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502) 아끼지 말고 꺼내세요 1 - ⑥ “깨끗한 돈을 줄게”―채에게/ 시인 김복희
아끼지 말고 꺼내세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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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깨끗한 돈을 줄게”―채에게
타인의 소원은 내 것이 아니므로 하찮아 보이거나 우스워 보일 수 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우리가 순간 그러하듯이.
나는 일주일에 두 번, 예술고등학교 문예창작학과 아이들에게 시 창작과 감상을 가르친다.
작년 학기 말에 나는 아이들에게 각자 원하는 것에 대한 위시리스트를 작성한 후 제비뽑기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자신이 뽑은 친구의 위시리스트로 시를 쓰도록 했다.
자신의 위시리스트가 아닌 타인의 위시리스트로 시를 쓰게 해도 될까 망설였지만,
나는 아이들을 믿었다. 내 믿음은 배신당하지 않았다.
아이들 모두 타인을 시에 들일 때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하는지, 나름대로 답을 찾은 듯 보였다.
채로부터 만난 이런 구절(인용을 허락받았다).
나는 이 구절을 보고 거의 울 뻔했다.
“깨끗한 돈을 줄게
깨끗하게 써”
채는 이 구절을 마주 앉은 수로부터 얻었다.
채는 강에게 “커다란 지렁이 젤리”와 “애정과 관심”이 포함된 구절을 주었다.
강은 정에게 만약 “자신이 신이 된다면”이라는 조건을 떠올리게 했다.
소원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비는 행위다.
소원은 비는 이의 가장 내밀한 고통을 반사한다.
표면상으로는 ‘위시리스트’로 시를 쓰라고 했지만 사실 나는 아이들이 타인의 연하고 약한 구석을 발견하기를,
타인의 고통을 발견하고 그것을 시로 써보기를 요구했다.
아이들은 내 믿음도 친구들의 소원도 지켜주었다.
아이들이 쓴 시가 전부 좋았다. 나는 아이들에게 완성된 시의 제목 아래
그 시를 쓰도록 소원을 공유해준 친구들의 이름을 부제로(‘○○○에게’) 달도록 했다.
시는 혼자 쓰는 것이지만, 사실은 혼자서는 쓸 수 없다는 것,
타인의 소원과 타인의 고통은 쓰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것. 그것을 잊지 않았으면 했다.
시를 쓰다보면 타인의 고통에 기댈 일이 생긴다.
나는 나만의 고통이라고 썼는데 타인의 고통과 연결되는 경우도 잦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타인의 고통에 닿는 일을 피할 길이 없다.
타인의 고통을 잘 다루는 방법을 가르칠 수 없어서, 나는 타인에게 고통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쳤다.
타인의 고통이 쓰는 사람을 회생 불능의 상태로 몰아넣는 광경을 종종 봐왔다.
일어나야 할 일은 반드시 일어나기 마련이고, 계속 쓴다면 언제나 감수해야 할 위험일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그 위험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지 않기를 바랐다.
내가 시 선생으로서 할 일은 아이들이 그런 일을 해야 할 때를 대비해주는 것이었다.
크게 아프지 않게, 얼마간 앓고 잘 먹고 잘 쉬면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회복탄력성을 길러주는 일이었다.
시를 쓰는 이들에게 아주 깨끗한 돈을 주고 싶었다.
특히 ‘열아홉’의 내게도.
친구가 수박을 사 왔나 보다
수박이 썰린다 수박 향기는 어둡다
이름을 불러 온다 죽은 수박이 죽어 간다
죽은 사람은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뒷모습은 짧은 밤을 가르는 일에 집중되어 있다
다음 날 다음 다른 날
이루어지지 않은 소원들은
무서운 연료가 된 것 같고 매일 떠 있겠다는 의지로
태양이 우리를 길들이고 있다
불 꺼진 부엌 한가운데
타오르지 않으면 괴로운 불이 일렁인다
물속은 물을 잘 모른다
빛이 가라앉고 가라앉아 타오르고
수면에 비친 것이 썩어 가는 동안
친구가 돈을 놓고 갔다
손끝이 하애지도록
돈이 좋았다
―졸시 「열아홉」 전문, 『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 민음사, 2018, 57쪽
< ‘시를 쓰고 싶으시다고요, 김복희 산문집(김복희, 달 출판사, 2023.)’에서 옮겨 적음. (2023.12.29.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502) 아끼지 말고 꺼내세요 1 - ⑥ “깨끗한 돈을 줄게”―채에게/ 시인 김복희|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