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499) 아끼지 말고 꺼내세요 1 - ③ 호―시: 시를 선물하는 일에 대하여/ 시인 김복희
아끼지 말고 꺼내세요 1
네이버블로그/ 시를 쓰고 싶으시다고요 /김복희
③ 호―시: 시를 선물하는 일에 대하여
“사람도 다시 꽃처럼 돌아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2020)에 나온 시다.
주인공 찬실이 세 들어 사는 집주인 ‘할머니(윤여정 분)’가 문화센터에서 한글을 배우다가, 숙제로 쓴 것이다.
제목도 없고, 한글맞춤법도 엉망―
화면에는 “사라도 꼬처럼 다시 도라오며능 어머나 조케씀미까”가 적힌 노트가 클로즈업된다―이라서 찬실은 이게 뭐냐며,
하나도 모르겠다며 다소 퉁명스레 말하지만, 조심스럽게 할머니가 쓴 시 노트를 내려놓으며 눈시울을 붉힌다.
할머니는 계속 자신이 “틀렸냐”고 묻는다.
시는 누가 쓰는 것일까?
시는 왜 쓰는 것일까?
시는 어떻게 쓰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평소에 자주 하진 않는다.
그렇지만 저런 장면 덕분에 돌연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영화 〈시〉(2010)에서도 주인공 ‘양미자(윤정희 분)’가 문화센터를 다니며
한 편의 시(「아네스를 위한 노래」)를 완성해나가는 나날들이 등장한다.
영화의 내용도 느낌도, 영화가 만들어진 시기도, 시를 쓰는 두 사람의 상황도 많이 다르지만,
나는 단 한 편의 시가 완성되는 그 장면들로, 저 질문들을 받아 생각해 본다.
시 창작 교실에는 누가 오는가?
시 창작 교실에서 창작되는 시들은 어떤 것들인가?
그래서 불특정 다수를 대상―거의 성인―으로 시 창작 강의를 꾸리기 위해, 강의안을 준비하고 나서, 강의를 하러 가는 첫날,
긴장 속에서 저 장면들을 파편적으로 떠올리곤 한다.
시 창작 교실을 말 그대로 시 창작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쩐지 좀,
사실이긴 하지만 반칙처럼 느껴진다.
시를 한 번도 써보지 않고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시 창작이란 무엇처럼 느껴질까.
이 질문을 거친 후 교실로 들어가야 할 것도 같다.
교과과정이 명확하게 정량화되어 있지 않으므로,
강의계획서를 봐도 ‘마음을 쓰는 법’이라든지,
‘일상을 관찰하는 법’이라든지 하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서술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도대체, 마음은 뭔지,
일상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생각을 시작해버리는 나 같은 사람의 머리는 터질 지경이 된다.
여하간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시 창작 교실을 정의하기란 조금 어렵다.
결과물도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한 장, 혹은 두어 장의 종이가 전부니까.
순전히 강사의 취향과 기질과 건강 상태와 수강생들의 기질과 서로 간의 대화,
써온 글이 어울려 발생하는 것이 시 창작 교실이다.
책상과 의자가 없어도 시 창작 교실은 가능하다. 다만 어떤 일도 반복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최소한 내가 경험한 시 창작 교실은 그랬다.
첫 시집을 낸 후,
시 창작 강의를 종종 진행해왔다.
많은 수업이 기억에 남지만, 코로나19가 지금처럼 극성을 부리기 전 2020년경 선물할 수 있는 시를 쓰자는 수업을 개설해,
혜화의 시집서점 위트 앤 시니컬에서 3회 가량 진행한 수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 수업은 대상을 특정하여, 그 대상에게 선물할 딱 한 편의 시 완성하기가 목표였다.
나는 그들에게 자신이 가진 가장 귀한 것을 아끼지 말고 선물 받을 사람을 위해 내보이라고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할 건데, 아무것이나 줄 수 있겠느냐고,
비싸고 사치스러운 것은 못 해주어도 최소한 그 사람이 좋아할 만한 것,
혹은 그 사람만을 외한 맞춤한 것을 궁리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사람에게 가장 값진 것은 시간이니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시간을 아낌없이 정말로,
아낌없이 쓰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결혼을 축하하는 시, 생일을 축하하는 시,
엄마를 위한 시, 아빠를 위한 시, 동생을, 형을, 언니를 위한 시, 친구를 위한 시, 자기 자신을 위한 시,
요컨대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好)을 담아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자고(呼)
그 시가 서로의 마음에 퍼지도록(護) 하자고
수업 이름을 ‘호―시’라고 지었다.
나는 그 수업의 첫 시간마다 선물하는 좋은 시의 예로,
황인숙 시인의 시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를 소개했다.
한밤에 좋아하는 사람에게 말을 걸고 싶은데,
이 한밤에 내 소중한 이가 잠들어 있을지도 몰라 갑자기 뛰어갈 수도 없는데,
설령 그이에게 뛰어가더라도 그 곤하고 달콤한 잠을 깨우고 싶지는 않은데,
이봐요, 내가 당신을 이렇게 많이 생각하고 있어서, 무엇을 봐도 당신이 떠올라요,
이렇게 막 고백이라도 하고 싶은 참인데,
비가 와서 드디어 말할 것이 생겨―당신이 비 때문에 깨어준다면 왠지 핑곗거리가 생겨 더 좋고―얼마나 반갑고 좋을까,
그런 마음으로 시를 써보자 권하려고.
돌아올 수 없고, 돌이킬 수 없지만, 무엇이든 다 공유하고 싶고,
무엇이든 좋은 것을 주고 싶어 모든 감각이 예민하게 빛나던 시절,
그 시절을 고스란히 주고 싶은 마음을 담아서.
수업에 온 이들은 거의 시를 처음 써본 이들이었는데,
시쓰기를 낯설어하면서도 무척 행복해하는 듯 보였다.
그중에 한 이가 수업이 끝나고 했던 말을 지금 적는다.
그이는 시를 쓰며 친구에게 하고 싶은 말을,
그토록 정리가 되지 않아 오래 마음에 두던 것을 시로 만들어볼 수 있어서 뜻깊고 좋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그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한 시절에 대해 썼다.
쓴 시를 아마 당장 전해주지는 못할 것 같지만, 언젠가는 꼭 전해주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이가 그 시간에 쓴 시를 친구에게 줄 수 있기를 바라지만,
혹시라도 그 시를 영영 그 친구에게 줄 수 없더라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기적이게도 그이가 그 시를 쓰고 있는 동안 내가 그 과정에 참여할 수 있어서,
그이의 마음이 시가 되는 시간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어서 감사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이가 그 시를 쓰는 동안 아주 많은 시간을 자신도 모르게 사용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고,
한편으로 그이의 인생이 그 시 한 편으로 인해 획기적으로 변하진 않겠지만,
그이에게 아주 미미한 영향을 지속적으로 미쳤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빌어두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양미자가 쓴 「아네스를 위한 노래」가 아네스에게 닿을지 닿지 않을지 우리는 모르고,
할머니가 쓴 ‘꽃처럼 사람이 돌아오기를’이라는 말이 할머니의 죽은 딸에게 하는 말인지 아닌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시를 쓰기 위해 연필을 꼭 쥔 그들의 손마디 같은 것은 정말 아름답지 않은지.
시를 선물하기 위해 왔던 그들의 빛나고 아름다운 시절이 한 편의 시가 되었고,
그 과정을 지켜보던 내게 남았기 때문에 이 기억과 감정의 연쇄작용이 끝나지 않으리라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뭔가를 남기려고 시를 쓰는 건 아니다.
불행한 시간이 내게 고통으로만 채워져 있지 않듯이,
행복한 시간도 내내 기쁨으로만 채워져 있지는 않다.
속절없이 살며, 살아낸 시간을 시로 쓸 뿐이리라.
인생의 꽃같이 아름다운 시절이 그 쓰는 시간에 있으리라 나는 주장하고 싶다.
< ‘시를 쓰고 싶으시다고요, 김복희 산문집(김복희, 달 출판사, 2023.)’에서 옮겨 적음. (2023. 12.20.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499) 아끼지 말고 꺼내세요 1 - ③ 호―시: 시를 선물하는 일에 대하여/ 시인 김복희|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