고분
<하니와>
1.흙으로 인물이나 짐승, 집 등의 형상을 빚어서 높지 않은 온도에 구워 내어 무덤 가장자 리에 묻어 놓는 것. ⇒《일본서기》에 따르면 순장 대신
2.하니와의 원형: 원통 하니와(4세기부터 등장: 자우산 고분)
높이 80Cm 정도 구멍이 많이 뚫려 있다.
구멍의 크기가 지나치게 큰 것으로 보아 실용품이 아닌 가기(假器)적인 것
3.나주 반남면 고분: 원통 하니와와 동일한 명기류 출토
․경주 금령총에서도 인물상, 우마상과 같은 명기류 출토 ․그릇의 용도 ⇒실용적
<스에끼>:회도계의 뚜껑이 있는 토기
1.한국에서 건너온 것 ․日학자들: 원류를 은나라 토기에 두고 있다.
2.횡혈식 석실에서 출토, 회색빛
3.야요이 식 토기 → 하자끼 토기(초기) → 스에끼 토기(중기)
4.4세기에 회도 출현 → 5세기 스에끼 출현
․스에끼의 발전단계
․1단계: 일본화되지 않고 남부 조선적 색채가 농후한 것(5세기 전후)
후다고 총식: 남부 한국의 도질과 비슷, 후나야마고분에서 출토
곡총식: 일본식(여전히 남부한국의 형식 잔재)
․백제식 토기와 더불어 신라식 토기도 계승(각자 다른 장소: 각 나라의 진출 반영)
․2단계: 일본화의 완성(6세기)
․3단계: 일본화를 완성한 스에끼의 전개(6세기 말~7세기)
․4단계: 새로운 외래의 영향, 나라시대 스에끼로 넘어가는 상태
<장신구, 후나야마 고분>
1.유리 공예, 구슬 공예, 금은 공예, 주동(鑄銅)공예: 한국식
2.신라 금령총에서 발굴된 장신구들은 일본것보다 더 화려: 日학자들은 일본것과 다르다고 한다.
3.반남면에서 출토된 굽은 구슬은 일본것과 유사
4.금은 공예이전의 것을 주동(鑄銅)공예라고 한다.
거울류: 초기 - 중국거울 ⇒내행화문경, 방격규구사신경
후기 - 모방품 ⇒방제경 √日 : 일본특유의 것
√김석형: 한국에서도 발견되었다.
․경주 금령총의 백유경
․경주 황남리 적석총의 거울
5.금은공예: 황금가락지, 황금귀걸이, 금은 상감품, 금동관, 금동신발, 허리띠 부속품 등
․관모는(특히 금이나 동으로 만든 것은) 계급을 의미하는 것으로 특별한 것이다.
․관모의 대표적 출토고분: 후나야마 고분, 시즈오까 현 스즈노미 - 고쇼 고분
⇒경주 금령총의 출토품과 유사
6.후나야마 고분(전장 46m)
․후나야마 고분의 주인공: 한국제 금동관을 쓰고 한국제 금동신발을 신고 스에끼 토기
가 묻혔고 백제에서 준 것으로 보이는 은상감 칼을 갖고 있
었으며 장신구(가락지, 귀걸이)등도 한국제였다.
⇒큐슈의 이 세력은 기내 야마도와는 다른 독자적 세력(친 백제계)이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