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가 문제다. 프루스트가 살았던 시대와 작가를 주목해야하는가. 아니면 작품 그 자체만을 중요시해야하는가. 아니면 그 작품이 가지고 있는 구조나 서술방식을 중요시해야 하는가, 등등 여러 생각을 가지게 한다. 모든 방법이 동원되어야 하겠지만 특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인가부터 궁굼해진다. 물리적인 시간, 철학적인 시간도 의미가 다르다. 그리고 무엇을 잃어버렸다는 것인가. 11권에는 다시 찾은 시간이라고 하는데 시간은 되찾을 수 있는가. 되찾았다면 그 찾은 것은 무엇인가. 궁금증이 너무나 많다. 욕망, 좌절, 부활이라는 단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소설에 나오는 고유명사도 특이하다. 실제로 소설의 무대가 되는 콩브레combray, 발베크ballbec와, 스완swan, 게르망트guermantes 등 지명과 인명은 그것이 한 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그 개인의 가족, 사회, 역사 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 two creamed eggs, a wing of rost chicken, three croissants, a dish of fried potatoes, grapes, coffe, a bottle of beer.....followed by a quarter of a glass of vichy water when I go to bed nine or ten hours after my meal....
☆ Proust's brother Robert decides to delay the funeral for a few days to give visitors an opportunity for one last look. Artists are summoned to the beside(writers, painters, a scuptor, two photographers) and the writer's brdroom turns into a studio, an anatomy the-after, and a museum in which Proust's corpse is the only exhibit on display-a tableau vivant, so to speak, Marat at his last gasp, his body arranged in its habit-ual writing posture,lying in bed amidst the clutter of his papers, arm oustretched as if about to take up the pen like a dying Gaul the sword.
마르셀 프루스트에 대해
19세기 이래의 리얼리즘을 타파하고 20세기 신문학의 길은 연 프랑스 작가로, 인간 심리에 대한 깊은 통찰과 혁신의 수법으로 7편으로 된 대하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성하였다. 프랑스의 파리교외 라 퐁테느 가에서 태어난 섬세한 감수성과 분석적 경향이 강한 성격으로 성장하였다. 청년시절에는 화려한 사교계의 총아였으나 지병인 천식과 어머니의 죽음이 전기가 되어 38세 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쓰기 시작, 코르크를 바른 방에 틀어박힌 채 죽을 때까지 집필 생활만을 계속하였다. 작품으로는 초기의 작품 {즐거운 그 나날}, 미완성의 장편 {장 상퇴유}가 있으며, 대표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나의 독백으로 시작, 무의식의 기억을 통해 인간 심리의 심층을 파헤치고 독자에게 화자와 동일한 체험을 유도하는 가운데 독립된 예술세계를 구축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프루스트는 이 작품을 통하여 이 소설의 주인공인 '나'를 끊임없이 현실에 의해 좌절되곤 하는 무력한 정신상태를 그렸으며, 지난날의 회상을 통한 삶의 묘사를 예술적으로 시도하여 외적 사물의 섬세한 묘사와 더불어 심미적인 전개로 이를 채색하였다. 이 작품은 인간의식으 사실의 기억을 더듬어 해명하고 이를 시적으로 묘사한 미학적, 철학적, 과학적인 교양이 짙게 배어있어 20세기 신심리주의 문학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사로트 : 알려지지 않은 실재를 밝히고 존재하게 만드는 탐구다. 즉 푸루스트는 창조라는 개념대신에 이미 존재하는 것, 하지만 보지 못하던 것을 발견하고 드러내는 재창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각자의 내부에 있던 본질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전통소설에서 볼 수 있는 미의 규범에 부응하는 방식이 아니라, 실용적이고, 강렬하고, 살아있는 방식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쪽 : 오래 전부터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왔다. 때로는 촛불을 끄자마자 즉시 눈이 감겨서 '잠드는 구나'하고 생각할 틈조차 없는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반 시간 후, 잠이 들었어야할 시각이라는 생각에 깨어난다. 아직 손에 들고 있으려니 여기는 책을 놓으려고 하며, 촛불을 불어 끄려고 한다. 조금 전까지 읽고 있던 책에 대한 회상은 깜박한 사이에 단절된 것이 아니라, 다만 그 회상은 야릇한 모양으로 변한 것이다. : 프루스트 38세에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그의 장년에 해당하는 나이다. 오래 전이란 바로 38세를 기준으로 자기 앞의 시간을 말한다. longtems이라는 프랑스어가 기억에 남는다. 오래 전이란 시간의 시기는 아마 2살 아니면 3살 정도가 아닐까? 잠자리는 밀폐된 공간을 말한다. 그러니까 프루스트는 공간을 좁게 잡는다. 침대도 오래된 침대다. 좁아지는 만큼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그가 만약 성격이 활발하고 건강하였다면 그의 글쓰기는 넓은 공간으로 우리를 퍼지게 안내할지도 모른다. 침대라는 정적의 공간 속에서 자신을 회상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샘으로 이루어진 깊은 밀폐된 공간에서 어떤 감각을 만나면 샘의 바닥으로 두레박을 넣어서 건져올리는 것이다. 밀폐된 공간을 가장 신성시하게 만드는 물건이 바로 초다. 더우기 촛불이라는 감각을 느끼며 아늑한 상태, 다시 말해 몽롱한 상태가 되면 그는 애벌레가 되어 기어다는 것이다. 유년의 침대, 촛불, 회상은 그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 더를 붙이면 그의 고독을 첨가해야 한다. 하나 더는 고독을 이겨내기 위한 문자의식이다. 그는 침대에서 육체를 뒤척이고 기억한다. 잠들기와 깨어나기, 책을 읽다가 잘 시간이 되면 잡니다. 잠이 들다가 촛불을 끄기 위해 다시 깨어납니다. 책을 보다가 다시 잡니다. 반수면의 침대 공간이다. 자세하게 살피면 그는 잠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깨어나면서 그 과정에서 몽상을 비몽사몽을 경험한다. 프루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독서는 대화와는 다르게 혼자인 ㅅㅇ태에서, 즉 고독한 상태에서 지적인 자극을 계속해서 즐기고 영혼이 활발히 활동하는 것을 유지시키게 한다면 대화는 그것을 즉각적으로 해산시키는 법이다.{독서에 대하여}, 29쪽의 말이다. 고독은 푸루스트의 아버지다.
7쪽 : 곧, 책에 나온 성당, 사중주(四重奏), 프랑스와 1세와 카를 5세와의 대결 등등이, 흡사 나 자신의 일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깨어난 후에도 얼마 동안 계속되는데, 그것은 나의 이성에 별로 어긋나지 않지만, 단지 비늘처럼 눈을 덮어버려, 촛불이 이미 꺼지고 있는 것을 알아채는 것을 방해한다. : 왜 이렇게 그는 회상 해야만 하는 것일까? 지나갔던 과거가 다시 깨어나 그를 지배하는 것일까? 머리 속의 회상이 현실의 프루스트를 얼마나 지배하길래 성당을 나오고 사중주 음아기 나타나고 프랑스와 스페인의 전쟁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회상이 다른 감각을 방해할 정도다.
7쪽 : 나는 곧 시력을 회복하여 나의 주위가 캄캄한 데에 놀라지만 그 어둠이 나의 눈에는 쾌적하고도 아늑하다. 아니, 나의 정신에 어둠은 까닭없는, 불가해한, 참으로 아련한 것처럼 되어서, 아마 더욱 쾌적하며 더욱 아늑한지도 모른다. : 어둠을 좋아하는 사람 텅 빈 공간보다는 어둠이라도 자신을 꽉 채워져야만 안심을 하는 그런 병적인 사람. 어둠의 심연에서 살아움직이는 그 무엇들이 감각이라는 열쇄를 만나기만 하면 누에고치가 실을 치듯 줄줄 흘러나온다. 프루스트는 어둠의 자식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에게 침대는 곧 그의 지위다. 그의 자격이고 신분이자 계급이며 권력 그 자체다. 이런 오타쿠 적인 개별적인 침대 공간에서 그는 절대자다. 그 누구도 그에게 명령하지 못한다. 단 예외가 있다. 그의 무의지저 기억말고는.....
10쪽 : 잠든 인간은 시간의 실을, 세월과 삼라만상의 질서를 자기 몸 들레에 동그라미처럼 감는다. 깨어나자 본능적으로 그것들을 찾아, 거기서 자기가 차지하고 있는 지점과, 깨어날 때까지 흘러간 때를 삽시간에 읽어 내는데, 종종 그것들의 열(列)은 서로 얽히고 끊어지고 한다. 잠 못 이루는 밤의 새벽녘, 평소에 잠자는 자세와 다른 자세를 취하고 독서하다가 잠들었을 때, 단지 팔의 위치가 올라가 있는 것만으로, 태양의 걸음을 멈추게 하거나 뒷걸음치게 할 수 있으므로 눈뜬 순간에는 이미 일어날 시간 인줄 모르고서 지금 막 잠든 줄로 여길 때도 있을 것이다. : 잠든 사람은 자기 몸에 실을 칭칭감고 자는 자들이다. 그런데 그 실은 단순한 실이 아니고 실 속에 사건이 들어가 있는 그런 실이다. 그런 실이 몸을 칭칭감아돌아 깨어나는 즉시 그 실에 감전된 사건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냥 지나쳐서는 생존이 안 되는 것이다. 특히 잠을 못 이루는 새벽에는 책을 읽는데 평소와는 다른 포즈다. 이 독특한 포즈는 태양의 걸음을 멈추게도 하고 뒷걸음치게도 한다. 헌데 이게 무슨말이야. 당췌 이해가 안 되네......비몽사몽해지고 몽롱해진다. 이 글을 읽는 내 자신이 벌써 마르셀에게 빠져들어 몽환적인 상황이 되어 반쯤은 판단력을 잃어 촛점을 놓게 될까봐 걱정이다. 이렇게 프루스트에게는 잠들기와 깨오나기의 드라마를 통해서 세 가지의 수면상태, 영혼의 수면상태, 육체의 시간, 의식의 시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반수면 공간은 잠듬과 깨어남 사이라면, 텍스트 공간은 육체와 문자 사이의 관계다.
10쪽 : 나는 동물 내부에 꿈틀리거리고 있는 것 같은 극히 단순한 원시적인 생존감을 갖고 있을 뿐, 나의 사상은 혈거인(穴居人)릐 그것보다도 더 빈곤하다. : 나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단지 생존만 하려고 말초신경을 돋우고 있는 동굴 속의 사람보다도 더 육감적인 것을 텍스트로 하겠다는 말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쪽 : 지나치게 잔 나머지 옴짝달싹 못하는 나의 육신은 그 피로의 정도에 따라서 사지의 위치의 표점을 정하고 나서, 벽의 방향과 세간의 자리를 추정하고, 몸이 누워있는 방을 다시 구성해이름붙인다. 육신의 기억, 갈빗대에, 무릎에, 어깨에 남아 있는 기억이, 지난날 육신이 누웠던 여러 개의 방을 잇따라 그려 보여준다. 그러는 동안 육신의 둘레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상상된 방의 꼴에 따라 자리를 변경시키면서 어둠 속에 맴돈다. 그리고 나서 나의 사념이 때와 꼴의 문지방에서 망설이며, 겨우 주위의 상황에 비추어 보아, 같은 집임을 확인하기에 앞서, 한편 나의 육신 쪽은, 방마다에 대하여, 침대의 종류, 방문의 위치, 창문의 햇살구멍, 복도의 존재를, 내가 그 방에서 잠들었을 때나 깨어났을 때에 머리에 떠올랐던 사념과 함께 환기한다. 관절이 굳은 나의 옆구리는 제 방향을 알아채려고, 예를 들어 천개(天蓋) 달린 큰 침대 속에서 얼굴을 벽 쪽으로 돌리고 누워 있거니 상상해본다. 그러자 곧 나는 '이런, 어머니가 잘 자라는 저녁 인사를 하시러 오지도 않았는데 잠들어 버렸구나?'하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이러한 나는, 몇 해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집에 있는 것이다. 나의 육신, 깔고 누웠던 옆구리는, 나의 정신의 결코 잊어버리지 않을 과거를 충실하게 간직하고 있어, 가는 사슬로 천장에 걸어 놓은 항아리 모양의 보헤미아 유리제 야등(夜燈)의 불꽃이라든가, 시어나산(産) 대리석의 벽난로를 상기시키는데, 그것은 콩브레의 나의 침실, 조부모 댁에서 지내던 먼 옛 나날, 정확하게 상기되지 않고 나에게는 어쩐지 현재의 일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곧 아주 말짱하게 잠이 깰 때는 보다 뚜렸하게 밝혀지리라. : 프루스트는 반쯤 죽어있는 사람이다. 그래야 그는 그의 생존의 이유를 말할 수 있다. 그는 유언도없이(intestate)죽었다. 아니 그의 이 책이 그의 유언인 것이다. 그의 유언은 장장 14년동인 쓴 것이다. 그의 가정부주 celeste albare였다. (다른 내용을 소개한다) 작가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사람이아니라, 이미 존재하지만 습관과 편견으로 가득한 의식에 가려져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던 것을 들춰내고 밝히고 해독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데 사로트와 프루스트가 만난다. 또한 이 둘은 그렇게 발견한 내면의 본질과 감각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글쓰기 방식, 즉 문체에 핵심적인 역할을 부여한다.(유예진) 문체는 더 이상 소설 속 인물들과 즐거리를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그치지 않고, 시에서와 마찬가지로 산문으로 된 소설에서도 그 자체로서 가치를 띠게 되었다. 작품에 고유한 인상을 남기고 끝가지 전개시키는 힘을 가진 것은 인물도, 줄거리도 아니라 문체가 되어야 한다는데 사로트와 프루스트는 동의한다.
이 소설은 인물은 사라지고 인물은 자신들 고유의 그람자다. 현대소설을 전통소설과 비교하면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전복이 일어났다. 전통소설에서 내용의 핵심을 차지하던 인물과 줄거리는 감각이라는 새로운 소재에 자리를 내주었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방식이 되었다. 감각이 현대소설의 소재로 차용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연속적으로 여러 겁으로 구성되어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감각의 세계를 통해 끊임없이 펼쳐짐으로써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특정한 감각이 다양한 방식에 의해 밝혀지고 활용되면, 그것이 구성하던 세계의 한 면도 충분히 밝혀지게 된다는 논리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측면의 감각은 이제 진부해지고 새로운 감각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이 세계는 그야말로 무한한 감각의 겹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새로운 시도를 주저하지 않는 젊은 작가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감각을 밝히려고 할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0쪽 : 그 다음, 다른 자세의 추억이 나타난다. 벽이 딴 방향으로 가 버려, 나는 시골에 있는 생 루부인 댁, 나의 방이 있다. 아차! 벌써 10시는 되었을 것이다. 만찬이 끝났을 것이다! 저녁마다 생 루부인과 함께 산책하고 돌아와서, 만찬복으로 갈아입기에 앞서, 잠시 눈을 붙이는데 너무 잔 것 같다. 왜냐하면 콩브레에서는 산택으로부터 귀로가 아무리 늦어도, 창문 유리에 석양이 아직 붉게 비치고 있는 것을 보곤하였다. 탕송빌에 있는 생 루 부인 댁에서 보낸 생활은, 그러한 생활과는 다른 생활로, 따라서 내가 경험하는기쁨도 달라서, 밤에만 외출하여, 옛 어릴 적에 햇볕을 쬐며 놀던 그 길을 이번에는 달빛을 받으며 걸어간다. 그리고 만찬복으로 갈아입지 않은 채 내가 깜박 잠들어 버리는 방, 그것은 산책에서 돌아 오는 길에 밤 속에 홀로 켜켜져 있는 등대처럼, 그 램프의 불빛이 새어 나오는 걸 내가 멀리서 알아보는 그 방이다. : 자제를 다르게 하면 또 다른 추억이 나탄난다고 하고 있다. 주인공의 몸은 온갖 추억이 녹아있다. 그러다가 몸이 약간만 달리 반응해도 접촉을 해도 전혀다른 추억이 저절로 생겨난다. 그러보 보면 주인공 마르셀이 산책을 통해서, 그리고 여자를 통해서 어떤 행동을 보이고 어떻게 인격을 형성하였는지가 궁금하다. 일단 생 루(saint Loup)는 주인공인 마르셀의 친한 친구다. 생 루 부인은 질베르트라는 여자다. 질베르트는 스완이라는 사람의 딸이다. 스완은 부르조아 유태인이며 높은 교양을 갖춘 사교계 인사이다. 스완은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사교계에서 최상급에 속해있던 스완의 지위는 점점 추락하게 된다. 이 스완은 주인공의 어린 시절, 콩블레의 추억에 중요한 측면을 이루고 있다. 그는 주인공의 집을 방문해 밤늦도록 머무름으로써 주인공이 잠자리에 들때마다 고대하던 어머니의 키스를 방해한다. 주인공에게 발벡에 가도록 권유한 것도, 그에게 엘스티르에 대해 이야기를 해준 것도, 라베르마의 연극을 보러 가도록 권유한 것도 스완이다. 게다가 주인공의 인성 형성의 두 드 측면을 상장하는 콩브레의 두 산책 길 가운데 한쪽이 바로 스완의 집쪽이다. 이것이 주인공의 가장 중요한 체험 중의 하나이다. 한마디로 스완은 주인공의 정신적인 스승의 역할을 한다.(?) 이 스완의 딸이 질베르트인데 주인공 마르셀은 어린시절 이 여자를 사랑한다.(?) 진정한 사랑이라기 보다는 짝사랑이라고 해야 옳다. 이 장면은 자기의 친구의 부인을 짝사랑하던 사람의 집에 자기가 자던 방이 있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산책에서 돌아올 때 홀로 켜진 등대처럼 자기를 인도하고, 의지하고 있다는 사랑의 간접 표현을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다. 생 루가 결혼한 후에도 방이 있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창문 유리에비친 붉은 석양, 달빛, 홀로 켜진 등대 불빛이 새어나오는 그런 방이란 마르셀에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다.
그러고 보면 마르셀의 감각은 어떤 계기가 없을 때는 발동되지 않다가 몸이 방향을 감지하면 옛날에 자기 몸 안에 재어놓았던 감각이 그대로 머리를 통해 육체를 통해 문자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좀 이상하기는 하다. 메제글리즈와 게르망트는 그가 산책하는 두 갈래 길이다. 이 부분을 더 알아야 하겠다.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는 것은 모든 기호를 방출하며, 모든 배우는 행위는 기호나 상형문자의 해석이다. 나무들이 내뿜는 기호에 민감한 사람만이 목수가 된다. 병에 민감한 사람만이 의사가 된다. 목수나 의사 같은 이런 천직으 늘 어떤 기호에 대한 숙명이다.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는 모든 것은 기호를 방출하며, 모든 배우는 행위는 기호나 상형문자의 해석이다. 프루스트의 작품은 추억을 늘어놓은 추억의 전시장이 아니라 기로들을 배우 나가는 과정 위에 건축되어 있다.
이 장면도 생 루 부인과의 추억이라느 기호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그 사람이 지니고 있거나 방출하는 기호들을 통해서 개별화시키는 것이다. 즉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이 기호들에 민감해지는 것이며 이 기호들로부터 배움을 얻는 것이다. {프루스트와 기호들} 26쪽
15쪽 : 콩브레에서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곁을 떠나서, 잠 못 이룬 채 꼼짝 못하고 있어야 할 침실이, 날마다 땅거미가 질 때부터 잠자러 잘 때까지의 기나긴 동안, 내 불안의 괴로운 중심이었다. ....방의 습관이 몸에 밴 덕분에 잔다는 고통을 빼놓고는 나에게 방이 견딜 만한 것이 되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