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9일 동녘교회 주일예배 - YouTube
되어가는 존재 빌립보서 3월 12-16절
지금 보시는 작품들은 조각가 강대철이라는 분의 작품들입니다. 이분이 홍대 미대를 나와서 1978년 중앙미술 대전에서 “생명질”이라는 작품으로 중앙미술 대전에서 대상을 받습니다. 그때부터 27년 동안 한국 조각계 간판스타로 활동합니다. 그분의 작품들입니다. 공통점은 모두 생명의 약동하는 기운들을 담고 있습니다. 나름 열심히 민중의 생명성을 생각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신 분이십니다. 1998년에는 페루 리마 국제 조각심포지엄에서 최고 작가상을 수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 성철 스님 돌아가신 이후 성철스님 기념동상을 작품하신 이후 학계에서 사라집니다. 그리고는 거의 20년 만 17년 만에 다시 학계에 등장합니다. 학계에서 이름을 날리면서 파란만장하게 빛을 내지만 그는 그의 인생에서 뭔가의 갈증을 계속해서 느낍니다. 2005년이면 그분이 1947년생이니 환갑의 나이가 다 되셨을때입니다. 환갑의 나이가 들어서 이제는 제자들도 키우고 그러면서 평생 쌓아왔던 것을 누릴 시기인데 홀연히 떠납니다. 아마도 이분이 선교불에 빠지셨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수행의 공간으로 떠나신 듯합니다. 그러다가 되어가는 존재 빌립보서 3장 12-16절
지금 보시는 작품들은 조각가 강대철이라는 분의 작품들입니다. 이분이 홍대 미대를 나와서 1978년 중앙미술 대전에서 “생명질”이라는 작품으로 중앙미술 대전에서 대상을 받습니다. 그때부터 27년 동안 한국 조각계 간판스타로 활동합니다. 그분의 작품들입니다. 공통점은 모두 생명의 약동하는 기운들을 담고 있습니다. 나름 열심히 민중의 생명성을 생각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신 분이십니다. 1998년에는 페루 리마 국제 조각심포지엄에서 최고 작가상을 수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 성철 스님 돌아가신 이후 성철스님 기념동상을 작품하신 이후 학계에서 사라집니다. 그리고는 거의 20년 만 17년 만에 다시 학계에 등장합니다. 학계에서 이름을 날리면서 파란만장하게 빛을 내지만 그는 그의 인생에서 뭔가의 갈증을 계속해서 느낍니다. 2005년이면 그분이 1947년생이니 환갑의 나이가 다 되셨을 때입니다. 환갑의 나이가 들어서 이제는 제자들도 키우고 그러면서 평생 쌓아왔던 것을 누릴 시기인데 홀연히 떠납니다. 아마도 이분이 선불교에 빠지셨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수행의 공간으로 떠나신 듯합니다. 그러다가 2015년 쯤 전남 장흥 사자산 기슭에 10여평 토굴 집을 지어서 벗들과 살아온 인생이야기나 나누며 살 공간을 지으려고 내려갔다가 특이한 지질을 발견합니다. 그리고는 그때부터 6년 동안 손수 곡괭이질을 하면서 500평이 넘는 공간에 토굴을 파고는 작품 활동을 합니다.
그는 이 17년 즉 60넘어서 어쩌면 인생의 황혼기가 같은 시기인데도 불구하고 학계를 떠나고 스스로 자기의 세계로 들어가 온힘을 다해 작품 활동에 매진했던 이 시기를 자기를 찾아가는 여행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자기를 찾아가는 여행에서 발견한 핵심이 뭔지 아십니까? 참 재미있어요.
<어느날 문득> 이라는 살림출판사에서 나온 그의 시집이 있는데 그 시 중에 <땅굴을 파며 노래하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지아비를 잃고 어린 사남매 끌어안고 황망해 하던 어머니/ 예수를 만나 살아갈 의미를 찾아/ 모든 일은 신의 뜻이 있음을 믿고 범사에 감사했었네// 세월이 흘러 내 의식이 훌쩍 커버린 어는 날/ 교회 안에는 진짜 예수는 없고/ 교리와 떠도는 말들만 있다는 걸 알게 됐지./ 철이 든 나는 뒤늦게 역사 속에서 사라진 진짜 예수를 찾아 헤메였는데/ 그 예수가 바로 부처였구나’, ‘자기 인생 실험한다고 목숨 걸고 월남 전쟁판 뛰어들어/ 다시 한번 홀어미 가슴에 대못을 박아 놓았소/ 뒤늦게 대학을 다니며 예술가의 길을 가며 진리를 찾겠다더니/ 세상 사람 보기에 어엿한 예술가가 되었는데/ 그길도 아니라며 방황을 하면서 온갖 잡질 서슴치 않았으니’ ‘인생 조용히 마무리 하겠다고 찾아온 것이/ 남도땅 끝자락 사자산 기슭 참새미 터에 둥지 틀고 않았네요’ ‘흙을 통해 드러난 예수부처가 나를 부추긴다/뚫어라! 뚫어라!’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의 화두가 자신의 인생의 예수, 이 시대 자신의 삶속에서의 예수를 찾아가는 여정이었는데 그게 바로 누구냐면 선불교에서 만난 붓다가 자신의 인생의 예수라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을 보십시오. 이 토굴 들어서면 입구 조각된 첫작품이요 이 토굴 전체의 주제와도 같은 작품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미륵부처를 바라보고 계시는 거예요. 6.25동란을 거치면서 참 살기 힘들고 어려웠을 때 신앙을 알게 되었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살면 살수록 교회라는 공간에는 예수는 없고 온갖 잡신들만 가득하더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말 예수를 자신의 삶속에서 끊임없이 만나고 싶었고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 어떤 길인지를 평생의 화두로 삼고 살았던 겁니다. 나이 60이 넘어서도 미친 듯이 자기 열정을 가지고 말입니다. 가보고 싶지 않습니까? 인생의 어떤 순간이라도 자기 혼과 열정을 다 쏟아 부을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사도바울 선생님의 말씀은 여기는 목표라고 나와있지만 한글 번역으로는 중심이 더 맞을 듯 싶습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삶의 근본, 삶의 중심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인데 사도 바울 선생님은 우리가 삶의 어느때든지 중심성을 향한 질문들, 중심성을 향한 자기 물음들, 중심성을 향한 자기 고민들을 놓치지 말고 살아가자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삶이라는 게 그런 거 같습니다. 제가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LA에서 라스베가스를 가다보면 아우토반과 같은 길이 쫙 펼쳐져 있고 그 너머에 거대한 산이 놓여져 있습니다. 1시간 가량을 그냥 정신없이 달리면 그 산을 넘습니다. 그러면 똑같은 길과 똑같은 산이 나타납니다. 넘어선거 같은데 똑같은 것이 그대로 있고 넘어선거 같은데 똑같은 것이 또 그대로 있고 그런데 그렇게 그렇게 반복되는 길도 어떤 중심성을 향해 계속해서 가다보면 어느새 라스베가스에 도착이죠.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도 그는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전부라 생각하면서 열정과 혼을 다해 살았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어느 때 그게 전부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자기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예수운동의 가담자를 데려다가 돌로 쳐서 죽이고 그러는데 자신이 정작 죽이고 있는 스데반이라는 사람은 꼴깍꼴깍 숨이 넘어가는 그 순간에도 주님 저들은 모르고 하는 짓이오니 저들의 죄를 묻지 마시고 용서하소서 하면서 죽어가는 거예요. 자신은 자신이 잡고 사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답이라 생각하고 이것만이 옳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던 겁니다. 그 너머에 더 큰 사람도 있고 더 큰 세계도 만난 것입니다. 그는 그가 만나고 경험하여 손에 쥔 것이 전부라 생각하며 살았는데 어느 순간 그건 바닷가의 모래 한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의 인생에서 몸으로 깨닫습니다. 그러면서 아 신앙이라는게 삶이라는 게 어느 순간 뭔가의 완결점을 딱 찍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되어가는 존재>이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살면서 근본을 향한, 자기를 향한, 삶을 향한 끊임없는 진실한 물음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깊은 더 넓고 큰 세상을 향유하며 살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번 산황산의 협상 과정에서도 그렇습니다. 저는 부시장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빵빠레는 시장이 불었지만 계속해서 시민대표를 만나 그분들의 담론과 이야기를 귀담아 들은 분은 부시장입니다. 보내주시는 모든 문자들 다 읽으신 듯 했구요. 그가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지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신이 봐도 말이 안되는 건 안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다고 이쯤와서 지혜있는 반려가 되지 못하면 소송에 휘말릴 수 있고 소송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 행정을 맡아서 처리했던 두 공무원이 해마다 진급심사를 받는데 이또한 억울함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막판에 치열한 고민은 어떻게 하면 행정소송에 휘말리지 않으면서 명분있게 공무원들도 다치지 않게 이것을 해결할 수 있을까 였습니다. 그분의 속사정이 제가 모릅니다. 그런데 중요한건 그는 마지막까지 어떻게 정수장도 시민들의 이유있는 담론도, 그러면서도 공무원들도 다 살릴 수 있을까에 대한 자기 질문을 놓치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모두를 살리기 위한 자기 질문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에 살릴 수 있는 명분으로 살릴 수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에베소서의 가장 중심적인 주제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죽을 때까지 이 화두를 놓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강대철이라는 화가가 인생의 어느때 이제 살만큼 살았으니 하면서 안주했다면 그는 인생의 후반기의 그 아름다운 삶을 살아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도 바울도 삶의 근본에 대한 자신의 물음, 인생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이라면 소명이고, 자아를 찾아가는 여행에서의 참 자신을 향한 길이라면 길이고 <되어가는 존재>로써의 자기 물음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물음과 질문과 고민들이 결국은 그로하여금 전혀 새로운 삶으로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살아있다는 것은 어쩌면 “산다는 것에 대한 물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무더운 여름 장마빗 속에서도 <되어가는 존재>로써의 자기 물음 속에서 생을 향한 삶의 숨소리가 옅어지지 않는 한주간의 귀한 삶 이루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