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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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3일 수요일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요한 20,25)
오래된 상처를 다시 헤집다
불경한 손이 입힌 상처를 왜 충실한 제자의 손이 이런 식으로 다시 헤집는 것일까요? 부정한 군사가 창으로 찌른 옆구리를 왜 충실한 추종자의 손이 다시 열려고 할까요? 박해자의 분노가 가한 고통을 왜 종의 잔인한 호기심이 다시 가하려 할까요? 왜 제자가, 그분께서 주님이심을 그분의 이름으로, 그분께서 하느님이심을 그분의 고통으로, 그분께서 천상의 의사이심을 그분의 상처로 입증하고자 이다지 열심일까요? ...
토마스여, 어째서 저 혼자 영리한 그대만이 믿음을 위한 증거로 상처를 요구히는가? 그 상처들이 다른 것들과 함께 사라졌더라면 어쨌겠는가? 호기심이 그대의 믿음에 어떤 위험을 가져왔겠는가? 그들의 잔인함이 밖으로 드러나게 한 그분의 내장을 그대가 손으로 만져 보지 않으면 그분 부활의 증거도, 그분 헌신의 표시도 발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형제 여러분, 앞으로는 불경한 자조차도 주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의심하지 못하도록 그의 헌신이 이런 일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의 애정이 이런 일을 필요로 했습니다. 토마스는 반신반의하는 자기 마음과 더불어 믿지 못하는 모든 인간의 마음을 치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장차 다른 민족들에게 이 가르침을 전할 사람이었으므로 이 성실한 탐구자는 그런 신비에 필요한 믿음의 근거를 제공할 방법을 치밀히 검토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당선의 상처를 그대로 두신 유일한 이유는 당신 부활의 증거로 제시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 성인 / 영적 글 묵상✝️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8
영성은 깨어남이다
젊은이, 내가 이르노니, 일어나거라(루카 7,14).
영혼 안애는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영혼 안에는 존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존재에서 벗어나게 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 외에는 어떤 피초물도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완전하고 고귀하고 숭고합니다. 거기에는 하느님만이 둥지를 틀 수 있지만, 만일 하느님이 형태를 가지고 있거나, 형태이거나, 선하거나, 풍부하다면, 그분은 거기에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어떠한 모습으로도 거기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신의 순수한 신적 본성에 의해서만 하느님은 거기로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젊은이, 내가 이르노니, ... ”라고 하신 것에 유의하십시오.
도대체 하느님의 이 “선언”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하느님이 행동하시겠다는 뜻이고, 이 행동이야말로 너무나 고귀하고 고상하여, 하느님만이 이루실 수 있다는 뜻업니다. 우리의 모든 완전과 지복(至福)은, 우리가 모든 피조물과 시간과 존재를 통과하고 넘어서서, 마침내 궁극적인 터전에 도달할 때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우리가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서, 그분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우리 주님께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 목표에 이를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아멘.(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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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제5주간 생태 회심 주간✝️
<금주간 성서 읽기> 요한 1서 전체
<생태 회심 주간> 생태적 묵상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4. 프란치스코와 새 - 첫 번째 이야기
그가 새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였지만, 그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나의 새 자매들이여! 여러분은 여러분의 창조주를 마냥 찬미하고 늘 사랑해야 합니다. 그분은 여러분에게 옷을 입히시려고 깃을 주셨고, 날아다닐 수 있게 하시려고 날개를 주셨으며,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면 무엇이나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창조물 중에서도 여러분을 귀하게 만드셨고, 맑은 대기 속에다 집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 스스로는 도무지 걱정 않고도 살 수 있도록 그분은 여러분을 지켜 주시고 보살피십니다."
프란치스코도 말했고, 또 그와 함께 있었던 형제들도 증명했듯이, 새들은 그의 말을 듣고 그들의 본성대로 기이한 몸짓을 하면서 흥겨워하였다. 목을 놀이고, 날개를 빼며, 입을 벌려 그를 응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프란치스코는 그의 수도복 옷자락으로 새들의 머리와 몸을 스치며 그들의 한가운데를 오갔다. 마지막으로 그는 새들에게 십자성호를 그어 강복한 다음, 다른 곳으로 날아가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이어서 복되신 사부님은 기쁨에 넘쳐 자기의 동료들과 함께 갈 길을 떠났고, 모든 피조물들이 무릎을 꿇어 경배를 드리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이리하여 천성이라기보다는 은총에 의하여 어느덧 단순해진 그는 새들이 그렇게 공손한 태도로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을 보고서, 전에 새들에게 설교하지 않은 자신의 무관심에 스스로를 나무라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 날부터 그는 모든 새들과 동물, 그리고 파충류에게까지, 비록 감각 없는 피조물에게까지도 그들의 창조주를 찬미하고 사랑할 것을 열의를 다하여 권하였다. 이것은 그가 구세주의 이름을 부르며 권하면 그들이 이에 순종하는 것을 개인적인 체험으로 매일매일 느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그가 하느님의 말씀을 설교하려고 알비아노라고 불리는 고을에 당도하여, 모든 사람이 바라볼 수 있게 높은 자리에. 올라가 조용히 할 것을 청하고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침묵에 들어가 경건하게 서 있을 때, 한 떼의 제비들이 시끄럽게 재잘거리며 그곳에다 둥우리를 틀었다. 제비들이 재잘대는 바람에 복되신 프란치스코가 하는 말이 사람들에게 들리지가 않자 그가 새들에게 말하였다. “나의 제비 자매들이여! 자매들은 이미 충분히 말을 하였으니, 이제는 내가 할 시간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시오. 주님의 설교가 끝날 때까지 침묵 가운데 조용하시오" 이리하여 그 새들은 서 있던 모든 사람들이 놀라서 의아스러워할 만큼 즉시 침묵에 들어갔고, 설교가 끝날때까지 자기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이 기적을 보고 큰 감탄에 싸여 말하였다.
-첼라노가 전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 중에서-
또 한번은 프란치스코가 다른 수사와 함께 베네지아 늪지를 걷고 있을 때 갈대 사이에서 지저귀고 있는 거대한 새떼를 만났다. 성인은 새들을 보았을 때 동료들에게 말했다. "우리의 자매인 새들은 그들의 창조주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들 속에 들어가 성무일도를 드리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릅시다.“
그들이 거기 있는 새들 틈에 끼어들었는데 새들이 너무도 시끄럽게 지저귀고 있었기 때문에 수사들은 자기들의 성무일도 바치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마침내 성인은 그들에게 돌아서서 "자매들이여, 찬양받을 권리를 가지신 하느님께 우리가 찬양을 드릴 때까지 지저귀지 말아다오"라고 말하자 새들은 곧 조용해졌으며 동료들이 성무일도를 바칠 넉넉한 시간을 가지고 또 찬미를 다 바치고 난 후 프란치스코가 다시 그들에게 노래하길 허락할 때까지 그들은 그대로 있었다. 그 뒤 새들은 일상처럼 노래하기 시작했다.
프란치스코가 시에나에서 병이 나 있었을 때 어떤 귀족이 산 채로 잡은 꿩 한 마리를 그에게 보내왔다. 그 새는 프란치스코를 보고 또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