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창작강의 - (507) 무엇을 써야 하나요 - ③ 경험의 확장이 필요하다/ 시 창작 지도자 하린
무엇을 써야 하나요
③ 경험의 확장이 필요하다
시의 씨앗은 직·간접적인 경험에 의해 이루어진다.
경험은 시를 쓰는 사람의 지각과 감수성을 자극하여 심미적인 단초를 제공한다.
그것이 모두 개별화된 화자에게 전달되어 경험이 시를 주도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럴 때 경험을 100% 그대로 시화시키려는 태도를 갖는다면 시 쓰기에 대단한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시는 경험의 진실성을 따지는 장르가 아니다.
형상의 진정성을 묻는 장르다.
그런데 경험이 전부인양, 경험에서 벗어나면 큰일 난 듯 시인의 직·간접적인 경험만을 가지고 시를 쓰면
금방 경험의 한계성을 인식하게 되고 만다.
날것의 경험을 풍부하게 해본 사람이 있다고 치자.
예를 들어 전쟁에서 동료가 죽는 것을 바로 눈앞에서 바라본 사람이 있다고 치자.
이 경험은 너무나 비극적이고 생생한 경험이다.
그러나 그 경험이 적절한 상상적 체험을 만나 확장되지 못한다면 그 경험은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게 된다.
(언어적 표현 능력 이전 단계에서) 그러니 비극적 상황을 극대화 할 수 있는 상상적 체험을 통해
정황을 바꿔야 한다.
다리가 잘리거나 내장 기관이 파손된 상황으로 바꾸거나,
동료가 아니라 가족이나 어린 아이가 죽은 상황으로 바꾸거나,
장소를 바꾸거나, 시간을 바꾸거나, 수류탄이나 포탄 같은 화력이 센 무기로 바꾸거나,
총을 맞은 대상을 300년 된 당산나무로 바꾸거나 하는 상상적 체험을 다양하게 해야 한다.
인간 역사 5000년 동안 비극적인 전쟁 상황은 반복되고 있고,
영화나 게임 같은 미디어 매체에 의해 독자들의 비극에 대한 감각은 너무나 무디어져 있다.
그런 상황에서 상상적 체험을 하지 않으면 나름대로 간절한 체험을 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살아있는 날 것을 독자의 날것으로 인식시키려면 우선 시인과 시적 화자의 분리가 필요하다고 위해서 말했다.
그럴 때 철저히 시인이 화자를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화자가 시인을 주도해야 한다.
시인이 화자를 주도하기 때문에 경험의 확장을 쉽게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시 쓰기 과정에서 시인은 아예 뒤에 있어도 상관없다.
오직 화자의 입장에서 화자가 처한 구체적인 삶의 국면을 화자의 정서로
솔직 담백하게 확장시켜서 그려내야 한다.
절대 화자의 정서에 시인의 가치관이나 의식을 투과시켜서는 안 된다.
이것은 사실과 비사실의 문제가 아니다.
비사실의 시를 썼더라도 그 안에 화자가 절실하게 느끼는 정서가 살아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러니 경험이 더욱 깊어지도록,
내밀해지도록 신선해지도록 재발견하고 재구성하는 것에 인색할 필요가 없다.
거기에 추가적으로 필요한 것이 미묘한 관계성이다.
화자, 타자, 대상 사이에 있을 수 있는 관계의 의미망을 섬세하게 잡아내란 뜻이다.
위에서 예시로 언급한 전쟁 상황이 있다고 치자.
동료가 대낮 산속에서 오른쪽 어깨에 총알이 박히는 부상을 입었다고 치자.
그것을 아주 가까운 곳에서 목격한 사람의 입장에서 시를 쓴다고 치자.
그럴 때 추가적으로 관계성을 생각하는 것이다.
부상당한 사람을 단순화시키지 말고 다층적으로 만들면 된다.
평소에 ‘나’의 자존심을 자꾸 건드린 상관으로 설정했다고 치자.
그러면 부상당한 상관을 바라보는 미묘한 감정이 시적 정황 속에 도사리게 된다.
‘적이다’, ‘아군이다’ 하는 이분법적인 정서가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인간의 본성과 본질을 암시하는 미묘한 정서가 자리한다.
그것처럼 개별 화자의 고뇌와 정서를 다양한 층위로 접근하여 상상적 체험을 진지하게,
풍부하게 해야만 자신만의 시각과 태도가 반영된 시를 쓸 수 있다.
어쩌면 벽에 박혀 있는 저 못은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깊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쪽에서 보면 못은
그냥 벽에 박혀 있는 것이지만
벽 뒤 어둠의 한가운데서 보면
내가 몇 세기가 지나도
만질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못은
허공에 조용히 떠 있는 것이리라
바람이 벽에 스미면 못도 나무의 내연(內緣)을 간직한
빈 가지처럼 허공의 희미함을 흔들고 있는 것인가
내가 그것을 알아본 건
주머니 가득한 못을 내려놓고 간
어느 낡은 여관의 일이다
…(중략)…
못은 밤에 몰래 휜다는 것을 안다
사람은 울면서 비로소
자기가 기르는 짐승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김경주, 「못은 밤에 조금씩 깊어진다」 부분,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문학과지성사, 2012
김경주 시인의 「못은 밤에 조금씩 깊어진다」에서는 생활 속에서 못을 경험한 화자가 등장한다.
중상층이나 서민의 삶을 살아본 사람이라면 한번쯤 못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을 것이다.
김경주도 못을 만져보거나 박아보거나 빼보거나,
그 못에 무언가를 걸어보거나 하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그 경험을 시에 그대로 쓰지 않고 못의 경험을 확장한다.
확장을 위해 먼저 못의 외연과 내적 속성을 섬세하게, 진지하게 읽어냈을 것이다.
그렇게 못의 입장에서 본질을 집요하게 탐구하다보니 어쩌면 자신도 하나의 못이거나
못을 품고 사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닿았을 것이다.
21세기 도시 공간에서 벽에 박힌 돌출된 못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시인은 낡은 여관이라는 공간을 상상적 체험으로 가져온다.
(물론, 이 경험이 실제일 수도 있다. 실제가 아니라는 전제 하에 분석했다.)
저렴한 숙박업소인 ‘여관’은 수많은 인연들이 머물렀다 가는 공간이다.
‘내연(內緣)’이 중첩되거나 교차하는 공감인 셈이다.
그곳에서 화자가 발견한 못은 일반화된 못이 아니라 개별화된 못이다.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깊어지”고 있는 개별화된 못은
“몇 세기가 지나도/ 만질 수 없는 시간 속에서” 허공에 조용히 떠 있다가 “밤에 몰래” 휘어진다.
시인이 철저히 못 입장에서 못과 밀착되어 섬세하게 체험을 했기에 쓸 수 있었던 표현이다.
못엔 수많은 사람들의 옷이나 가방 같은 물건이 걸리게 된다.
그로 인해 수많은 인연들이 못을 통해 만나고 헤어진다.
이제 못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내연’을 간직한 특별한 존재다.
시의 후반부에서 ‘나’와 ‘못’은 동일화되는데, 그
둘은 모두 “밤에 몰래” 휘는 속성를 가진 개별화된 아픔을 가지고 있다.
무조건 최초의 경험에 국한되지 말고
충분하게 정서를 내밀하게 밀고 가서 그 경험을 깊이 있게 재구성해야 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화자의 위치와 태도이다.
화자가 철저히 상상으로 재구성된 경험 맥락 속,
시공간에 거주하면서 관찰하고 사유해야 한다는 점이다.
상상적 체험 맥락을 한발 물러나서 바라보지 말고,
그 상황에 푹 젖어 내밀하고 치밀하게 맥락을 읽어내야 정서의 깊이와 울림을 가져올 수 있다.
개별자를 만들고 상상적 체험을 할 때 중요한 것은 독자의 눈치를 보지 않고 과감하게
극단까지 정서를 몰고 가는 것이다.
지배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극단까지 가서 시를 써야 자신만의 간절한 시를 낳을 수 있다.
극단까지 가는 방법은 화자가 가진 트라우마, 상처, 아픔, 고독, 외로움 등을 솔직하게 적극적으로
시에 반영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상상적 체험을 아무리 풍부하게 한다고 해도 고만고만한 수준의 시만 써지게 된다.
극단의 지점을 향해 화자의 입장에서 끝까지 가야 한다.
그 지점에서 분열되고 찢기고 흩어지고 재구성된 자기 자신을 만난 후
지배적으로 다가오는 본질적인 정서와 감정을 시화시켜야 한다.
무조건 한 발짝 더 다가가는 태도가 필요하다.
한 발짝 더 밀착하여 아픈 정서가 내밀하게 와 닿는,
울림을 주는 시가 탄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제 나는 남자와 자고 나서 홀로 걷는 새벽길
여린 풀잎들, 기울어지는 고개를 마주하고도 울지 않아요
공원 바닥에 커피우유, 그 모래 빛 눈물을 흩뿌리며
이게 나였으면, 이게 나였으면!
하고 장난질도 안쳐요
더 이상 날아가는 초승달 잡으려고 손을 내뻗지도
걸어가는 꿈을 쫓아 신발 끈을 묶지도
오렌지주스 시큼하다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아요, 나는 무럭무럭 늙느라
…(중략)…
추억은 칼과 같아 반짝 하며 나를 찌르겠죠
그러면 나는 흐르는 내 생리 혈을 손에 묻혀
속살 구석구석에 붉은 도장을 찍으며 혼자 놀래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새벽길들이 내 몸에 흘러와 머물지
모르죠, 해바라기들이 모가지를 꺾는 가을도
궁금해하며 몇 번은 내 안부를 묻겠죠
그러나 이제 나는 멍든 새벽길, 휘어진 계단에서
늙은 신문배달원과 마주쳐도
울지 않아요
―박연준, 「얼음을 주세요」 부분,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창비 2007
박연준 시인의 「얼음을 주세요」는 화자의 트라우마를 극단까지 몰고 간 후
만난 정서를 솔직담백하게 그려낸 시다.
시 속의 남자는 분명 부정적인 인식을 불러오는 남자다.
원치 않는 섹스를 한 화자는 “남자와 자고 나서 홀로” 새벽길을 걷는다.
그럴 때의 정서를 화자는 적극적으로 발화한다.
“여린 풀잎들, 기울어지는 고개를 마주하고도 울지 않아요/ 공원 바닥에 커피우유, 그 모래 빛 눈물을 뿌리며/ 이게 나였으면, 이게 나였으면!” 하고 후회에 가까운 정서를 표출한다.
화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늙은 봄’, ‘멍든 새벽길’로 규정했다.
그러니 “추억은 칼과 같아 반짝 하며” 화자를 찌를 것이다.
화자에겐 이제 모든 것이 권태롭고 시시하다.
“더 이상 날아가는 초승달 잡으려고 손을 내뻗지도/ 걸어가는 꿈을 쫓아 신발 끈을 묶지도” 않는다.
두려움도 사라졌다. “휘어진 계단에서/ 늙은 신문배달원과 마주쳐도/ 울지 않”는다.
그저 “무럭무럭 늙”어가는 감정에 젖을 뿐이다.
박연준은 첫사랑의 실패나 성폭행, 원조교제 등을 암시하는 상황에서 나타난
개별 화자의 어두운 부분을 과감하고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시를 썼다.
그것처럼 화자의 체험을 극단까지 몰고가 만나는 지배적 정서를 시에 솔직하게 표출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오롯하게 떠오르는 ‘나’만의 간절한 시와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상상적 체험을 할 때 중요한 것 하나는 있을 법한 일을 상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상은 그 자체로 있을 법한 현상이다.
특별한 일상이 아니라 흔하게 있을 수 있는 일상,
그런 일상을 바탕으로 상상적 체험을 해야 한다.
‘흔한 일상’ 속에서 대다수 사람들이 체험하지만
그냥 지나친 것들 중에서 아직 발견하지 못한 ‘기막힌’ 소재를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흔한 일상’을 벗어난 특수한 상황이나 특별한 일상을 가지고 시를 쓰게 되면
“네 시는 비현실적이야”,
“네 시는 작위적이야.”,
“네 시는 연출하고 있구나.”하는 평을 듣게 될 것이다.
이제 ‘무엇을’에 대한 강의는 모두 끝났다.
그리고 ‘어떻게’에 대한 강의도 이번 장에서 조금씩 설명했다.
나머지 장에서는 ‘어떻게’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이 자세하게 제시될 것이다.
‘무엇을’을 완벽하게 준비했다고 해서 시 쓰기를 다 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는 언어적 감각으로 형상화된다.
완벽한 ‘무엇’은 시 쓰기 전체에서 10%에 지나지 않는다.
제대로 10%가 확보되었다고 해도 90%의 ‘어떻게’가 없으면 탁월한 시를 쓸 수 없다.
‘어떻게’에 대한 방법을 나머지 강의를 통해 하나하나 습득하길 바란다.
< ‘슬럼프에 빠진 당신에게 찾아온 21가지 질문, 시클(하린, 고요아침, 2016.)’에서 옮겨 적음. (2024. 1.13.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507) 무엇을 써야 하나요 - ③ 경험의 확장이 필요하다/ 시 창작 지도자 하린|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