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 순수하게 정신적인 것이 육체활동에 반드시 개입하도록 되어 있습니다(인간에 대한 앎에서 나오는 수업과 교육, 2024, 250)."
필자는 보이지 않는 인간의 정신이 어디에, 어떻게 개입하는지가 늘 궁금했다. 만약 알면 정신을 발전시키거나 올바르게 활용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하는 사고활동 대부분은 정신의 개입으로 이루어진다. 즉 내가 사고함으로써 나는 나의 정신을 활용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 사고활동이 상이기 떄문에 대부분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정신을 파악해셔, 요컨대 '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바로 말해서 정신이 육체활동에 어떻게 개입하는 지가 질문이다.
다음은 여담으로 필자의 경험이다. 현장에서 만난 6학년 남자아이인데, 이문열 작가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주인공 엄석대와 상통하는 점이 있다. 다른 점은 반 아이들이 거의 따르지 않는다는 점이고, 같은 점은 아이가 엄석대처럼 되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엄석대처럼 큰 덩치로, 힘으로 아이들을 협박했지만, 아이들은 쉽게 휘둘리지 않았다. 아이들은 다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을 뿐이다.
필자는 아이를 5학년 때 도덕 전담교사로 만났는데, 아이가 수업이 하기 싫은 경우, 대부분 수업시간이 그랬지만, 아이는 책상을 흔들고 소리를 지르며 막무가내로 수업을 방해했다. 담임 선생님은 물론이고, 모든 선생님이 고개를 흔들었는데, 당시는 아이들의 인권이 문제가 된 시기라서 거의 방치하다시피 되었다. 같은 반 아이들의 학습권이 심각하게 침해된 것은 물론이다. 필자는 내색하지 않고 아이를 안정시킬려고 노력했고, 1 년동안 책과 공책은 거의 가지고 오지 않았지만, 어떤 지적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아이는 필자를 공격하지 않았고, 무사히 1 년을 보내고 6학년이 되었다
아이가 새로운 6학년 담임선생님과 적응이 안되었는지, 처음에는 필자에게 담임선생님을 고자질하는 등 필자에게 오히려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런 경우에 필자는 아이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고 모른 척했다. 이것이 문제인 듯, 시간이 흐르자 아이는 필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필자가 짐작하건대 담임 선생님이 아이의 요구를 수용해 준 모양이다. 필자의 시간에도 아이는 동영상, 수업주제와 상관없는 동영상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였지만, 필자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필자는 들어주지 않는데 담임 선생님은 들어주니, 그 화살이 필자에게 향한 것이었다. 아이는 일부러 필자의 수업시간에 고함을 지르고 반 아이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 필자의 정신을 움직인 듯, 정신은 고통스러우면 그 모습을 드러내어서 답을 준다. 이것이 과거 고행을 통하여 정신 수련을 한, 고행주의이다.
다음은 그 과정이다. 필자가 어느 날 길을 가는데 아이의 형을 보았다. 아이의 형이라고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보는 순간 형임을 직감했다. 눈은 마치 먹이를 낚아채기 위하여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삼하게 말하면 뱀의 눈의 기운과 비슷했다. 그리고 무엇이라도 움켜질 때의 자세, 구부정하게 어깨가 앞으로 숙여졌고, 팔은 거기에서 금방이라도 같이 움직일 듯한 자세를 지녔다. 나아가 아이의 형은 잠시라도 주위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전신으로 쉴새 없이 두리번 거렸다. 당시 필자가 주위 선생님에게 듣기에 아이에게 물건을 훔치는 등 비행을 저지르는 형이 하나 있는데, 아이를 심하게 닦달을 한다는 것이다. 필자가 짐작하기에 아이의 에너지가 형의 에너지와 거의 같았다. 형의 씨앗이 아이에게 뿌려저 싹이 트는 듯도 보였다. 이것은 겉 모습이고 형의 정신의 움직임도 드러났는데,
정신이 어떤 흐름을 오래 계속하면, 그 흐름이 그대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정신은 정신과학적 요소의 흐름으로, 정신이 일정하게 흐르면 그 흐름이 일정한 흐름을 갖기 떄문이다. 이렇게 정신이 계속 같은 방향으로 흐르면 습관이 된다. 습관은 에테르체의 흐름이 지속되어서 만들어지는데, 이것을 우리는 '카르마'라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인간의 아스트랄체는 감정체로 영혼의 바탕체이다. 우리가 말하는 감정, 예컨대 기쁨, 슬픔, 분노, 욕망, 등등이 영혼의 바탕이 되어서 영혼이 움직일 때마다 그 감정이 영혼에게 영향을 미친다. 아이가 어떤 물건에 호기심을 느끼고 그 물건을 가질려고 하면 아이의 의지가 발현된다. 호기심은 아스트랄체의 감정이고, 여기서 나아가 의지가 발현되면, 그때 정신이 개입한다. 정신의 개입이란 '나'가 개입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아이가 물건을 훔칠 경우 아이의 '나'가 개압하고, 그렇게 정신이 계속 흐를 경우, 그 흐름이 굳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스트랄체의 의지가 발현되면 '나'는 에테르체 안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에테르체도 같이 흐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계속 흐르면 에테르체에 각인되어서 정신의 흐름이 저절로 그렇게 흐른다. 정신의 흐름이 이렇게 만들어지면, 그 흐름이 되돌려지기는 굉장히 어렵다. 왜냐하면 첫째, 정신의 흐름이 보이지 않아서 그 흐름을 인지하지 못하고 둘째, 정신의 흐름이 만들어지면 거의 저절로 그렇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행동해도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 늦잠을 자는 경우, 습관이 되면 일찍 일어나기가 어려운 것과 같다. 아마도 더 큰 사건, 사람을 죽이는 경우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에테르체에 까지 정신의 흐름이 만들어지면 물질체인 육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앞에서 말한대로 아이의 눈이 저절로 두리번 거리게 되고, 어깨는 구부정하게 팔 역시 준비된 자세가 된다. 왜냐하면 물건을 훔칠 경우 언제나 주위를 살펴야 하고 발각되면 빠르게 그 곳을 벗어나거나, 본 사람을 해쳐야 하기 떄문이다. 이런 상황을 온 몸으로 늘 주위를 살폈으므로 육체도 그렇게 변화하는 것이다.
요컨대 인간이 의지를 낼 때 인간의 정신이 개입한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정신을 발현시킬려면 스스로 의지를 내어야 한다. 어떤 일을 할 때에 그 일의 성과를 내고 싶으면 정신이 반드시 개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스스로 의지를 내어야 성과가 난다. 문제는 이렇게 이론적으로 알아도 정신은 경험해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도에 포기해서 그만 두는 경우가 많지만, 꾸준히 노력하고 인내하면 반드시 그 결과가 있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고 노력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필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위의 여담도 아이의 형을 본 것은 현장에서 근무하던 때이다. 당시 필자가 아이의 형을 만났지만, 이렇게 자세하게 파악하지는 못했다. 영혼은 어떤 것이라도 절대 놓치지 않고 기억하므로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파악할 수준이 되면 그 답을 알려주는 것이 정신이다.
늘 되풀이 하지만 정신이 물질을 안내해서 이끈다. 아이 형의 아스트랄체가 호기심을 내었고, 의지를 발현시켜서 '나'가 개입을 하였다. 이런 흐름이 에테르체에 각인되고, 나아가 육체까지 변화시켰다. 특히 도벽은 아스트랄체가 온전하게 발달하지 못했기 떄문이라는 것이 슈타이너의 주장이다. 아스트랄체가 호기심을 내더라도 아스트랄체가 온전하게 발달했다면, 의지로까지 내려가지 않기 떄문이다.
아이의 이런 예후를 미리 발견할 수도 있다. 아이가 어릴 떄(5세-6세무렵인 듯) 어떤 물건에 대해서 집착하는 경우라면 잘 살펴보아야 한다. 또 아스트랄체가 손끝, 발끝까지 스며들어서 손끝, 발끝이 예민해진다고도 한다. 이런 경우에 도벽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어서 아이가 다른 사람 물건에 대해서 이해하도록 한다면 도벽을 고칠 수가 있다. 하지만 시기가 지나, 사춘기가 되어서 아스트랄체가 탄생하면 고치기 어렵다는 것 또한 슈타이너의 주장이다. 만약 아이의 형이 이렇게 교육을 받았다면, 아스트랄체가 의지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각하면 아이도, 아이의 형도 안타깝다.
요컨대 이런 징후가 발견되면 고칠 수있는 시기가 에테르체가 탄생하는 7- 14 세 사이이다. 그리고 12-14세 사이, 사춘기 시기에 아스트랄체가 탄생하면 늦다. 이렇게 인간의 발달단계란 인간의 정신이 발달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올바르게 교육을 한다면, 아이들이 지금보다는 훨씬 더 행복한 삶을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