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짓을 하면 누군가가 어디인지 알 수없는 방향에서 불만족해하면서 다가온다고 느껴야 합니다. 이런 느낌이 있기 때문에 나쁜 짓을 하지 않습니다. 교사가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다고 느껴야 합니다(청소년을 위한 교육예술 , 2023, 247)."
필자는 얼마전까지도 여러가지 사회 현상을 궁금해하면서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그런데 너무 양극단으로 치우쳐 있어서 의견을 내거나 참여하기가 요즈음은 두렵다. 처음에는역사가 반복된다는 생각이, 해방 후 반민족 특위가 해체되고 김구선생님이 암살되는 상황이 재연되는 듯했다. 이제는 그 도를 넘어서 더 강하게 양극단으로 치닫는다. 여기서 누가, 어떤 방법으로 이를 멈출 것인가?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렇게 된 이유, 첫째 현재 이루어지는 (공)교육이 7- 14세 사이 아이들의 정신의 발달을 막아서 아이들의 정신이 망가졌기 때문이다. 정신이 망가지면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한다. 스스로 판단을 하지 못하므로 다른 사람의 선동에 이끌리게 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일종의 자동 반사 인간, 요컨대 선동하면 자동으로 반사하는 인간이 된다.
둘째,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인 돈을 벌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일례로 돈을 벌기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먹이삼아 사냥을 한다. 거짓정보로 선동을 일삼는 것 역시 돈을 벌기 위함이다. 셋째, 일종의 세뇌현상이라고 생각이 된다. 사람은 태어나서 살던 곳의 분위기나 주장을 판단없이 받아들인다. 이것이 세뇌인데, 인간은 한정된 정보를 받아 들일 수밖에 없고, 또 그 정보는 무의식중에 습득이 되므로 거기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예컨대 북한의 세뇌를 보면 알 수가 있다. 넷째, 자신의 정체성을 파악하지 못하므로 민족과 인류에 대한 미래를 내다보아서 행동하지 못한다. 역시 크게 보아 정신이 온전하게 발달하지 못한 때문이다.
다음은 이에 관한 법륜스님의 말씀이다. 이는 사실과 믿음에 대한 문제이다. 사실을 근거로 해서 어떤 행동을 하거나 자신의 소신을 펼쳐야 하는데, 사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믿음으로써 맹목적으로 움직이기 떄문이다. 그렇기에 행동은 과격하고 거칠다. 문제를 파악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렇게 자신의 삶을 살면,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도, 의무도 지기 어렵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삶을 추스려서,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고 살아야 삶이 발달하는데, 이렇게 되는 것은 사실을 직시하는 정신(?)이 없기 떄문이다.
인간의 발달단계 그 중에서도 7-14세 사이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시기 아이들은 자아가 드러나지 않으므로, 모든 상황을 어떤 거름막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기 떄문이다. 그래서 누군가 그 시기 아이들의 거울이 되어서 아이들이 받아들이도록 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 장치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첫째가 15세기 과학혁명으로 인간의 영(정신)이 배제되었고, 둘째가 신자유주의로 말미암아 희미하게 남아있던 정신의 그림자마저도 경제로 넘겨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시기 아이들의 자아가 믿고 따르는 장치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이것이 이 시기 교사의 권위이다. 교사의 권위란 어떤 강제적인 장치가 아니다. 사회적으로 또 교육적으로 교사의 권위가 인정되어서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따르게 되어야 한다.
다음은 여담으로 필자의 경험이다. 초등 6학년 시절의 이야기이다. 그 무렵 필자의 집에서는 저녁을 모든 식구가 둘러앉아서 밥을 같이 먹었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집에서 그렇게 먹었는데, 저녁을 먹으면서 필자는 그 날 일어난 일, 동네에서 일어난 일 등등을 보고하는 역할을 했다. 그 날은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하는데, 담임선생님이 퇴근 후 술집에 자주 가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반 아이들이 조를 짜서 담임선생님을 미행하자는 것이다. 물론 필자도 조에 포함되어 있었다. 평소 필자의 아버지는 들으면서도 별 말씀이 없으셨는데, 그 날은 갑자기 크게 소리를 지르셨다. 필자는 깜짝 놀랐는데, '감히 선생님을 미행하다니, 그런 일은 절대 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이셨다. 그러고도 마음이 안 놓였는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필자의 아버지 시대는 일본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일본의 유명한 식물학자의 이야기였다. 식물학자의 아들이 학교에서 식물에 관한 설명을 듣고 와서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하는데, 식물학자가 들어보니 아들의 선생님이 틀렸던 모양이다. 식물학자는 선생님이 틀렸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다음 날 선생님에게 편지를 써서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만약 선생님이 틀렸다고 하면 아들은 선생님을 우습게 보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은 아들의 교육이 어렵다는 것을 파악한 것이다. 이것이 선생님의 권위이다. 예를 들어 선생님이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고, 그들이 사회를 이끈다'라고 아이야기를 한다면, 아이들은 그렇게 믿는다. 물론 그 반대의 이야기도 성립한다. 만약 아이들이 교사를 믿지 않는다면, 교사의 교육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교사가 어떤 말을 해도 아이들이 믿지 않기 떄문이다.
나아가 문제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바탕이 이 시기에 형성된다는 데에 있다(슈타이너의 주장). 세상에서 발생하는 여러가지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이 시기에 형성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본질적인 시선이 올바르게 형성되어야 평생을 살아가면서 삶이 흔들리지 않는다. 만약 이 시선이 흔들리면 어떤 문제에 대해서 자신이 판단하기가 어렵다. 자긍심을 가지기가 어렵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교사를 믿어야 아이들의 바탕이 형성된다. 요즈음 같이 아이들이 교사를 믿지 않는다는 말은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다. 그래서 필자는 현장에서 아이들을 거의 나무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믿고 교사를 따르게 할려면 나무라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교사를믿고 따르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시기가 지나면 비로소 12-14세 사이 아스트랄체가 탄생, 아이들은 스스로 사고를 하게 된다. 사고를 하면은 그때부터 아이들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자신이 판단을 내리게 된다. 즉 교사의 권위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슈타이너는 이를, "그 다음에 사춘기가 되면 권위자에 대한 느낌을 벗어내고 자신의 판단을 찾습니다(위 책 248)." 이것이 인간의 발달단계이다. 인간의 발달단계를 알아야 거기에 맞는 교육을 할 수가 있다.
위 주제 문장을 읽으면서 필자는 필자의 어린 시절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진짜로 위 문장처럼 교사가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했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나쁜 짓을 하기 어려웠고, 사춘기 시절 때로는 흔들렸지만 무사히 지나온 듯하다. 그 이유가 필자의 아버지로 부터 어릴 적에 들은 이야기 였다는 생각이 (이제) 든 것이다. 필자 역시 당시 아이들의 이야기에 솔깃해서 동조를 했고, 그 분위기에 휩쓸렸다. 만약 그렇게 필자의 아버지가 해주지 않았다면 학창시절 내내 분위기에 휩쓸린 것은 물론이고, 교사가 가르치는 교육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요컨대 교사를 믿고 따라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이 학장시절 내내 필자를 지켜주었다. 현장에서도 아이들에게 믿음을 주는 선생님이 되고자 한 것도 그 뿌리가 여기에 있었다.
당시 일본의 식물학자 역시 자신의 아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였다. 자신이 아들의 선생님보다 잘났음을 말하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은 자신의 아들 교육이 망가진다는 사실을 식물학자는 직시한 것이다. 지금도 다르지 않지만, 사회적으로 교사의 권위는 용인되지 않고 있다. 결과 교육은 이루어지지만, 실제로 '교육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라고 생각해야 한다.
물론 이런 감정이 우습다고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정신은 아주 작은 느낌, 길가에 난 풀 한 포기를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이 자신을 이끌고 자신의 삶을 안내한다. 지금 사회적인 현상을 보면은 다른 사람을 해치는 괴격한 행동이 상상을 초월한다. 이런 행동 바탕에는 이런 작은 정신이 올바르게 성장- 발달하지 않은 데 그 원인이 있다.
7-14세 사이 아이들은 작고 연약해서 어떤 행동을 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커서 어른이 되면, 몸 안에 담긴 정신이 드러나서, 그 커진 몸만큼 과격해진다. 이렇게 되면은 해결하는 방법이 없다. 경찰을 동원해서 무력으로 제압을 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해결하는 방법은 인간의 발달단계에 맞는 교육이다. 그중에서도 7-14세 사이 교육이 중요하다. 역시 되풀이 하지만 이 시기는 자아가 드러나지 않아서 주변의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교사의 권위는 교사를 위해서 지켜주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 12세가 되면은 저절로 교사의 권위를 따르지 않고 스스로 판단을 해 나간다. 이렇게 되므로 아이들의 정신의 발달이 이루어지는 시기에는 아이들을 우리가 지켜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 방법외에는 해결하기 어렵다는 생각도 든다. 벌써 정신이 망가진 후에는 몽둥이로도 해결하기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