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거지 아저씨를 위하여
강병철(대산고등학교)
옥이누나는 부뚜막 위에 짠지 하나만 달랑 올려놓고 ‘바가지 밥(플라스틱이 아닌 진짜 바가지)’을 비벼먹었다. 아버지가 ‘안방에서 함께 먹자’며 소매를 끌면 마지못해 문 쪽 모퉁이에 웅크려 앉기도 했지만 틈나는 대로 아궁이 밥상으로 되돌아가곤 했으니, 남의잡살이 ‘계급의 벽’이 가장 큰 이유였으리라. 초겨울 토방에서 숟가락에 겟국지 한 조각 올려놓을 때는 나도 한 입 얻어먹으려 그미의 손길을 기다렸었다. 따악 벌린 입술로 초겨울 햇살이 쏟아지면 헛배의 포만감이 싸-하게 밀려왔다.
숭늉을 가지러 부엌에 가면, 누나는 곁불 옆에서 내가 빌려준 책들을 읽다가 물솥 뒤로 슬쩍 밀어놓기도 했다. 3학년인 내가 먼저 읽은 책들도 있었지만 수준 높은 책도 있었던 것 같다. ‘플란더스의 개’나 ‘허클베리의 모험’ 따위의 제목을 손으로 덮은 다음 아인슈타인이나 파브르 곤충기, 더러는 생뚱맞게 혼자 ‘우주선 발사원리’를 따져보던 누이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곤 했다. 누룽지 뭉치를 슬그머니 쥐어주기도 하던 그미는 꽃봉오리 열네 살이었다.
감나무 아래로 눈보라 이빨 와르르 쏟아지던 초저녁,
부지깽이 헤칠 때마다 아궁이로 시뻘건 열기가 넘치던 저물녘이었던가. 내가 딱 한번 설거지판에 끼어들기 위해 소매를 걷었으나 그미가 한사코 밀어내며 아궁이 앞에 앉히려는 와중에 봉긋한 가슴이 닿아 나 혼자 저녁놀처럼 달아오르기도 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사내는 부엌에 얼씬대는 게 아냐. 구질구질 설거지통은 여자들이 치우는 거거덩. 그 중에서 하찮은 부엌데기들만 닦고 문지르는 데여.”
무심히 마주친 눈빛이 쓸쓸히 꼬리를 내렸다. 나는 동화책 등장인물 이름을 좔좔잘 외우는 옥이누나를 한때 누이를 ‘숨겨진 천재’로 미운 오리 새끼 청사진을 꾸며보기도 했으나, 그뿐이었다. 초로로 이어질 때까지 너무 평범한 ‘여자의 일생’으로 살아간다는 당연한 현실이 놀랍고 안타까웠다.
5학년 실과 시간 뻐꾸기 우는 늦은 봄.
처음으로 ‘밥 해먹기 실습’을 했다. 집에서 각자 쌀 한 주먹씩 퍼 왔는데 품팔이집 민구는 보리 한 주먹으로 대신했고 겉보리 한 홉도 없는 재순이는 솔방울 한 메꾸리를 이고 와서 땔감으로 내놓았다. 어디서 구했을까, 성안벌 미자누나가 양푼 채 이고 온 깍두기를 쟁여놓고 여섯 조(組)의 솥단지에 열 명씩 묶어주었다. 우리 조(組)는 사철나무 울타리 하수구에 솥단지를 부쳤는데 배관 저쪽 신작로 방향으로 빠져나가는 연기가 마치 흥부네 굴뚝처럼 아늑했던 것 같다. 여자 애들이 주축이 되어 쌀을 안치는 동안 사내들은 삭정이를 모으며 시간을 때우다가 설거지 담당으로 오그르르 분류되었다.
“아! “개미가 밥 짓는다.”
전교 꼴찌 부진아 덕규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뜨락에는 개미떼들이 흘린 밥풀을 물고가느라 낑낑 매는 중이었다.
‘언젠가는 저렇게 밥을 낑낑 지고 가는 날이 오겠구나. 그게 어른이 되는 건가?’
나 혼자 그런 설렘으로 두근거렸던 것 같다. 그랬다. 개미떼들은 밥풀뿐만 아니라 아카시아 꽃잎까지 송판 나르듯 낑낑 메고 갔고 나중에는 젓가락 두께의 지렁이까지 합동으로 달려들어 차곡차곡 축재하는 중이었다. ‘힘을 합치면 덩치 큰 놈도 먹잇감으로 끌고갈 수 있구나’ 각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
“개미는 설거지 안 한다. 우헤헤.”
나도 덕규처럼 우헤헤 웃으며 꽃이파리 떨어진 개복숭아 나무를 보았던 것 같다. 지리한 신록이 펼쳐진 오뉴월 땡볕.
그리고 예순세 명 급우가 포만감으로 오후의 식곤에 빠졌던 것 같다.
그 시대 하절기에는 점심 이후 한 시간씩 재우는 오침 시간이 있었는데 여자애들은 교실 바닥이나 책상 위에 누웠고 사내들은 복도에 자리잡아 반대편으로 머리를 눕혔다. 꿈나라에 빠지던 때국물 수면 풍경이 아직도 그림처럼 아늑하다.
아버지가 일찌감치 서울 유학을 시도하는 바람에.
귀한 집 도령처럼 살던 나의 유년은 6학년부터 종을 쳤다. 북아현동 비탈길 자취방에서 수시로 설거지 담당이 되었고 중학생 누나가 야간자습으로 늦을 때는 직접 독상을 차려 혼잣밥을 먹기도 했다. 아침 식기를 이불 속에 묻어놓고 등굣길 서두르면 저물녘까지 온기가 남아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밥은 진흙처럼 뭉쳐있었지만 따뜻한 온기를 꺼낸다는 안도감으로 식기 뚜껑을 볼에 비볐다가 무르팍으로 옮겨 비비며 냉기를 버텨냈다. 어머니가 끌고 오신 밑반찬이 바닥나면 단무지 하나로 때우는 게 익숙해졌는데 그마저 떨어지면 깨소금에 비벼먹었고 나중에는 그냥 맨소금만 조금씩 뿌려가며 비벼먹기도 했다.
설거지가 엄청 힘들었던 건 아니다. 아침 양은솥에 밥그릇을 집어넣고 등굣길에 나섰다가 저물녘 하굣길에 뚜껑을 열면 온종일 연탄불에 데워진 밥풀떼기들이 솥뚜껑 너머로 흐물흐물 빠져나가는 걸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어느 겨울, 갑자기 상경하신 어머니가 너무 슬픈 표정을 짓기 전에, 내가 먼저.
“손 시리지 않아. 솥에서 꺼내기만 하면 밥풀 더께가 스르르 빠져 나가거덩. 연탄가스만 안마시면 폭풍한설도 견딜 수 있어.”
먼저 선수를 쳐서 안심시키기는 효심도 발휘했다. 그 유년의 자취생 경험은 모눈종이처럼 빡빡한 자본주의 터널을 헤쳐가는 에너지로 오래도록 단련되기도 했지만.
“사내아이가 왜 설거지를 해. 우낀다.”
우연히 마주친 골목길 처녀 선생님의 한 마디에 화들짝 놀랐다. 이상하다. 무심히 던진 한 마디에 수직으로 세워졌던 몸이 수평으로 쓰러지는 것이다. 호수처럼 반짝이는 나의 수호천사 선생님 뺀니 바른 입술에서 그런 강팍한 언어가 터질 줄은 손톱만큼도 예상하지 못했다. 동시에.
‘사내가 설거지 하는 것은 부끄러운 거구나’
처음으로 곱씹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후로도 10년이 넘도록 자취 생활에 이력이 붙었고.
군대의 보직도 하필 취사병이었니, 그 업보가 좋은 점도 있었다.
600명 사병의 주린 곱창 채워주는 ‘752 주특기’,
그 보직은 70년대 허기진 막사의 고단함을 단칼에 해결시켜 주었으며 훈련이나 추위를 막아주는 방패막이 되었다. 그랬다. 취사장 조리작업은 단순하면서도 스케일이 컸다. 일단 칼도마 앞에 서면 어떤 요리에도 겁을 먹지 않는 게 주방장 기본 수칙이다. 던져진 재료가 도마 위로 던져지는 순간 무엇이든 걸맞은 명칭 부여가 되는 동시에 감춰진 속맛을 우려내는 것이다.
무수에 된장을 넣으면 ‘무국’이 되었고 먹다 남은 솥에 두부를 섞으면 ‘무두부국’으로 변신했으며 다시 돼지고기를 넣고 푹신 끓이면 ‘돼지고기 무두부찌개’가 되었다. 마찬가지였다. 배추에 된장을 넣으면 ‘배춧국’이 되었고 두부를 섞으면 ‘배추두부국’으로 변신했으며 거기에 닭고기를 투입해서 활활 조리면 ‘닭고기배추조림’이 되었다. 맹물에 간장을 넣으면 간이 배었고 고춧가루를 쏟으면 매운내가 후끈 솟구쳤으며 한여름에는 냉미역국에 식초를 넣어 신맛으로 병사들의 더위를 식혀주는 주방 마법도 터득했다. 그러나 요리보다 훨씬 지겨운 게 설거지였다.
취사병의 작업 종류와 복장까지 계급 질서였는데.
그건 고참이 될수록 주방장 옷차림과 멀어지는 순서였다. 우선 이등병은 완전 요리사의 취사모와 고무장갑, 장화 차림으로(이 복장이 그리도 수모스러웠음)
‘기름기건 밥풀떼기건 한꺼번에 덤벼라 우이씨. 국방부 시계 후다탁 돌리고 나서 선생님이 될 꺼야.’
그런 볼 멘 자세로 식판과 가마솥과 하수도까지 종횡무진 활약해야 했다. 작대기 두 개인 일병은 위생복에 군복바지로 반반씩 착용한 채 주로 생선과 고기를 잘랐는데 같은 일병끼리라도 짬밥순을 구별해 일병고참이 육고기를 맡았고 쫄따구 팀이 생선대가리를 쳤다. 작대기 세 개인 상병은 장화 대신 군화로 바꾼 채 야채를 자르거나 식판에 밥을 퍼 올렸다. 선생님이 되면 아이들과 똑같은 얼굴로 살아가야지, 마음을 다지기도 했다.
제대 말년 병장 아저씨는 포즈부터 달랐다. 반들반들 다린 군복 정장차림으로 어슬렁어슬렁 움직였으니 어디 한가운데도 부뚜막 냄새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장독대 뒤에서 떡라면을 끓여놓고 면세품 쏘주에 푹신 젖을 수 있는 그 풍모가 아, 참으로 고즈넉했다. 그리고 일·이등병 쫄따구끼리 시불시불 가마솥 닦으며 손가락 기름더께를 굳혀놓았다. 제대 후 ‘국어시간에 밥해먹는 스크린’도 느닷없이 그려보았다.
이상하다. 세월이 흘러 둥지 튼 새 신랑으로 입(入)하면.
구정물 세상과 ‘영원히 굿바이’인 줄 알았는데 웬걸 초짜교사가 자발적 주방전문가로 진화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결혼 초에는 아내의 뱃속에 생명이 웅크리고 있으므로 사내의 주방 담당이 당연하다고 짜맞췄다. 해산 이후에는 아내가 갓난아이 치다꺼리와 둘째 아이 준비로 워낙 바빠서 사나이도 솥뚜껑 자리로 투입될 수 있는 거라고 해몽을 만들었다. 그렇게 익숙해지더니 언제부터였나, 설거지 하는 꿈이 등장하기도 하면서 마인드가 부뚜막 체질로 바뀌는 것이다. 술떡으로 쓰러졌다가 아차, 설거지, 하고 벌떡 일어서며 등굣길 서두르는 것이다.
주방 체질이 진해지면서 가까운 글쟁이 벗들의 설거지 문장을 흠집낸 건 순전히 나의 심기 탓이다. 김상배 시인의 ‘나는 밸도 없나, 설거지 하다가 물묻은 손으로 전화를 받는다’라는 구절이 첫 타켓이었고 유지남 선생의 ‘설거지 끝낸 하얀 그릇들이 상큼한 속살을 드러낸다’가 차기 타켓으로 설정되었다. ‘홧김에 서방질’처럼 착한 시인들만 괴롭혔다.
‘당신들의 시가 구경꾼 시선의 전형이라오. 수컷들의 태생적 한계라닌깐.
‘그런 스승은 자유는 말해도 평등은 말할 수 없답니다.’
건둥건둥 술자리 공격으로 벗들을 쬐끔 불편하게 했고, 그들의 아내로부터 아주 소소한 응원을 받기도 했다.
그러면서 요잇, 문장을 한 바퀴 비틀며,
‘술떡으로 문을 열면/ 귀여운 내 새끼들 호수처럼 맑은 눈동자/ 아부지 밥줘/ 화사하게 달그럭댄다’를 내밀었다. 보라, 이게 참교육 스승의 진정성이라며 우쭐대면 벗들이 쓰뭉한 표정으로 술잔을 내밀었다. 그들이 별로 감동하지 않았으므로 ‘신새벽 술떡으로 쓰러졌다가도/ 밥! 하고 벌떡 일어서는 삭은 장작 스승’이라는 시작(詩作) 타법으로 자아도취 해룽거렸다. ‘얼음밥 씹던 분필장이’ 위에 ‘밥이 하늘이다’를 오버래 시킨 걸 직관과 감성의 합체라고 우기기도 했고.
‘요새 아이들은 예전과 달라서, 참’이란 한숨을 입에 달고 다니던 중년.
(기실 이 문장은 피라미드에도 적혀있던 진부함의 표본임) 90년대 중반 즈음 2박3일 야영장으로 인솔한 우리 질풍노도의 중딩들이 밥을 먹을 때는 그리도 용감하더니 식후 포만감에 젖은 채 도통 설거지 포즈를 취하지 않는 것이다. 그 신세대 사춘기들의 게으른 풍경에 뚜껑이 열린 나는.
‘이 새끼들, 집에서 배운 버릇 바깥까지…….’
그 말이 튀어나오지 않아서 종시 다행이다. ‘참다, 참다, 끝까지 참았더니’ 그 옛날 제자들은 무럭무럭 성장하여 어느새 잔주름 익숙한 불혹에 접어들었는데……여전히 선생님을 마음씨 여린 캐릭터로만 기억해서, 아, 눈물이 좔좔 흐르게 민망하다.
그 옛날 ‘때까치 소녀’들과 양로원 찾던 기억도 이제 아득한 스크린이다.
사춘기 문학소녀들이 프라이팬과 부침개 반죽을 들고 간 날은 학력고사를 보름 앞둔 날이다. 쪼글쪼글한 할머니들이 툇마루에 마중 나와 파안대소로 햇살 버무려진 파꽃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던가. 더러는 부침개 접시를 들고 벽쪽으로 돌아앉아 혼자만의 입술 속에 집어넣는 할머니 뒷모습이 우울하게 클로즈업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들기름 파티를 벌인 후 사춘기 끝물 소녀들과 본격적 설거지 타임에 돌입했으니, 닦고 말리고 부뚜막 정리까지 진짜 단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던 솜씨다. 그 황홀한 스크린을 곱씹다 보니 속절없이 세월이 흘러.
초로의 주말부부인 지금 나는 또 홀아비 스승이 되어.
서산시 대산읍 기은리 바닷가 아파트에서 혼자 초로의 자취판을 벌이는 것이다. 이제 정년을 삼년 남짓 남겨놓은 채 ‘빛의 속도 같은 세월’을 절감하며 홀아비 낭만에 취하는 것이다. 밥과 설거지는 어느새 몸의 부분이 되었는데도 첫 설거지 마음 자세로, ‘이제 <비밀의 화원>처럼 조심조심 뚜껑을 연다‘라고 쓰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대개 ‘혼잣밥은 너무 편안한데도 그조차 귀찮아‘ 하며 쪼르르 꿂기도 한다. 가끔은 벗 황재학 선생이 15년 전 『우리교육』에 발표한 「국어 시간에 김밥 먹기」를 아슴아슴 떠올리는 환상으로 흐물흐물 공복을 채웠고.
내 나이 59세, 고3 청년학도들과 40년 차이.
신산의 사연도 나뭇잎처럼 털어낼 초로의 시점인데도 열아홉 수험생들 앞에서 여전히 ‘두근두근 내 인생’이다. 이 심장박동의 시발점은 80년대 초 총각선생 때 ‘안광이 지배를 철하는 여고생 눈빛’과 맞서기 위한 강박증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랬다. 그 소도시 수수꽃다리 소녀들이 새내기 스승을 아득아득 발라먹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음모를 꾸며줘서 행복했다. ‘출입문에서 칠판지우개 떨어뜨리기’ 식의 얄개 작전이나 펴던 여고생들이 지금은 수탉 같은 아줌마가 되어 구구구 군살 빼기에 몰입중인데.
그 후로도 열아홉 청춘들과 씨름하다 보면 한결같이 몸이 허공에 15센티쯤 떠 있는 것 같다. 저 아름다운 청춘들이 입시에 묶여 시끈시끈 머리띠 동여매고 책상 머리 씨름하는 모습이 ‘손가락 걸린 시한폭탄’처럼 불안하게 아름다운 것이다.
수능이 끝나고 또 세월이 흐르다가 마침내 졸업식.
사내아이들은 머리에 무스를 발라 뾰족뾰족 세우고 개선장군처럼 등장하고 계집아이들은 짧은 치마 나풀거리며 화장발까지 겹쳐 나를 황홀하게 한다. 그네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갑자기 터진 헛소리 질문.
“좋은 신랑감은 무엇일까?”
이제 막 둥지를 떠난 소녀들이 후리늘씬하거나 명문대 출신 그리고 돈 잘 버는 놈팽이를 끄집어내면 ……나는 설레설레 흔들며.
“설거지 잘하는 놈이 좋은 옵바야.”
아무도 부탁하지 않았는데 불쑥 시를 읽어버렸다. 그 순간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내 마음을 나도 잘 안다. 는적는적 준비한 화면을 띄우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싱크대 틈새기로 빠져버린 참기름 병뚜껑 그 사소함에 온 세상 우지끈 뒤집어지는 것이 문제다 동굴 속 그늘에 안주하던 온갖 잡동사니들 ‘틈입자 빗자루’와 맞붙으며 아우성이다 먼저 썩은 행주 조각이 모서리에 발목 묶은 채 안 된다 안 된다 끌려갈 수 없다며 이를 옹문다 이번에는 식칼로 바닥 긁기다 사이다 병뚜껑이 뽀얀 먼지 뒤집어쓴 채 ‘아아 형광등은 눈이 너무 시려요’ 옷고름 부여잡고 얼굴 붉힌다 마지막으로 효자손 갈퀴질이다 찌그러진 볼따구 지줏대 삼아 치켜올린 둔부가 끙끙 수치심에 떤다 모가지 힘줄 때마다 우두둑 구기며 이를 갈지만 녹슨 젓가락 하나 토해냈을 뿐 딸깍딸깍 밀려만 가는 병뚜껑
동 트는 새벽 출근길 찾아 허발나개 달리자 삼월 아침 하늘 뚜껑이 열려 대설주의보가 열렸던 날이다
–졸시 「꽃샘눈」
“어디서 베낀 거죠? 선생님.”
“순수 창작인데…….”
“뭔가 있어 보이긴 하네요. ……무슨 얘긴지 모르지만.”
화들짝 움츠린 이유는 찬바람이 창살을 때린 탓이다. 또 있다. ‘오늘 이 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임을 날마다 체득하는 사내의 심장 겨누며 쨍그랑쨍그랑 유리알 쏟아지는 소리가 설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쓴 거야’
순간 열아홉 청춘들이 손가락질 감추고 키득키득 웃을 것이다. ‘에 - ’하면서.
계좌번호 (농협) 457124-52-028800
주민등록번호 : 570102-1051721
첫댓글 ㅋ 힘이 느껴집니다, 에너지요. 산문적 요소는 있는데 소설이나 시로 ..근데 계좌번호는 왜 써 있는지 궁금해요,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