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505) 무엇을 써야 하나요 - ① 하늘 아래 새로움은 없다/ 시 창작 지도자 하린
무엇을 써야 하나요
네이버블로그/ [하린의 시클] 하늘 아래 새로움은 없다
① 하늘 아래 새로움은 없다
시 쓰기는 단적으로 말해 무엇을 어떤 언어로,
어떤 형상으로 표현하느냐에 따라서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장르다.
그래서 시를 쓰는 사람들은 ‘무엇을’과 ‘어떻게’에 대한 고민을 매 순간마다 할 수밖에 없다.
첫 번째 장에서는 ‘무엇을’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한다.
잘 알다시피 시의 제재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이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시인의 의미망에 걸려들면 모두 다 제재화 되어 활용된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것 중에서도 좋은 시의 제재가 되는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과 관련된 것들이다.
문학은 ‘인간학’이다.
인간에 대한 탐구의 결과물로 문학이 존재한다.
따라서 개별 인간의 정서나 개별 인간의 속성을 비유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모든 현상이나 사물이 시의 제재가 된다.
이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시 창작을 자의든 타의든 배운 사람이다.
그래서 대부분 자기 삶의 주변부에서 사람과 관련된 것들을 창작의 재료로 찾는다.
찾아다니는 일이 처음에는 무척 재미가 있다.
제재를 하나하나 만나는 일이 새롭고 흥미진진해서 창작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다.
제재를 찾아다니다 보면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을 되돌아보는 효과까지 있어 때론 시 쓰는 일에 보람과 뿌듯함까지 느끼게 된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시 창작을 배우면서 다른 시인들이 쓴 작품들을 많이 읽게 되며 어느 순간
‘내가 쓰려는 것들을 누군가 다 써버렸네’하는 한탄이 찾아오게 된다.
자신의 시에 도취해서 혼자 창작을 할 때는 몰랐던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때가 오게 된 것이다.
기성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 읽을수록 절망감은 더더욱 커진다.
‘이미 창작된 것들이 이렇게 많구나!’ 하는 탄식과 더불어 자신의 시와 기존의 시가 너무나 흡사하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자신의 주변에서 찾아낸 노숙자 이야기, 독거노인 이야기, 가족이나 친척 이야기,
고난에 들어찬 사람들 이야기, 생활 속에서 깨달음을 주었던 존재에 관한 이야기 등이 모두 버려지는 순간이 오게 된 것이다.
왜 이 세상엔 누군가 다 쓴 소재들만 존재하는가?
시 창작을 이제는 멈추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아래의 내용을 읽어보면 자신이 찾은 소재가 낡은 소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 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리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린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공광규, 「소주병」 전문, 『소주병』, 실천문학, 2004.
엎드려야 보이는
온전히 몸을 굽혀야 판독이 가능한 典이 있다
서 있는 사람의 눈에 읽힌 적 없는
오랜 기록을 갖고 있다
묵언의 수행자도, 맨발의 현자도 온전히 엎드려야만
겨우 몇 글자 볼 뿐이다
어느 높은 빌딩에서 최첨단 확대경을 들이대고
글자를 헤아리려 들었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일찍이 도구적 인간의 탄생 이후
밤새 달려야만 수평선을 볼 수 있다고 믿게 되면서
바닥은 사람들에게서 점점 멀어졌던 것이다
온전히 걷지 못하는 사람들이
울긋불긋 방언을 새겼던 것이다
―박혜림, 「바닥경전」부분, 『바닥 경전』, 나무아래서, 2011.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서울역 돌방식 무덤에서
한 남자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면
누군가 발로 툭 건드리자
덮고 있던 신문지가 열렸다면
세상에 공개된 남자의 얼굴이 낯선 부족처럼 느껴졌다면
그는 분명 전사임에 틀림없다
치열한 영역 다툼으로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고
온몸에 피멍이 솟았다면
군용잠바 왼쪽 주머니에 선사시대의 사진이 발견되었다면
중년여자와 어린 딸이 박제되어 있었다면
그가 마셨을 것으로 추정되는 병 속에 이물질은
분명 전투에서 패배한 자들이 자주 찾는 독극물이다
바지 주머니를 뒤질 때 예상대로 로또 복권 한 장과
폐쇄된 사냥터에서 쓸 수 있는 무료 배식권이 나왔다면
그는 분명 부족의 깨끗한 미래를 위해 제거된 무녀리다
관리자들은 관을 연 뒤 한 시간 만에 결론에 도달한다
“10년 만의 한파, 신원 미상의 남자 하나 얼어 죽음”
당신과 당신의 그림자가 이런 보고서를 봤다면
분명 당신은 죽은 남자와 같은 연대에 사는 공복이다
―하린, 「서울역 석실 고분」 전문, 『야구공을 던지는 방식』, 문학세계사, 2010.
자본주의와 도시 문명과 그늘로 자리한 존재들과 현상들에 시인들의 시선은 항상 가 있다.
그래서 노숙자, 빈민, 따돌림을 받는 사람,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가족이나 친척, 3D업종 종사자,
재개발 현장, 재래시장 현장 등에 시를 쓰려는 자의 시선들이 즐비하게 서성인다.
결핍과 소외가 오랫동안 시인들에 매력적인 소재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공광규 시인의 「소주병」은
아버지라는 존재의 고달픈 삶을 소주병이라는 대상물에 전이시켜 형상화한 작품이다.
그리고 박해림 시인의 「바닥경전」은
노숙자를 바닥의 경전을 읽는 존재로 인식하여 내밀하게 그 의미를 들여다본 작품이고,
필자의 「서울역석실고분」은
대리석으로 마감 처리된 지하 서울역을 석실고분으로 상상하여 노숙을 하다 죽은 사람을 냉철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위 세 편은 모두 소외당하는 존재를 바라보는 태도 면에서 시적 인식이 비슷하다.
안타까운 시선과 연민의 시선이 지배적으로 자리하여 창작되었지만 각자 만의 형상을 획득하고 있다.
위의 예문과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들은 지금도 허다하게 창작되고 주목받고 있다.
같은 제재나 비슷한 제재인데도 새롭게 인식되는 좋은 시가 여전히 창작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봇대에 위옷 걸어두고 발치에 양말 벗어두고
천변 벤치에 누워 코를 고는 취객
저 캄캄함 혹은 편안함
그는 자신을 마셔버린 거다
무슨 맛이었을까?
아니 그는 자신을 거기에 토해 놓은 거다
이번엔 무슨 맛이었을까?
먹고 마시고 토하는 동안 그는 그냥 긴 관(管)이다
…(중략)…
지갑은 누군가 가져간 지 오래.
현세로 돌아갈 패스포드를 잃어버렸으므로
그는 편안한 수평이 되어 있다
부장 앞에서 목이 굽은 인간으로
다시 진화하지 않겠다는 듯이
봄밤이 거느린 슬하
어리둥절한 꽃잎하나가 그를 덮는다
이불처럼
부의 봉투처럼
―권혁웅, 「봄밤」 부분,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창비, 2013.
분명 취객의 이야기는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소재이기에 그 자체만으로 봤을 때 신선하지 않다.
그럼에도 권혁웅 시인의 「봄밤」이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새로운 묘사와 새로운 시적 진술이 개성적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벤치에 누워있는 취객의 외연과 내적 속성을 진정성 있게, 섬세하게 읽어내고 있다.
취객이 가진 본질을 “저 캄캄함 혹은 편안함”이라고 직관한 후 그의 상태를 탁월하게 시적으로 진술했다.
“그는 자신을 마셔버린 거다” “아니 그는 자신을 거기에 토해 놓은 거다” “먹고 마시고 토하는 동안 그는 그냥 긴 관(管)이다”
“현세로 돌아갈 패스포드를 잃어버렸으므로 / 그는 편안한 수평이 되어 있다”와 같은 표현들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취객이 처한 암담함과 편안함을 직관적인 관찰과 사유로 적절하게 표현했기에,
읽는 순간, ‘맞아 그 취객은 지금 몸도 마음도 그런 상태에 놓여 있을 거야.’하고 공감하게 된다.
다른 사람도 분명 취객에 대한 시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봄밤」처럼 탁월하게 직관해서 새롭게 다가오게는 쓰진 못했다.
권혁웅은 자신만의 목소리로, 자신만의 창작 기법으로 익숙한 소재를 새롭게 형상화했다.
그래서 「봄밤」이 2012년 제12회 미당문학상을 받지 않았을까?
소재가 같더라도 자신만의 시적 형상과 자신만의 시적 태도와 자신만의 사유로 개성 있게 그려내면
끊임없이 새롭게 쓸 수 있다.
여기서 ‘자신만의’라는 단어가 도드라진다.
‘자신만의’가 어떻게 구현되는지 자세히 설명하겠다.
익숙한 제재여도 반드시 개별적으로 형상화하면 된다.
‘개발자적’이란 말이 생소할 것이다.
‘개별자적’이란 말을 필자는 ‘일반적’이란 말의 반대 개념으로 이 책에서 사용한다.
‘일반적’이라고 한 말은 일반적 인식과 일반적 태도와 일반적(식상한) 표현을 지칭한 말이고,
‘개별자적’이라고 한 말은 개별적 인식, 개별적 태도, 개성적인 표현을 지칭한 말이다.
시는 감동 없이 누구나 흔하게 인식하는 일반적인 인식과 일반적인 형상이 아니다.
시인이 특별하게 인지한 개별적 사유와 개별적 형상이다.
그러니 개별 화자의 개별 경험, 개별 정서를 집요하게, 섬세하게, 감각화 된 사유로 관찰하고 그려내야 한다.
그렇게 했을 때 비로소 새롭게 보이는 자신만의 시가 탄생하게 되고 시적 감동도 찾아오게 된다.
잘 알다시피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시를 읽는 독자층은 급격히 줄어드는 추세다.
시를 정말 좋아해서 읽는 사람은 드물고, 시를 공부하거나 시를 창작하는,
또는 시를 평가하는 사람들만이 시를 읽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세 부류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이 읽는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감동을 받지 않는다.
아무리 시인이 진정성 있게 시를 썼다고 해도,
그 진정성이 그들에게 감동적으로 전해지지 않기에 식상한 느낌만을 준다.
개별 화자의 입장에서 진지하게 대상과 현상을 관찰하고 섬세하게 사유해서
그것을 자신만의 묘사와 시적 진술로 표현했을 때에만 감동을 주게 되는 것이다.
< ‘슬럼프에 빠진 당신에게 찾아온 21가지 질문, 시클(하린, 고요아침, 2016)’에서 옮겨 적음. (2024. 1. 7.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505) 무엇을 써야 하나요 - ① 하늘 아래 새로움은 없다/ 시 창작 지도자 하린|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