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일보]
아무튼 볕이 바르고 경관이 수려한 곳만 보면 언젠가 거기에 집을 짓고 살아야지 했다. 경춘선을 타고 강촌역을 지날 때도 그랬고, 중앙선을 타고 간현역을 지날 때도 그랬다. 전주와 서울을 오르내리던 시절, 호남선을 타고 과수원역을 지날 때도 같은 꿈을 꾸곤 했다. 하지만 나의 꿈은 무정란처럼 매번 부화에 실패하고 말았다.
4월부터 두어 주에 한 번꼴로 내려와 공사를 하고 있다. 시골이라 일꾼을 구하기도 쉽지 않지만, 굳이 서둘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아서다. 지붕을 새로 이고 얼마 있다 천장을 낮추었다. 또 얼마 있다가 작업실과 화장실을 넣었다. 프란시스 잼의 시에 나오는 눈빛이 순한 당나귀 한 마리가 금방이라도 돌아서 나올 것 같은 그런 긴 돌담도 쌓았다. 이달 중순쯤 돈이 마련되는 대로 도배도 하고 바닥도 깔면 일 단계 공사는 마무리되는 셈이다.
지난 3월 처음 내려 왔을 때는 유채꽃이 환했다. 4월과 5월, 아침마다 새소리에 잠이 깼다. 작은 새들의 지저귐은 탄산음료의 기포가 터지는 소리처럼 상쾌했고, 침엽수가 내뿜는 공기는 아이스크림처럼 감미로웠다. 밤에는 별을 보다가 잠이 들곤 했다. 대도시를 탈출한 별들이 모두 이곳에 피신해 온 것은 아닐까 할 정도로 많았다. 어떤 별은 잘 닦은 놋주발만큼이나 하다. 고개를 젖히는 순간 와르르 무너져 이마 위로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오랫동안 꿈꾸었던 나의 낙원이 비로소 현실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했던 건 물론이다. 가을에 펼쳐질 또 다른 풍경에 대한 기대도 가슴을 설레게 했다. 내 노년은 이제 오래오래 평안해도 좋으리라.
그런데 8월에 들어서면 예기치 못한 문제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공사비가 떨어져 달포가량 오지 못했더니, 그새 쑥이며 망초며 명아주 같은 잡초들, 아니, 녹색제복의 군단들이 이미 과수원 접수를 끝내고, 바야흐로 나의 아지트인 창고를 포위 공격 중이었다.
'풀과의 전쟁!'
그건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었다. 낫으로는 턱도 없을 것 같았다. 서울서 사 가지고 온 예초기를 급히 조립했다. 단칼에 요절을 내 주리라. 그러나 오산이었다. 아니, 자만이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 듯싶다. 이미 굵을 대로 굵어진 쑥대와 명아주는 예초기 날 사이에서 온 힘으로 저항하고, 강아지풀이며 달개비 줄기 같은 연약한 것들은 그것들대로 예초기의 회전축을 휘감아서는 기계도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뜯어내고 베고, 뜯어내고 베고… 수없는 반복. 그러나 몇 시간의 악전고투에도 불구하고 내가 수복한 영토란 고작 여남은 평에 불과했다. 인해전술(人海戰術)이 아닌 초해전술(草海戰術)! 백기를 들고 말았다. 풀이 무섭다는 생각이 든 건 난생 처음이었다.
그런데 나의 복낙원(復樂園)의 의지를 시험하는 건 잡초만이 아니었다. 밤에는 벌레들의 공격이 이어졌다. 손바닥만 한 나방이란 놈이 뺨을 때리고 달아나고 나면, 이번에는 매미만 한 풍뎅이가 봉당에 뛰어 들어서는 흙먼지를 자욱이 일으키며 막무가내로 일인시위를 벌이는 것이었다. 데모에 무감각해진 서울특별시민인 나라고는 하지만 여간 난처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떼거리로 몰려드는 모기들의 편대 공습이라니.
풀을 베던 날 밤이었다. 탈진 상태가 되어 대충 저녁을 때우고 잠시 시들었다 일어나리라 했다. 그런데 내처 자고 말았다. 꿈도 없는 단잠. 그러나 아침에 깨어 보니 손등과 팔다리는 물론 얼굴까지 온통 빨간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추석 때만 해도 그렇다. 샤워를 하고 휘파람을 불며 테라스에서 보름달-이곳 달은 찬물에서 방금 건져낸 것 같다-을 구경하고 있었다. 잠시 후 방으로 들어가려는 참이었다. 그런데 낌새가 좀 수상했다. 발을 옮기려는 순간 손가락 굵기만 한 초록색 뱀 한 마리가 이미 내 발등을 타고 넘는 중이었다. 다 넘어갈 때까지 난 부동자세! 게다가 그 섬뜩함이라니! 한데 놈은 미안한 기색도 없이 유유히 돌담 쪽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수인사는 혀사 쓰것지라우?"
뭐 그렇게 이죽거리는 것 같았다. 잔뜩 부풀었던 나의 꿈과 기대와 낭만 여기저기에서 피식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꿈을 접을 수는 없는 일. 덫이며 농약이며 제초제 같은 걸 쓰면 어찌 되겠지만 그건 여기 온 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니 그럴 수는 없고. 궁리 끝에 겨우 도달한 해결책은, 일단 낙원에 대한 나의 관념부터 수정하는 일이었다. 다음은 그들을 또 다른 나의 이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끔 반갑지 않은 방문도 받아야 하고, 원치 않는 헌혈도 해야겠지만 적정선에서 타협하면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란 생각에서다.
하긴 에덴동산에도 분명 뱀은 있었으니까. 어찌 보면 풀이며 모기며 나방이며 풍뎅이가 없는 세상, 사람만 사는 세상. 그게 어디 진짜 낙원이겠는가 싶기도 하다.
손광성 수필가 |
출처: 행복한 삶의 방식 원문보기 글쓴이: 아름다운나무
첫댓글 이 작품은 부산일보에 연재되는 손광성 선생님의 글입니다.
스크랲을 했더니 글제 옆에 작자의 성함을 아쉽게도 적을 수 없네요.
부산일보에 난 거 보고 인쇄하려는데 경애님이올리신 글이 우리 카페와 함께 뜨더이다 . 고마워요. 참 부지런도 하셔라. ㅎㅎㅎ
그런데 스크랲 밖에 할 수 없으니, 활자를 키울 수 없어서 읽기가 좀 불편 할 것 같네요.
지난 학기 동안 무언가 느껴지던 선생님의 수상쩍은(?) 잠행,
이제야 그 윤곽이 드러나는군요.
그러시리라 짐작은 했지만 여전히 어딘지 모를 그곳의 풍경,
꿈을 이루신 것 같아, 감축드리옵니다. ㅎㅎㅎ
저도 전원생활을 꿈꾸는 꿈쟁이로서 선생님 만나고 계신 복병, 염두에는 두지만
아직도 그저 막연할 뿐.
선생님의 새로운 둥지에서 새로운 이웃(뱀, 벌레, 잡초)들과 화평한 유대 이루시기 빕니다.
그런데요. 뱀이 한 말을 보니 전라남도 어디쯤으로 가신 듯 싶어요.
언젠가 남해라 하셨는데, 아마 해남인가 봅니다. 아닌가?
수인사는 혀사 쓰것지라... 비얌도 그지방 태생잉께.'흐메 존거어'.
수필의 정형을 봅니다--글은 솔직하고 편하게 술술 써야함을 다시 확인하니 기쁩니다.
고상한 철학을 쥐어 짜내거나 아름답게 굳이 치장하는 글이 부질없음을 배웁니다.
작가의 마음을 편히 읽는 것 만으로도 큰 감동이니까요..
누구나 쉽게 이해되는 글 공감의 폭이 넓겠지요--공부 잘 하고 갑니다
네, '개똥철학'은 짧을 수록 좋다고 수업 시간마다 말씀하십니다.
전원생활도 체력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풀과의 전쟁! 그것 보통 힘든 것 아니거든요.
놋주발만한 별, 아이스크림 같은 공기, 탄산음료 기포 터지는 소리 같은 새소리를 무상으로 얻으셨으니 감내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눈빛이 순한 당나귀'가 어쩐지 선생님을 연상케 합니다.(죄송합니다^^)
꿈을 이루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따뜻한 남쪽나라"
알 듯도 싶은데, 아니라시니.
아무튼 이웃들과 잘 타협하여 선생님의 꿈이 평화롭게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남해라 하셔서 "김미옥 군수님"의 휘하에(^^) 사시게 됐다 싶었는데 아마도 해남인가 봅니다.
부산일보에 실린 것을 보면 남해인지도.
남해, 해남. 뒤집어 보면 오락가락.ㅎㅎ
" 수 인사는 해야 쓰것지라우?"...아무래도 경상도는 아닌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