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예군주(文藝君主)를 꿈꾼 효명(孝明), 창덕궁에 남은 그의 꿈
순조(純祖) 30년(1830년) 5월, 세자가 세상을 떠났다.
스물두 살이었다.
죽은 뒤에 올리는 시호(諡號)는 ‘효명(孝明)’.
효성이 지극하고 영민하다는 뜻이다.
효명은 1809년 순조와 순원왕후(純元王后)의 적장자로 태어났다.
현종(顯宗)의 비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숙종(肅宗)을 낳은 이래 약 150년 만에 태어난 적장자(嫡長子)였다.
왕실로서는 큰 경사였다.
1812년 네 살의 나이에 왕세자(王世子)로 책봉됐고, 1819년 열한 살에 풍양 조씨(豊壤趙氏) 조만영(趙萬永)의 딸을 세자빈(世子嬪)으로 맞았다.
훗날 신정왕후(神貞王后)가 되는 세자빈 조씨였다.
그러나 효명은 왕위에 오르기 전 스물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효명은 대단히 총명했다.
아버지 순조의 명으로 1827년 2월부터 1830년 5월까지 약 3년 동안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했는데, 이 기간에 내린 영지(令旨·세자의 명령)는 114건에 이른다.
외척과 노론(老論) 중심의 정치구조를 견제하고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려 했다.
이를 위해 과거(科擧)를 자주 실시했고, ‘이인좌의 난(亂)’ 이후 정계에서 소외됐던 소론(少論)계 인사와 남인(南人)계 인사들을 두루 기용했다.
어느 수령이 백성들을 괴롭힌다는 이야기를 듣고 엄하게 처벌하는 등 일처리가 단호했다.
문예(文藝)에 뛰어났다.
효명의 글은 역대 국왕들의 시문을 모은 『열성어제(列聖御製)』에 수록됐다.
그의 문학적 성취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대의 문인과 학자들이 모여들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 조인영(趙寅永)을 비롯해 윤종의(尹宗儀)·남병철(南秉哲)·김영작(金永爵) 등 새로운 학문과 북학(北學)의 영향을 받은 젊은 지식인들과 교유했다.
특히 실학자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이자 훗날 개화사상과 연결되는 박규수(朴珪壽)와도 교유했다.
효명은 청나라의 선진 문물과 학문에 관심을 보이며 새로운 문예와 정치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순조실록(純祖實錄)』은 효명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마가 솟은 귀한 상이었고, 용의 눈동자로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다.”
궁궐 사람들은 그가 할아버지 정조(正祖)를 닮았다고 했다.
초가을, 창덕궁 후원(後苑)을 찾았다.
효명이 자신의 이상을 펼쳐 보였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곳이다.
후원에는 연못이 잇달아 나오는데, 이 중 부용지(芙蓉池)를 지나 금마문(金馬門) 안쪽으로 들어서면 작은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효명이 독서하고 사색하며 자신의 생각을 가다듬었던 공간이다.
의두합(倚斗閤) 정면에는 기오헌(寄傲軒)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의두(倚斗)’는 북두칠성(北斗七星)에 기대어 선다는 뜻이고, ‘기오(寄傲)’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마음껏 펼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단순한 독서 공간이 아니라 자신의 학문과 이상을 키우는 공간으로 삼았음을 생각하게 한다.
곁에는 한 칸 반 남짓한 운경거(韻磬居)가 있다.
단청(丹靑)도 하지 않은 소박한 건물에서 효명은 책을 읽고 시를 짓고 생각을 가다듬었다.
정조가 후원 내 규장각(奎章閣)을 중심으로 학문과 개혁정치의 청사진을 구상했다면, 효명은 이곳에서 자신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정치와 문예의 질서를 꿈꾸었던 셈이다.
존덕정(尊德亭) 서쪽에는 효명이 지은 작은 건물 폄우사(砭愚榭)가 있다.
‘폄우(砭愚)’는 돌침으로 어리석음을 찔러 깨우친다는 뜻이다.
효명은 존덕정을 ‘만명당(萬明堂)’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는 정조의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에 등장하는 ‘만천명월(萬川明月)’의 뜻을 연상시킨다.
정조가 자신을 모든 냇물을 두루 비추는 달에 비유했다면, 효명 역시 그 정신을 이어받아 군주와 백성의 관계를 생각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애련지(愛蓮池)를 지나 조금 올라가면 연경당(演慶堂)이 나온다.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순조와 순원왕후를 위해 마련한 공간이다.
궁궐의 다른 전각들과 달리 단청을 하지 않아 사대부가(士大夫家)의 저택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경사가 널리 퍼진다’는 뜻을 담은 연경당이라는 당호(堂號) 역시 효명이 지었다고 전해진다.
대문에는 ‘장락문(長樂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오래도록 즐거움을 누린다는 뜻이다.
1828년, 효명의 어머니 순원왕후의 사순(四旬·마흔 살)을 축하하는 진작례(進爵禮)가 연경당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효명은 이 행사를 준비하면서 궁중정재(宮中呈才)를 직접 창작하거나 정비했다.
효명이 만든 궁중무용은 여러 작품인데, 대표적인 궁중무용으로 꼽히는 춘앵전(春鶯囀) 역시 효명세자가 창작한 것이다.
흔히 춘앵무(春鶯舞)라고도 한다.
춘앵전은 봄날 버드나무 가지에서 노래하는 꾀꼬리의 모습을 춤으로 표현한 것으로, 한 명의 무용수가 화문석(花紋席) 위에서 추는 독무(獨舞)라는 점이 특징이다.
그에게 예(禮)와 악(樂)은 단순한 의례나 공연이 아니었다.
나라의 질서를 세우고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는 정치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후원에서 걸어나오면 효명이 정무를 보았던 옛 동궁(東宮) 권역이 펼쳐진다.
중희당(重熙堂)이 중심이었고, 주변에는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시강원(侍講院)과 서재·도서 공간 등이 자리했다.
상당 부분이 사라져 맨땅이지만, 성정각(誠正閣) 등은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성정각의 ‘성정(誠正)’은 『대학(大學)』에 나오는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을 뜻한다.
학문을 닦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성정각에는 누각 건물이 붙어 있는데; 동쪽에는 희우루(喜雨樓); 남쪽에는 보춘정(報春亭)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희우(喜雨)’는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려 기뻐한다는 의미이고, '보춘(報春)'은 봄이 오는 것을 알린다는 의미이다.
중희당은 정조가 문효세자(文孝世子 순조의 이복형)를 위해 세운 공간이었지만, 문효세자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뒤에는 효명세자가 세자로서 활동하는 중요한 공간이 됐다.
그러나 효명이 자신의 꿈을 펼칠 시간은 너무 짧았다.
왕위에 오르지 못한 채 불과 스물두 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헌종(憲宗)이 왕위에 오르면서 효명은 사후 익종(翼宗)으로 추존됐고, 훗날 문조(文祖)로 다시 추존됐다.
봄날 버드나무 가지에서 노래하던 꾀꼬리가 여름이 오기도 전에 사라진 것처럼, 그의 생은 너무나 짧았다.
만약 그가 요절하지 않았다면 조선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창덕궁과 후원에는 효명이 남긴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작은 집과 연못, 책과 글, 음악과 춤.
그리고 할아버지 정조처럼 새로운 정치와 문예의 질서를 만들고자 했던 한 젊은 세자의 꿈.
효명의 꿈은 창덕궁과 창덕궁 후원의 작은 공간들 사이에 오래도록 남아 있다.