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 이런 관찰력을 양성했다면 오늘날 학교에서 불행하게 너무나 자주 만나는 섬뜩한 장면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7 - 14세를 위한 교육예술, 2022, 47)."
우리는 사회에서 끔찍하고 불행한 장면들을 가끔 만난다. 아마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더 자주 만날 것이다. 참 안타까운 일인데, 이 모두가 정신의 문제에서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신은 돌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신이 보이지 않으니까. 문제가 생기면 병원에 가서 정신에 관한 약을 처방받지만 그 약은 신경을 잠자게 할 뿐, 정신에 관한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정신은 현대과학이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해결방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인간의 발달단계에서 정신이 올바르게 발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류가 정신을 인정하지 않은지 오래되어서 그렇게 되기는 아마 어려울 것이다.
아이들이 인간의 발달단계에서 정신이 올바르게 발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학교, 나아가 사회에서도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해결방법은 되풀이하지만 정신을 올바르게 발달시키는 것뿐이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삶은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속되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8, 9세 아이에게 기억할 것을 듬뿍 주면, 50세가 되었을 때 필시 경화증으로 고생한다는 것을, 동맥경화에 걸린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위 책, 20). 8, 9 세 아이와 50세의 성인은 동일한 인물이다. 50세가 되어서 내가 '왜 동맥경화증에 걸렸을까'하고 생각해서 8, 9세 때 기억하는 것 때문에 그렇다는 사실을 알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음은 그 이유이다. 인간의 영혼은 공감과 반감활동을 호흡처럼 번갈아 한다. 두 활동은 감정을 통해서 드러나는데, 공감은 대상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감정으로 사랑이다. 반감은 대상으로 파악하는 감정으로 구역질을 할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한다. 즉 대상과 공감을 하면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고, 결과는 상상으로, 의지로 나아간다. 반감은 사고로 나아간다. 이런 감정은 무의식에서 일어나므로 의식에서 파악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인간의 무의식은 의식과 연결되어 작용하므로, 8. 9세 아이 시기에 일어난 일이 50세의 성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인간의 발달단계에 따르면 7-14세 사이 아이들은 공감활동을 많이 하는, 상상력 교육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시기 아이들은 모든 존재를 자신과 같은 존재로 생각하는 시기로, 이 시기 아이들은 모든 존재를 대상으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상력 교육을 해야 하고, 결과 아이들은 의지를 발현시킨다. 반면 기억을 할려면 먼저 대상으로 파악해야 한다. 따라서 기억을 하게 하는 교육은 사고교육이다. 결과는 아이들의 무의식에서 구역질 같은 느낌이 생기고, 이런 감정이 아이들의 몸을 경화시킨다. 당연히 사고교육은 의지를 발현시키지 못한다. 통상 우리는 이런 교육을 지식교육이라고 말한다. 더불어 말로는 지식교육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들여다 보면 거의 대부분 지식교육을 하고 있다. 인간의 발달단계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슈타이너에 따르면 기억을 많이 시키면 콩나물처럼 위로만 자라고, 상상을 많이 시키면 아이가 옆으로 뚱뚱해진다고 한다. 필자는 현장에서 두 가지 경우를 모두 경험하였다. 먼저 6학년 남자아이로 콩나물처럼 위로만 자란 아이가 있었다. 겉으로 보아도 그 차이가 드러났기에 필자가 아이에게 물었다. '집에서 영어단어를 많이 외우지 않느냐'고. 아이가 씨익 웃었지만,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 했다. 뚱뚱한 경우는 3학년 남자 아이로, 당시 필자가 공감교육 연구를 하느라고 상상력 교육을 많이 하였다. 학기 초 3월부터 시작하였는데, 7월 초 즈음 어느 날 아이를 보니 옆으로 약간 뚱뚱해져 있었다. 순간 놀라서 상상력 교육을 그만 두었는데, 만약 교사가 관찰하지 못하고 계속 같은 교육을 한다면, 아이에게 문제가 발생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교사는 아이들을 늘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교사는 아이들의 걸음걸이, 연필을 쥐는 모습, 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 등등을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돌이켜보니 필자가 현장에 나간 70년대에는 이런 관찰을 중요시하고, 또 그런 교육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런 교육은 현장에서 점점 사라지고, 모든 교육이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으로 대체되었다. 예컨대 같은 학년의 수업을 다른 반의 모든 교사들이 똑같이 하는 것이다. 같은 주제를 가지고 같은 내용으로 똑같은 수업안을 작성해서 똑같은 수업을 하면은, 교사는 자신의 창의성을 발휘할 수가 없다. 아이들에게 전달되는 것은 이런 교사의 창의성으로, 교사의 창의성 속에 아이들에게 전달되는 정신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결과 아이들은 학교에 오지만 배운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아이들의 아스트랄체가 이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때문이다.
슈타이너에 따르면 "이갈이를 할 때부터 사춘기까지 아이는 교사 내면에 오성이 지배하는지 아니면 상상력이 지배하는지 알이보는 매우 섬세한 촉각이 있습니다(위 책, 69). 이 촉각이 아스트랄체이다. 교사의 정신, 창의성이 들어있지 않은 수업을 아이들의 아스트랄체가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조야하게 말하면 현재 이루어지는 이런 교육이 정신을 배제한 교육이다.
"상상력으로 수업을 창조하기, 교사는 바로 이것을 중시하기 떄문에 반드시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위 책, 63)." 점점 갈수록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중요시하는 교육이 이루어지고, 결과 아이들의 정신은 점점 더 망가져서 학교에서나 사회에서나 끔찍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아이들은, 지식은 구글과 같은 검색엔진으로 충분히 배울 수가 있는데, 학교에 올 필요가 없다고도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자신의 정신을 온전하게 발달시키는 교육을 찾아서 헤맬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본성이 요구하는 교육, 인간의 본성에 맞게 수업하고 교육을 해야 한다. 여기에서 반드시 함께 해야 하는 교육이 도덕적 자질과 관련한 교육이다. 정신이 발달하는데에는 도덕이 필수적으로 동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인간이 삶을 살기 위해서 정신의 발달이 꼭 필요하다면 두 가지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는 인간의 발달단계에 맞는 교육, 둘째는 도덕적 자질을 갖추는 교육이다.
여담으로 필자도 학교에서 도덕 교육을 받을 때 사랑이 중요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런 교육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부모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건 이해가 되는데, 이건 부모님을 통해서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정신은 경험한 것만 이해하고 전달한다. 물론 정신의 속성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나아가 그렇게 해야 앞으로의 삶이 나아지고 발달한다는 것 역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는 이해 관계가 얽혀 있는데, 그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정신을 공부해 보니, 정신이 발달하는 전제 조건이 바로 모든 존재를 나와 같은 존재로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정신의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파악한 것이다.
필자는 학창시절 공부를 할 때 공부를 잘하는 방법을 여러가지로 탐구했는데 알지 못했다. 그런데 역시 정신을 공부해 보니, 공부를 잘하는 방법이 정신이 발달하는 것이고, 정신의 발달은 모든 존재를 나와 같은 존재로 사랑하는 것이다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아이들도 지식으로 사랑하라고 가르칠 것이 아니라, 사랑을 전달해야 아이들이 받아들인다. 이런 사랑은 무의식으로 전달되고 무의식에 저장되기 때문에 의식으로는 파악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겉으로 보이는 교육을 지금처럼 발전시켜보았자 점점 더 아이들의 정신발달과는 멀어질 것이다. 하지만 좋은 소식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정신은 인간이라면 반드시 발달시켜야 하고 그렇게 발달시키면, 발달된 정신이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정신을 발달시키는 일이 자신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중요한 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