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16일 동녘교회 주일예배 - YouTube
무화과나무 비유 누가복음 13장6-9절
오늘 함께 읽은 비유 이야기에는 무화과 나무가 등장을 합니다. 일반적인 상식대로라면 본문에는 포도나무가 등장을 해야합니다. 포도원에 포도 나무를 심었는데 열매가 없다 열매를 맺어라 이게 정상입니다. 사과 농장에는 사과가 있는 게 상식이고 배농장에는 배나무를 심는게 일반적인 예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오늘의 비유 이야기는 매우 생뚱맞습니다. 예수님은 포도원에 포도나무를 등장시키지 않고 무화과 나무를 등장시켰을까요?
무화과나무에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나무들 중의 하나입니다. 더더욱 무화과나무는 올리브, 포도 나무와 함께 성경에 등장하는 3대 나무중의 하나입니다. 창세기 아담과 하와와 먹지 말라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는 자신들이 벌거벗은 것을 알고는 나뭇잎으로 몸을 가립니다. 그때 그 잎이 무화과나무잎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무화과 나무는 생명나무 에덴의 나무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 성전을 무화과 나무에 비유하십니다. 신정국가의 종교적 상징을 의미하는 예루살렘 성전, 이게 이스라엘사람들이 무화과 나무를 말했을 때 떠올리는 이미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포도원에 심은 무화과나무, 그리고 그 열매를 말씀하셨을 때의 의미는 특별합니다. 우리 삶에는 수없이 많은 열매들이 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좋은 집을 장만하는 것이 보여지는 열매일수도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번듯한 책 한 권을 내는 것이 귀한 열매로 여겨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돈을 좀 살만하게 벌어 여유있게 사는 것이 열매있는 삶이라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잘 승진을 해서 자신이 만족할 만한 어떤 위치에 올라가는 것이 열매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럼 우리 사회에서 중산층 쯤 되면 열매있는 삶인가요? 우리나라의 중산층의 기준은 부채없는 아파트 30평 이상, 월급여 500만원 이상, 자동차 2,000CC급 중형차 소유, 예금액 잔고 1억원 이상, 해외여행 1년에 1번 이상입니다. 어느 것 하나 해당되는 것이 없네요. 그럼 저는 불행한가요, 열매없는 삶인가요? 그런데 다른 나라의 중산층 기준을 보니까 좀 달라요.
프랑스 외국어 하나 정도 할 수 있어야 하고,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있어야 하고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어야 하며, 남들과 다른 요리를 만들 수 있어야 하며 공분에 의연히 대처하고 약자를 도우며 봉사활동을 꾸준히 할 것
미국 자신의 주장에 떳떳하며 사회적인 약자를 돕고 부정과 불법에 저항하는 것 정기 구독하는 비평지가 있을 것
영국 페어 플레이를 할 것,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질 것, 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 대응할 것, 독선적으로 행동하지 말 것, 불의와 불법에 의연히 대처할 것
제가 생각하는 중산층은 하루 한 끼 먹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하고, 지나가다가 멈춰 길가에 핀 꽃 한송이 볼 여유가 있고, 도넛 하나에도 행복한 미소를 환히 지을 수 있고, 사회를 건강하게 하는 단체에 소액이라도 후원하며 살 수 있고, 낯선 사람에게도 부드러운 관심과 친절을 베풀 줄 아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면 중산층인데 이정도면 열매있는 삶인가요? 답은 없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에덴때부터 있었던 생명을 비로소 생명되게 하는 나무를 등장시키며 삶의 가장 근본에 가까운 것들에 대한 열매맺는 삶을 말씀하시고 계시거든요? 적어도 이런 건 아니죠.
미국에 있을 때 두시간 차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몬트레이라는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가 있는데 서부 바닷가 해안으로 그곳 안에 있는 집은 바닷가를 개인으로 소유하고 있는 집들입니다. 당시 몇백만불씩 하던 집들이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에 그곳에 집을 두고 있던 교인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한분이 유명한 세계적인 골프장이 있는 페블비치 안에서 세탁소를 하는 사람이었어요. 세탁소도 어디에서 하느냐가 중요해요. 그런데 그분은 그 17마일 드라이브코스라는 곳 안에 집이 있었는데 그분도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더라구요. 자기는 그곳이 자기가 사는 집이잖아요. 그런데 그분은 그런 곳을 썸머 하우스로 가지고 사는 사람을 부러워하더라구요. 이 사람은 돈이라면 비교되지 않을 만큼 엄청나게 번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스스로 자족되지 않고 누군가를 부러워하며 살아요. 올라가도 올라가도 벌어도 벌어도 뭔가가 채워지지 않는 삶을 열매있는 삶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있어요. 엇그제 영화 <곰마워>를 지역 주민들과 함께 공동체 상영을 했습니다. 사육곰 22마리를 미국의 생츄어리로 옮겨 자연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준 <사육곰 해방일지>를 다룬 다큐영화입니다. 매우 감동적이었던 건 뜬장에 갇혀서 평생을 뜬장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이 얼마나 많아요. 지구 밖에서 외계인이 왔는데 우리 인간들이 키우기 아주 재미있는 물건들인 거예요. 그래서 저나 여러분들을 몇 명을 잡아가서는 두평남짓한 뜬장에 가두어 두고는 평생을 먹이를 줘가면서 대소변으로 냄새나고 더럽혀지고 한겨울 칼바람이 이는 곳에 두고는 자기들 보고 싶을때만 간간히 와서 보고 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현인류가 매우 야만적인 일들을 동물들에게 하고 있는 것인데 그 동물들을 보면서 소유권도 있고 법도 함부로 이동을 못시키는 상황에서 그 아이들을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일들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어요. 어렵고 어렵게 그 일을 해내고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 더 이상의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은 거죠. 누군가에게 준 자유로 인하여 깊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그것만으로도 삶은 충분하고 충만하고 어떤 아쉬움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열매맺는 삶이라는 게 어떤 눈에 보이는 어떤 열매를 거둔 것에 흡족해 하고 대견해하고 기뻐하고 춤추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사랑이나 나눔이나 관계안에서 누리는 충만한 삶의 경지를 말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맥주 한 캔에도 그렇게 충만함을 느끼고 필요하면 언제든지 떠난 준비가 되어 있고 또 필요하면 언제든지 일할 준비가 되어 있고, 오는 사람막지 않고 가는 사람잡지 않는데 그냥 나와 관계 맺은 사람들 한사람 한사람과 충만한 삶을 살아가고 싶어 정성드려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이것뿐>그런 심정으로 손수 차린 밥한끼 나누며 매순간의 삶을 애정과 마음을 담아 충만히 살아가는 사람이 있어요. 포도원은 우리의 삶, 일터, 평범한 일상이라면 그안에 무화과나무를 심어 열매를 맺으라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평범한 일상 한가운데 가장 생명을 생명답게 충만하게 하는 일상을 만들어가라는 의미가 아닐까...
또다른 의미도 있습니다. 유대율법에 의하면 씨를 섞지 않아야합니다. 나무를 섞지 않아야 합니다. 유대전통은 순수하고 순결한 전통입니다. 섞인 것은 뭔가 불결하고 불편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들보다 더 격멸하고 멸시했습니다. 그들은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을 할 때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앗시리아가 북이스라엘에 이주해와서 민족혼혈정책을 씁니다. 그래서 피가 섞입니다. 그래서 더 불결하고 죄된 존재로 여겼습니다.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는 매우 불편하고 불결한 존재입니다. 포도원을 더럽히는 부정한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게다가 열매도 맺지를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포도원의 가장 쓸모없는 골칫거리입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율법이 금하는 이종교배를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무화과나무는 실제 무능하고, 게으르고, 모나고, 부족한 어떤 존재들을 상징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소위 가진자들이 권력자들이 통치 질서로 만들어놓은 기준안에서 게으르게 보이고 모나보이고 무능해 보이는 낙인찍은 무리들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경계를 허물고 계십니다. 그런 존재들과의 공존과 동행의 삶을 모색하십니다. 심지어 인내와 기다림도 요구하고 있습니다. 찍어없애버리라고 포도원 주인은 닦달하지만 포도원지기, 포도원을 손수 가꾸는 포도원지기는 주인님 기회를 주십시오. 주인님 기회를 주십시오.
산황산을 골프장으로부터 지키는 싸움을 하면서 사실 민주당 정권에 적지 않은 기대를 했습니다. 물론 앞으로 어떻게 이 국면이 바뀔지 모르지만 정작 산황산을 골프장으로부터 지켜준 건 사람취급도 하지 않던 <국힘 정권>안에서 였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선함 속에도 고집과 아집과 악함과 가식이 있고 우리가 생각하는 악함 속에서도 때로 진정성이 있고 새로움이 있고 유연성이 있습니다. 힘과 권력과 돈이 절대 진리인 사회에서는 힘없고 가난한 것 자체가 죄로 여겨집니다. 오히려 보편적 선으로 드러나는 소박한 진실과 삶의 작은 아름다움을 지키는 사람들이 바보이고 천치고 부정하고 불편한 사회악과 같은 존재로 여기지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경계를 허물고 모든 생명의 공존을 허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제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낙인찍은 가난하고 힘없고 병든 사람들은 벌 받은게 아니죠. 사회 악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도자들이 만들어 놓은 체제의 희생자들이죠. 그것을 지적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면서도 제자들에게도 같은 예기를 하는 겁니다. 함부로 낙인찍지 말라는 것입니다.
<위대한 작은 농장>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는 수만평의 땅에 모든 생명이 공존하는 공존시스템을 실험한 영화입니다. 다양한 동물 맹수 그리고 곤충 달팽이 나무와 식물까지 개체수를 조정하면서 공존을 만들어가는 다큐입니다. 그 영화에 보면 그 농장에서는 잡초도 함께 키웁니다. 도시에서는 잡초가 쓸모없다고 해서 다 제초제를 써가면서 죽이지만 적당한 크기로 식물보다 작은 사이즈로 죽이지 않고 키웁니다. 실험한 한지 몇해째 어머어마한 폭우가 장기간 내립니다. 그 농장 주변의 모든 땅들이 빗물과 폭우에 슬려내려가고 그러면서 나무들도 뽑히고 농업자체가 완전히 폭망합니다. 그런데 그 농장은 아무리 많은 비에도 그 모든 비를 흡수하고 지하에 저장하고 오히려 더 농장이 초록초록해집니다. 우리 눈에 쓸모없고 필요없다 여기지는 것들도 어쩌면 우리의 쓸모를 만족시켜주지 못할 뿐이지 존재자체로써의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인내하고 기다리고 함께 공존을 꿈꾸면서 저마다의 충만한 삶에 충실해보자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시인 박노해씨는 “나는 이 지상에 잠시 천막을 친 자 초원의 꽃처럼 남김없이 피고 지고 자신을 다 사르며 온전히 살아가기를” 포도원이라는 삶의 일상에서 나무를 골라내는 에너지를 쓸 것이 아니라 저마다 충만한 삶을 살아내는데 에너지를 쏟아내자고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한주간도 그런 삶의 충만함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